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 팬들은 지금도 〈더 선〉을 보지 않는다

앤드루 드바인은 스물두 살이었고, 우체국에서 일을 하면서 회계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낚시와 야외 활동을 좋아했다. 여자친구도 있었다. 가족들은 그가 당연히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갖길 원했을 것이라고 했다. 드바인은 늘 아이들을 잘 돌봤다. 휠체어에 묶인 몸이 되어서도 아이들과 잘 지냈다. 무엇보다도 축구를 좋아했다. 리버풀 팀의 열렬한 팬이었다.
사건은 1989년 4월15일에 일어났다. 잉글랜드 셰필드 지역의 힐즈버러 스타디움에서 열린 축구협회(FA)컵 준결승에서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가 맞붙었다. 두 팀의 팬들이 섞여 말썽이 나지 않도록 입구가 분리되었는데, 2만5000명에 달하는 리버풀 팬들이 입장할 수 있는 입구는 한 군데뿐이었다. 경기 시작 시간이 임박했는데도 리버풀 쪽 입구에는 미처 입장하지 못한 팬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한 명씩 입장하는 회전 출입문들을 통해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경기 시작 시간을 늦춰야 한다는 현장 경찰의 제안은 무시되었다. 당시 경찰의 현장 책임자 데이비드 더큰필드 총경은 출구를 열기로 결정했다. 열린 출구를 통해서 수천 명의 팬들이 아무런 통제 없이 입석인 중앙관람석으로 몰려 들어갔다.
경기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경기장과 관람석을 분리시키는 철망 바로 앞의 압력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람들은 철망과 서로의 몸에 짓눌렸다. 상황을 알지 못한 팬들은 꾸역꾸역 중앙관람석으로 밀려 들어갔다. 담당 경관이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경기장으로 달려 나갔다. 경기가 중단된 것은 경기 시작 후 6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관객들은 철망의 틈새로 탈출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철망을 뜯기도 했다. 테라스에 있던 사람들은 아래층의 사람들을 끌어올렸다. 부상자들을 돌보고 자발적으로 심폐소생술(CPR)을 실시했다. 광고판을 떼어내어 들것을 만들기도 했다. 경기장의 경찰 및 관리요원들은 이 대참사에 압도되어 있었다. 현장에 도착한 구급차는 총 42대였지만 정해진 프로토콜이 작동하지 않았다. 구급차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대기할 뿐이었다.
그날 94명이 사망하고 766명이 부상을 입었다. 14세의 리 니콜은 병원으로 옮겨지고 사흘 뒤 사망했다. 사망자는 총 95명이 되었다. 사망자 중 38명이 20세 미만이었다. 96번째 사망자인 토니 블랜드는 스물두 살이 되는 1993년까지 식물인간 상태로 살았다. 블랜드의 가족은 생명 유지 장치를 떼어내기 위한 법정투쟁을 벌인 후에야 그를 보낼 수 있었다.
앤드루 드바인의 가족은 당일 저녁, 병원으로 서둘러 오지 않으면 살아 있는 그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심한 뇌손상을 입은 드바인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2019년 리버풀이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했을 때 팀은 무개차를 타고 도시를 순회하다가 그의 집 앞에 잠시 멈춰 그에게 우승컵을 보여주었다.
여론은 처음부터 힐즈버러 희생자들 및 리버풀 팬들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의 보도가 결정적이었다. 〈더 선〉은 ‘진실(Truth)’이라는 제목 아래, 이 사건이 술에 취한 리버풀 팬들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리버풀 팬들이 희생자들의 주머니를 털었고, 구조 활동을 하는 용감한 경찰들과 심지어 시신에게도 오줌을 누어댔으며, 성추행을 하고 인공호흡을 하려는 것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불법적 살해’라는 새로운 평결
사건 조사를 위해 1989년 테일러 판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테일러 위원회는 1990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참사의 주된 원인을 경찰의 상황 통제 실패라고 밝혔다. 중앙의 입석 관람석으로 통하는 터널을 막지 않은 채로 출구를 연 것이 매우 중대한 실수라는 결론이었다. 사고의 원인으로 애초 지목된 팬들의 행동은 부차적 요소일 뿐, 경찰이 현장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팬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버풀 팬들에 대한 비난은 가라앉지 않았다. 책임자 더큰필드 총경은 건강을 이유로 은퇴했다. 수많은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희생자의 가족과 생존자 그리고 리버풀 팬들은 ‘힐즈버러 가족 지지 모임(the Hillsborough Family Support Group)’을 중심으로 줄기차게 진실규명을 요구했다. 그 결과, 사건에 대하여 새로운 접근이 시작된 것은 20년 뒤인 2009년에 이르러서였다. 노동당 정부는 힐즈버러 독립 패널(Hillsborough Independent Panel)을 설립해 참사를 다시 조사하고 자료를 공개하기로 했다.
2012년 발표된 힐즈버러 독립 패널 보고서는 이 참사에 대하여 팬들의 책임은 없으며 사건의 주된 원인이 경찰의 통제 실패라고 재차 결론을 내렸다. 더구나 사망자 중 41명은 좀 더 적절한 응급조치가 있었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증인진술서 중 상당수가 경찰에 대한 부정적 언급을 없애기 위해 수정되었고, 경찰 및 해당 지역의 보수당 의원이 사실이 아닌 정보를 〈더 선〉을 포함한 언론에 흘렸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또한 사건의 원인을 술에 취한 팬들의 잘못된 행동 탓으로 돌리려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있었다고도 했다.
2014년, 애초의 사고사라는 결론을 뒤집고 드디어 희생자 96명이 ‘불법적으로 살해되었다(unlawfully killed)’는 새로운 평결이 내려졌다. ‘불법적 살해’ 평결은 법을 어긴 결과로 사망이 발생했는데 이를 정당화할 사유가 없는 경우 내려진다. 다시 말해, 참사는 단순 사고가 아니라 관할 경찰 및 구급대가 법을 어겼기 때문에 벌어졌다는 결론이다. 리버풀 팬들은 마침내 이 사건과 관련해 면책되었다. 다만 희생자들이 바라는 정의가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참사에 직접 기여했거나 잘못된 소문을 퍼뜨린 경찰 등 관련자 중 개인적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앤드루 드바인은 2021년 7월에 사망했다. 향년 55세였다. 강한 압박을 받아 폐가 으스러지고 그로 인해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발생한 치명적인 뇌손상이 아니었다면 때 이른 죽음 역시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죽음 역시 불법적 살해라는 평결이 내려졌다. 힐즈버러 참사로 인한 97번째 죽음이다. 리버풀 팀은 경기 시작 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힐즈버러 참사 이후 영국 축구장들의 안전기준은 매우 달라졌다. 경기장과 관중석 사이 철조망은 제거되고 입석은 사라져 전부 좌석제로 바뀌었다. 경기장뿐 아니라 군중이 모이는 곳에서는 경찰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인원수 및 흐름을 통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리버풀 팬들은 그때 이후로 아직도 〈더 선〉을 보이콧한다.
런던·김세정 (변호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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