“신인이라고 봐주지 말고”…‘적토마’의 당돌한 등장과 신인왕 등극

[이재국의 엘팬알백] ㊽1997년 이병규 입단과 신인왕 수상 이야기

'적토마' LG 이병규가 1997년 구단 역사상 5번째 신인왕에 오른 뒤 환하게 웃고 있다. ⓒLG트윈스
“신인이라고 봐주지 말고 성의 있게 던져주세요.”

1997년 4월 15일 잠실구장. 프로에 갓 데뷔한 신인 타자의 당돌한 인터뷰에 모두 아연실색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는 웃으면서 추억의 저편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해프닝. 30년 전 풋풋했던 젊은날의 초상이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48번째 주제는 훗날 ‘적토마’와 ‘라뱅스리런’으로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뒤흔든 ‘영구결번 레전드’ 이병규의 화려한 등장 이야기다. 1997년 역대 타자 최고대우로 입단한 그는 구단 역사상 5번째 신인상을 수상하며 ‘스타덤’에 오른다.

아마추어 야수 최대어 이병규는 1997년 LG 트윈스에 입단한 뒤 '적토마'라는 근사한 별명을 얻었다. 적토마는 훗날 구단 역사상 두 번째 영구결번 레전드가 된다. ⓒ스포츠서울

◆LG ‘주사위 던지기’ 마지막 승리…단국대 이병규 지명

“LG 트윈스 지명하겠습니다. 단국대 외야수 이병규!”

1996년 9월 23일 오전 서울 르네상스호텔. 1997년 신인드래프트 1차지명 우선권을 가리는 주사위 던지기에서 이긴 LG 관계자들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아마추어 최대어 타자로 평가받는 장충고-단국대 출신의 외야수 이병규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주사위 던지기’는 그야말로 LG에겐 신이 내린 축복이었다. 1차지명을 원하는 선수가 달라 주사위 던지기를 하지 않은 1994년(LG 류지현, OB류택현 선택)을 제외하고 1990년부터 1997년까지 무려 7연승을 올렸다.

(하지만 이것은 LG의 주사위 던지기 마지막 승리이기도 했다. 최후의 주사위 던지기가 된 1998년 1차지명 우선권 가리기에서 OB가 승리하면서 김동주를 선택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상세하게 설명하도록 한다.)

한편, LG가 이병규를 찍자 OB는 배명고-한양대 출신의 우완투수 이경필을 1차지명으로 호명했다.

단국대 시절의 이병규. 아마추어 최대어로 성장하면서 1997년 1차지명 전쟁의 중심에 섰다. ⓒ스포츠서울

◆초등학교 시절 800m 육상선수…적토마의 출발

이병규는 고교 시절까지는 사실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소속팀이 약팀이었기에 매스컴을 통해 이름 석 자를 알릴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초등학교 시절 처음 운동에 입문한 건 육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들판의 말처럼 잘 달렸다. 서울 청구초등학교 때 800m 달리기 선수로 활약했다. 훗날 생긴 별명 ‘적토마’는 어쩌면 그때부터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야구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가을이었어요. 하루는 육상부 훈련이 끝나고 야구부 훈련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청구초 야구부 손용근 감독님이 ‘너 야구 하고싶냐?’면서 권유를 하시더라고요.”

현재 LG 퓨처스(2군) 감독인 이병규의 말이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야구선수가 된 것은 아니었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돈이 많이 드는 야구선수가 되는 걸 부모님이 반대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의 육상부가 없어졌다.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꼬마 적토마’는 야구를 해보고 싶었다. 집안에서는 여전히 반대했다. 손용근 감독이 “야구 외에는 신경 안 쓰게 해주겠다”며 도움을 줬고, 힘겹게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야구에 입문할 수 있었다.

이종열은 장충고를 졸업한 뒤 1991년 LG에 입단했다. 장충고 2년 후배 이병규는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학교에 온 이종열을 본 뒤 LG 입단을 꿈꾸게 된다. ⓒ스포츠서울

◆무명의 중·고교 시절과 LG 입단의 꿈

이병규는 청구초 졸업 후 야구로서는 명문이라 할 수 없는 서대문중과 장충고로 진학했다.

