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선풍기가 고마워서

이재국·방송작가 2024. 9. 10.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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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지난주에 탔던 택시 기사님께서 “올해가 내 인생 70년 중에 가장 더웠던 해인 거 같아요”라고 하실 정도였으니 올해가 덥긴 더웠던 모양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에어컨 바람을 많이 쐬면 컨디션이 안 좋아지는 편이라 가급적 선풍기로 버티는 편이다. 그런데 며칠 전 방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선풍기를 보다가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어릴 때 안방에서 엄마 앞에 삼 형제가 쪼르르 누워 잠을 잤다. 선풍기 제일 앞에는 더운 걸 잘 못 참는 작은형이 잤고, 가운데는 큰형이 잤고, 나랑 엄마는 선풍기에서 제일 먼 곳에서 잤다. 선풍기 바람이 내 앞까지 오면 시원한 느낌은 하나도 없고 그냥 미지근한 느낌밖에 없었는데 내 뒤에 계시던 엄마한테는 미지근하기는커녕 더운 바람이 갔을 것 같다. 너무 후텁지근해서 내가 잠을 뒤척이는 날이면 엄마는 부채질로 살랑살랑 나를 다시 재워주셨다. 선풍기 바람마저도 우리 삼 형제에게 다 몰아주시고 당신은 부채질로 더운 여름을 견디셨던 엄마.

지금은 에어컨 성능이 좋아져서 제습도 되고 공기를 순환시켜 구석구석 시원하게 해주지만 그래도 에어컨 바람을 오래 쐬면 머리가 아프고 냉방병으로 고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선풍기는 늘 그 자리에서 고개를 좌우로 일정하게 돌리며 선선한 바람을 보내주니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30대에는 에어컨이 최고인 것 같고 선풍기는 왠지 촌스러워 보였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너무 센 바람으로 영리하게 온도만 낮춰주는 에어컨보다 그냥 묵묵하게 같은 양의 바람을 보내주는 선풍기가 부담이 없고 더 좋다.

지금은 선풍기가 더 좋은데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부채가 좋아지고 부채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오면 또 문득 엄마 생각에 잠기는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올지 안 올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일단, 선풍기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토록 무더웠던 올여름도 이제 막바지에 와 있고 며칠 후면 선풍기와 작별해야 할 것 같다. 올여름 고마웠다는 의미로 깨끗하게 잘 닦아서 보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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