서대문중은 현재 야구부는 물론 학교 자체가 폐교된 상태다. 장충고는 요즘엔 최고 야구 명문고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시엔 일반인들 중에 야구부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야구계에서는 변방이었다.

그 시절 사람들에게 “장충고 야구선수입니다”라고 소개하면 대부분의 첫 반응은 “장충고도 야구부가 있어?”였다.

“프로야구 원년 멤버 유종겸(MBC 청룡), 이홍범, 양세종(OB 베어스) 선수가 장충 출신”이라고 설명을 하다가도 “또 누가 있어?”라고 재차 물은 땐 머리를 긁적거리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는 상황…. 그도 그럴 게 이들 KBO 원년 멤버 이후로는 프로무대에서 알려진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학교에 경사가 난다. 내야수 이종열이 1991년 LG에 고졸 선수로 입단한 것이었다. 신인 평균계약금 1200만 원에 미치지 못하는 연습생 수준의 900만 원을 받고 입단했지만 장충고로선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이병규가 장충고 1학년 때 3학년이었던 선배였다.

“고2 때 송년회였나? 이종열 선배님이 LG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학교에 오신 적이 있었어요. 그 유니폼이 너무 멋있어서 LG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LG 입단이 꿈이었습니다.”

이병규뿐만 아니라 장충고 선수들에겐 프로선수가 된 이종열이 그야말로 우상이었다. 그만큼 장충고는 고교야구 무대에서 약체였고, 특출난 선수 또한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병규는 “고등학교를 장충고에 간 것이 나에겐 오히려 더 좋은 선택이 됐다”고 돌이킨다.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2학년,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기량이 급성장했다.

이병규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프로팀 스카우트들 사이에서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팀 성적이 따라오지 않으니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을 뿐 ‘꾼’들 사이에서는 그의 재능과 잠재력이 알려지고 있었다.

신일고의 초고교급 강타자 강혁이 1992년 9월 19일 역대 고졸신인 최고대우로 OB 베어스에 입단하자 윤동균 감독이 모자를 씌워주며 축하하고 있다. 하지만 강혁은 다시 한양대에 진학하기로 번복하면서 이중등록 파문 속에 KBO 영구실격 선수가 된다. ⓒ스포츠서울

◆“강혁보다 더 주겠다” LG의 스카우트 제안 뿌리치고단국대 진학

1992년 고교야구엔 거대한 스카우트 파동이 일었다. 신일고 3학년 ‘천재타자’ 강혁을 둘러싼 OB와 한양대의 싸움이었다.

강혁은 신일고 3학년 초에 한양대와 먼저 가계약을 했다. 하지만 OB에서 "역대 야수 최고대우를 해주겠다"며 강렬한 러브콜을 보내자 6월말 OB와 비밀리에 계약을 맺는다.

당시 고졸 대상자는 11월 1일부터 15일까지 프로팀과 계약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OB와 강혁은 외부로 비밀계약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다. 야구판에 '강혁이 OB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더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도 낌새를 알아챈 듯했다.

그러자 OB는 9월 19일 아예 공개적으로 강혁의 입단식을 진행하면서 세상을 향해 계약 사실을 알렸다.

한양대와 아마추어야구를 관장하는 대한야구협회에서 "프로-아마 협정을 깼다"며 반발했다.

그런데 강혁이 함께 한양대로 가기로 한 친구들 때문에 OB 입단을 번복하고 한양대로 진학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더 큰 후폭풍이 몰려왔다.

강혁의 이중등록 문제는 KBO와 대한야구협회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졌다.

결국 강혁은 한양대에 입학했고, KBO는 1993년 봄에 강혁에 대해 영구실격 처분을 내리게 된다. 영영 프로에는 올 수 없는 신분을 만든 것이다.

당시 OB가 강혁과 계약할 때 안긴 금액은 언론 발표용으로 4000만 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6000만 원을 지불하기로 했다.

고졸 신인에게 그야말로 파격적인 계약금을 안겼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1991년 LG 1차지명을 받은 송구홍(선린상고-단국대)이 5000만 원, 1992년 삼성 2차 1라운드에 지명된 동봉철(신일고-중앙대)이 5300만 원을 받아 KBO 역대 야수 최고 계약금 신기록을 다시 써 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고교생 강혁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세상이 온통 OB와 강혁의 스카우트 파동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다른 한쪽에서도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LG 역시 장충고의 이병규를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던 것. 강혁 파동이 워낙 거세다 보니 이병규와 LG의 줄다리기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당시 LG 유지홍 스카우트는 이병규와 이병규 부모님을 만나 연일 설득을 이어갔다. 타격 재능뿐만 아니라 육상선수 같은 주력까지 갖추고 있어 대성할 유망주로 본 것. “강혁보다 계약금을 더 주겠다”며 강한 러브콜을 보냈다.

20대 시절의 '적토마' 이병규. 특유의 꾸밈 없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인터뷰를 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LG에서 제시한 금액을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그렇지만 당시 아파트 한 채는 살 수 있는 그런 거액이었어요.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아버지는 제가 프로에 바로 가는 걸 원했죠. 하지만 저는 대학을 가고 싶었어요."

장충고 시절 이종열 선배를 보고 LG 입단을 꿈꿨던 그가 프로직행 대신 왜 단국대로 간 걸까.

"그때만 해도 제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요. LG에 쟁쟁한 선배 외야수들을 제치고 주전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죠. 또 그 시절엔 다들 대학을 가서 국가대표가 되는 걸 엘리트 코스로 여겼잖아요. 국가대표를 지낸 대학 선배들이 프로에 가서도 곧바로 주전이 되고 성공하는 모습을 봐 왔기 때문에 저도 당연히 대학을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1992년 롯데 염종석(17승)과 한화 정민철(14승) 등이 고졸 신인으로 두 자릿수 승리를 챙기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 시절 고졸 야수가 신인 첫해 성공한 케이스는 없었다.

“제가 아버지를 설득했죠. 대학 가서 국가대표가 되고, 4년 후 프로에 들어가서 더 많은 돈을 벌겠다고 말이죠. 어머니는 제 편이었어요. 어머니도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했어요.”

집안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프로에 가는 게 맞는 일이지만, 그는 미래를 위해 LG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LG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4년 후를 기약했다.

1991년 LG에서 은퇴한 뒤 스카우트로 변신한 유지홍. ⓒ스포츠서울
“장충고 야구부가 약체이긴 했지만 이병규는 스카우트들의 눈에 띄었죠. 실제로 제가 구단에 ‘고교랭킹 1위 야수’라고 보고를 올린 기억이 납니다. 신일고 강혁이 최고 타자로 평가받았지만 장충고 이병규는 타격 재능도 있는 데다 키도 크고 잘 달려 공수주를 갖춘 대형 선수가 될 거라고 봤던 거죠. 몸매가 호리호리해 당시 파워는 좀 떨어졌지만 그건 나중에 충분히 보강할 수 있다고 판단했어요.”

당시 LG 스카우트를 맡은 유지홍의 말이다. 그는 30여 년 전의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갔다.

“이병규가 기량도 기량이지만 고교 시절에도 성격이 밝고 좋았거든요. 매사 긍정적이었어요. 이병규와 부모님을 만나 ‘좋은 대우를 해줄 테니 바로 프로에 들어오라’고 끈질긴 설득을 했죠. 이병규도 솔깃해하고, 부모님 마음도 반 이상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구단의 허락을 받고 ‘무조건 강혁보다 1원이라도 더 주겠다. 고졸 최고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죠. 그런데 결국 이병규가 ‘일단 단국대에 가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기다리겠다. 4년 후에 보자’ 하고 헤어졌던 거죠.”
단국대 시절의 이병규. 당시엔 3번을 달고 뛰었다.

◆1G 11타점 한국新…단국대 2학년 이병규 세상을 향해 포효

이병규가 세상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제대로 알린 건 단국대 2학년 시절. 1994년 4월 6일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대학야구 봄철리그 경남대전에서 혼자서 무려 11타점을 올리는 놀라운 퍼포먼스를 펼쳤다.

1회초 2타점(중전적시타), 3회초 4타점(만루홈런), 5회초 1타점(솔로홈런)에 이어 6회초 왼쪽 펜스를 원바운드로 맞히는 2타점 좌월 2루타를 날렸다. 사이클링히트를 의식해 3루까지 달리다 아웃됐지만 5타수5안타 11타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날 단국대가 20-1, 7회 콜드게임으로 이기면서 경기가 종료됐다. 그렇지 않았다면 타석이 더 돌아왔을지 모른다.

11타점은 한국야구 역사상 한 경기 최다타점 신기록이었다. 프로야구가 탄생하기 1년 전인 1981년 한국화장품의 김봉연(1982년 해태 입단 후 원년 홈런왕)이 한전을 상대로 기록한 10타점을 넘어섰다.

(현재 KBO 최고 기록은 9타점. 2015년 삼성 박석민이 9월 20일 사직 롯데전에서 기록했다).

신문과 방송에서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야구팬들도 비로소 이병규의 존재를 알기 시작했다.

1996년 4월에 단국대 2학년 이병규가 한국야구 역사상 한 경기 최다타점 신기록을 작성하자 스포츠서울이 보도한 기사의 제목.
“그것 때문에 야구하면서 처음으로 신문에 이름이 크게 나고 국가대표도 됐어요. 태극마크를 다는 꿈을 이뤘죠. 실제로 국가대표를 하면서 야구에 더 크게 눈을 떴어요. 다른 학교지만 박재홍, 김종국, 안희봉, 문동환, 조성민, 임선동, 조경환, 심재학 선배 등등 쟁쟁한 선수들을 만났고, 그런 형들 따라하면서 실력이 크게 늘었던 것 같아요.”

이병규는 승승장구했다. 이제 빼놓을 수 없는 국가대표 단골손님이 됐고, 장충고 시절보다 훨씬 더 큰 거물로 성장했다.

4학년이 되자 1997년 신인드래프트 야수 최대어로 떠올랐다. 이병규를 1차지명하기 위해 LG와 OB는 주사위 던지기에 사활을 걸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LG가 또다시 승리했다. 4년 전 품지 못했던 짝사랑을 결국 LG가 안을 수 있게 됐다.

이병규가 1996년 12월 LG 입단식에서 최종준 단장과 악수를 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LG트윈스

◆역대 야수 최고 계약금 4억4000만원 LG 입단

이병규는 12월 5일 아마야구 기자단 투표에서 ‘96년 아마야구 MVP’로 선정됐다. 대학 4학년 시절이던 그해 타율 0.355에 10홈런, 15도루, 29타점으로 맹활약한 결과였다.

그리고는 골든글러브 시상식 하루 전날인 12월 10일 계약금 4억4000만 원, 연봉 2000만 원 등 총액 4억6000만 원의 조건에 사인을 하면서 LG와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1년 전 현대 박재홍의 계약금 4억3000만 원보다 1000만 원 많았다. KBO 역대 야수 최고 계약금 신기록이었다.

이병규는 4년 전 아버지에게 “국가대표가 되고 프로에 가서 더 많은 돈을 벌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다.

LG는 이로써 계약금 7억 원을 보장한 투수 임선동에 이어 외야수 이병규까지, KBO 역대 투수와 야수 최고 계약금 신기록을 연이어 작성했다.

LG가 1996년 12월 10일 단국대 이병규와 역대 야수 최고 몸값에 계약한 사실이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스포츠서울

당시 언론은 이병규에 대해 ‘한국의 이치로’라는 별명을 붙이며 그의 LG 입단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LG로서는 베테랑 노찬엽이 내리막길을 타고 있는 상황에서 좌익수 김재현~우익수 심재학~중견수 이병규로 이어지는 막강한 젊은 좌타라인을 구축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11월 6일 해태와 3대2 트레이드(송유석 동봉철 최향남↔조현 최훈재)로 영입한 동봉철까지 가세하면서 공·수·주 걸쳐 전반적으로 외야 전력이 업그레이드됐다.

LG는 이병규에게 등번호 9번을 넘겨줬다. LG에게 9번의 상징성은 컸다. 종전에 ‘미스터 LG’ 김상훈이 달았고, 1994년 김상훈과 트레이드돼 영입된 ‘해결사’ 한대화가 달았던 번호였다. 이병규가 새로운 구단 간판스타로 성장해 달라는 기대와 염원을 담았다.

1996년 11월 1일 LG 정식 사령탑에 오른 천보성 감독은 이병규에 대해 “시즌 개시부터 주전 외야수로 기용하겠다”면서 “스카우트들의 판단만큼만 해준다면 중심타선에 배치할 생각이다”고 신뢰를 보냈다.

1997년 LG 신인 이병규가 4월 15일 해태전에서 호쾌한 타격을 선보이고 있다. ⓒ스포츠서울

◆‘LG 킬러’ 조계현을 무너뜨린 신인의 폭풍타

천 감독은 약속대로 1997년 개막(4월 13일 전주 쌍방울전)부터 이병규를 5번타자 중견수로 기용했다. 하지만 개막전에서는 안타를 신고하지 못했다. 세 타석에서 범타로 물러난 뒤 4-7로 따라붙은 8회초 무사 만루서 상대투수 조규제를 상대로 밀어내기 볼넷을 얻어내 1타점을 올렸다.

이튿날인 4월 13일 쌍방울전. 마침내 안타 신고를 했다. 2회초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난 뒤 4회초 쌍방울 잠수함 투수 성영재를 상대로 좌전안타를 날려 데뷔 6타석 만에 첫 안타를 기록했다. 6회초 2루수 쪽 내야안타, 8회초 좌익수 플라이로 4타수 2안타를 올리며 KBO 통산 2043안타로 가는 첫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LG는 1997년 개막 2연전에서 2연패(6-7, 2-6)를 당했다. 천보성 감독 체제로 출발하며 심기일전하려던 LG로서는 충격적인 출발이었다.

'팔색조' 또는 '싸움닭'으로 불린 해태 조계현. LG는 1990년대에 조계현에게 유난히 약했다. ⓒ스포츠서울

하루 쉰 뒤 4월15일 잠실구장에서 해태와 만났다. 해태와 시즌 첫 맞대결이기도 했지만, 이날은 LG의 홈 개막전이기도 했다. 반드시 연패를 끊고 가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상대 선발투수는 하필이면 ‘팔색조’이자 ‘싸움닭’으로 불리는 조계현. 1993년부터 1995년까지 LG전에서만 무려 12연승을 거두기도 했던 ‘LG 천적’이었다. 이상훈이 1995년 8월 18일 1-0 완봉승으로 조계현을 꺾어 연패에서 탈출했지만, 그 이후에도 LG는 조계현만 만나면 여전히 껄끄러웠다. 점수는커녕 1경기에 3~4안타 뽑기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LG는 조계현 대항마로 루키 임선동을 선발카드로 내세웠다. KBO 역대 최고계약금(7억 원) 주인공의 데뷔 무대였다. 여기에 최고 스타인 해태 이종범과 야수 최대어 신인 LG 이병규의 맞대결도 팬들의 구미를 당기게 만드는 요소였다.

전통의 흥행카드답게 평일임에도 2만5831명의 관중이 잠실구장에 운집했다.

1회초 이종범이 임선동을 상대로 초구에 안타, 2구째 도루를 성공하며 얼을 빼놓았다. 1회초에만 3점. 이날 ‘LG 킬러’ 조계현이 선발투수라는 점에서 모두가 사실상 여기서 승부가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루키가 철옹성 조계현을 무너뜨리는 데 선봉에 섰다. 1회말 2번타자 동봉철의 솔로홈런으로 0-1로 따라붙은 뒤 2사 1루에서 이병규가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로 LG의 2점째를 생산했다. 체인지업을 받아쳤다.

3-3 동점이던 3회말 2사 1, 2루서는 우익선상으로 빠지는 총알같은 3루타로 2명의 주자를 불러들였다. 이번엔 슬라이더를 공략했다. 5-3 역전.

여기서 조계현이 강판됐다. 2.1이닝 5실점. 그동안 ‘싸움닭’의 벼슬만 봐도 먼저 꼬리를 내렸던 LG 선배들은 겁없는 햇병아리의 출현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팬들은 조계현이 먼저 강판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지르며 그동안 짓눌렸던 트라우마를 날려버렸다.

그런데 해태엔 이종범이 있었다. 중월 3점홈런을 터뜨려 6-5로 재역전. 데뷔전에 나섰던 임선동도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며 강판됐다.

이병규의 행진은 거침이 없었다. 5회말 볼넷으로 나간 뒤 2루도루에 성공했다. 벤치의 사인이 나지 않았지만 단독 판단으로 과감하게 뛰었다. 서용빈의 희생플라이 때 홈을 파고들어 6-6 동점 득점. 7회에는 중전안타를 때렸다. 9회말 홈런을 친다면 사이클링히트. 하지만 결대로 밀어치다 좌익수플라이로 물러났다.

이날 경기에서 LG는 연장 10회 접전 끝에 7-6으로 재역전에 성공하며 시즌 첫 승을 올렸다. 1사 1루에서 박준태의 병살타성 타구를 잡은 유격수 이종범이 2루에 끝내기 악송구를 범하면서 치열했던 승부가 마감됐다.

이 경기의 승리투수는 차명석. 6-6 동점이던 7회 1사 후 구원등판해 10회까지 3.2이닝 1안타 무실점으로 역투하며 시즌 첫 승을 올렸다. 차명석으로선 그해 두 자릿수 승리(11승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79)로 가는 커리어 하이 시즌의 첫 걸음이었다.

스포츠서울이 1면에 LG 신인 이병규가 3안타 3타점을 터뜨리며 해태 조계현을 무너뜨린 영웅이 된 사실을 크게 보도하고 있다. 사진은 연장 10회말 끝내기 승리 때 이병규가 환호하는 모습. ⓒ스포츠서울

◆전설의 설화 사건 “성의있게 던져주세요”의 전말

이날 이병규는 자신이 어떤 선수인지를 팬들에게 강렬하게 어필했다. 2루타와 3루타 1개 등 4타수 3안타 3타점 3득점. 사이클링히트에 홈런이 빠졌지만 타격능력은 물론 수비와 주루, 투지 등 모든 재능을 한 경기에 응축해냈다.

잠실구장을 찾은 LG 팬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이병규! 이병규!”를 연호하며 거물 루키의 출현을 반겼다.

곧바로 방송사의 히어로 인터뷰가 진행됐다. 이런 대규모 관중 앞에서 환호를 처음 받아 본 이병규도 흥분했다. 얼굴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사건(?)이 터지고 만다.

“신인이라고 봐주지 말고 성의 있게 던져주세요.”

이 인터뷰는 이날 밤 TV 스포츠뉴스를 통해 전국에 전파됐다.

경기 후 짐을 싸서 숙소로 돌아갔던 해태 선수들은 스포츠뉴스를 본 뒤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입이 벌어진 건 LG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잠실구장. 해태 선수들은 조계현 앞에서 모두 씩씩댔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제가 혼을 내주겠습니다”, “프로의 매운 맛을 제대로 보여주겠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조계현이 웃으며 “야야, 그러지 마라”며 말릴 정도였다.

LG 쪽에서도 사태가 심상찮다고 느꼈다. LG 선배들이 이병규의 손을 잡고 해태 덕아웃을 찾아갔다. 왼쪽에 김용수, 오른쪽에 정삼흠, 뒤쪽에 김태원이 따라붙어 해태 조계현에게 인사를 시켰다.

2017년 7월 9일 거행된 이병규의 영구결번(9번) 행사에 1호 영구결번(41번) 주인공인 김용수가 찾아와 축하해주고 있다. 김용수는 이병규가 신인 시절 말실수를 했을 때 해태 덕아웃에 직접 데리고 가서 사과를 시키기도 했다. ⓒ스포츠서울
“선배님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경황이 없어서 인터뷰를 하다 저도 모르게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이병규가 사과를 하자 조계현은 화를 내는 대신 특유의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격려를 했다.

“야, 내가 볼 때 넌 될 것 같다. 열심히 해라.”

이병규는 이튿날인 16일 5타수 2안타 1타점, 17일 5타수 3안타 1타점 1득점을 올렸다. 해태와 3연전에서만 14타수 7안타를 날렸다.

시즌 4경기를 소화한 시점이었지만 타율 0.471(21타수 10안타)로 쌍방울 조원우(0.500)에 이어 타격 부문 2위, 최다안타 부문 1위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켰다.

하룻강아지가 아니었다. 조계현의 말처럼 프로에서 ‘될성부른 떡잎’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줬다.

1997년 정규시즌 개막 후 11경기를 치른 시점(4월 16일)에서의 타격 순위표. LG 신인 이병규가 타율과 최다안타 1위에 올라 있다. ⓒ스포츠서울

이제는 웃으며 돌아볼 수 있는 추억의 설화 사건. 현재 LG 퓨처스 감독인 이병규에게 당시 상황을 묻자 “창피하게 그 얘기는 또 왜 꺼내냐”며 웃었다.

“신인으로서 들떠 있었고, 인터뷰 스킬도 없을 때잖아요. 그전까지 방송 인터뷰 자체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인터뷰 말미에 ‘조계현 투수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는 거예요. 당황한 상태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하긴 했는데 그렇게 실수를 했던 거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병규는 훗날(2012~2014년) LG 코치가 된 조계현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 조계현 코치는 이병규의 밝고 즐거운 성격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과거 설화 사건의 후일담을 서로 얘기하면서 껄껄 웃었다고 한다.

“병규야, 너 그때 죽을 뻔했어. 해태 투수들이 다음날 너 4타석에 들어서면 네 번 다 맞히려고 했는데 내가 말렸어. 내가 널 살렸어.”

이병규 감독은 “그땐 말도 가리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던 철없던 시절이었다”면서 그 이전에 있었던 에피소드까지 추가로 소개했다.

“1997년 신인들이 경기도 이천에 있는 인화원(LG그룹 연수원)에 들어가서 신인교육을 받을 때였어요. 제가 앞에 나가서 ‘임선동 선수를 물리치고 신인왕이 되겠습니다’라고 크게 고함을 쳤어요. 선동이 형 면전에 대고 말이죠. 다들 폭소가 터지고 난리였어요. 선동이 형은 국가대표도 함께 하고 친했던 사이였어요. 선동이 형도 할말이 없는지 웃고 그랬죠.”
1997년 정규시즌 MVP 이승엽(당시 21세)과 신인왕 이병규(당시 23세)가 선정된 사실을 보도한 스포츠서울. 사상 최초로 신인왕이 MVP보다 나이가 많았던 해였다.

◆당돌했던 루키 ‘임선동 물리치고’ 신인왕

이병규는 시즌 초반부터 연일 맹타를 휘둘렀다. 11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타율(0.465)과 최다안타(20개) 부문 단독 선두를 질주하기도 했다. 슈퍼루키의 출현에 리그가 들썩거렸다.

그 이후 슬럼프에 빠지기도 듯했지만 신인으로서 서군 올스타 외야수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첫해부터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이병규는 1997시즌 전경기(126경기)에 출장해 타율 0.305(495타수 151안타), 7홈런, 69타점, 82득점, 23도루로 마감했다. 최다안타 3위, 도루 9위, 타율 12위. LG의 정규시즌 2위 도약에 큰 힘을 보탰다.

LG 이병규(오른쪽 9번)는 타격뿐만 아니라 '적토마'라는 별명답게 빠른 발로 그라운드를 휘저었다. 왼쪽은 쌍방울 2루수 최태원. ⓒ스포츠서울

포스트시즌을 앞둔 10월 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1997년 페넌트레이스 MVP와 신인왕 투표가 진행됐다.

MVP는 이승엽이 이변 없이 수상했다. 그해 KBO 역대 좌타자 최다홈런 신기록(32홈런)을 비롯해 타점(113개)과 최다안타(170개)까지 3관왕에 올랐기 때문이다.

신인왕 후보는 총 4명. 그중 이병규, 임선동, 중고신인 내야수 신국환까지 LG 선수만 무려 3명이 후보에 올라 집안싸움을 하게 됐다.

임선동은 그해 신인 중 최다승인 11승(7패)과 함께 평균자책점 3.52의 성적을 거뒀다.

신국환은 충암고 시절 심재학과 동기로 팀 우승을 이끈 뒤 원광대를 나와 1995년 2차 1라운드에 지명된 내야수였다. 입단 3년째인 1997년 혜성처럼 등장해 주전 2루수로 자리잡았다. 시즌 120경기에 출장해 타율 0.281(405타수 114안타), 8홈런, 58타점을 올리는 깜짝 활약을 펼쳤다.

여기서 이병규는 총 유효투표 75표 중 52표(득표율 69.3%)를 획득해 신인왕에 올랐다.

이날 자리를 함께했던 임선동과 신국환이 이병규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축하했다.

LG는 MBC 청룡 시절을 포함해 5번째 신인왕을 배출하면서 ‘신인왕의 산실’로 불렸다. 이병규는 구단 역사에서 외야수로는 최초로 신인왕을 수상하는 이정표를 세웠다.

LG 이병규는 1999년 '호타준족'의 상징인 '30-30 클럽'에 가입한다. 서울팀 선수로는 최초의 주인공이 됐다. ⓒOSEN

◆‘야생마’ 뒤에 온 ‘적토마’…LG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발돋움

LG는 1993년에 입단한 투수 ‘야생마’에 이어 1997년 신인 외야수 ‘적토마’를 영입하면서 투타에 걸쳐 축이 되는 두 마리의 말을 획득했다.

이병규는 치고 싶은 욕망이 강한 ‘배드 볼 히터’였다. 스트라이크존 근처에만 공이 오면 공격적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적토마’라는 별명처럼 거침없는 주력을 자랑했다. 공·수·주에 걸쳐 모자람이 없었다.

이런 호타준족의 재능으로 1999년에는 서울팀 선수로는 최초로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했고, 192안타로 1994년 해태 이종범(196안타)에 이어 KBO 역사상 두 번째로 190안타를 돌파하기도 했다.

수비를 할 때 타구 판단 능력이 뛰어났다. 마치 슈퍼에 라면사러 가듯 설렁설렁 뛰어가 공을 잡는다고 해서 ‘라뱅’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처음엔 부정적인 의미였지만 나중에는 팬들이 애칭처럼 부르며 사랑했다. 필요할 때 3점홈런을 잘 쳐 그 별명이 ‘라뱅스리런’으로 진화하기도 했다.

이병규는 수많은 기록들을 생산하면서 큰 족적을 남겼다. ⓒ스포츠서울

10연타석안타 신기록(2013년 7월3일 잠실 한화전∼7월10일 잠실 NC전), 최고령 사이클링히트(2013년 7월5일 목동 넥센전), 최고령 타격왕(2013년), 최소경기 2000안타(1653경기) 등 KBO의 갖가지 기록과 이정표를 세웠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년 동안 일본프로야구(NPB) 주니치 드래건스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병규는 자신의 야구인생을 뒤돌아 보면서 “행운이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서울 지역 동기들 중에 좋은 선수들이 많이 있었어요. 이경필, 전승남, 백재호 등등. 운 좋게 제가 가고 싶었던 LG에 1차지명을 받아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주전으로 뛰었고, 프로에서도 입단하자마자 주전으로 나갔어요. 정말 저에겐 행운이었죠.”

이병규는 2017년을 끝으로 은퇴를 하면서 김용수에 이어 구단 역대 두 번째(야수로는 최초) 영구결번(9번)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위에 언급한 이병규의 굵직한 발자국에 대해서는 추후 엘팬알백을 통해 사안별로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엘팬알백] ㊾편에서 계속

이병규는 2022년 KBO 40주년 레전드 40인에 선정됐다. 1997년은 '적토마'의 전설이 시작된 해였다. ⓒ스포츠서울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