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세계의 런웨이가 되다, 글로벌 럭셔리 하우스들이 서울을 선택하는 이유
파리, 밀라노, 뉴욕, 런던. 오랫동안 세계 패션의 지형은 이 네 도시의 이름으로 설명되어 왔다. 아시아에서는 도쿄와 홍콩이 그 흐름을 이어받으며 럭셔리 하우스들의 주요 무대로 자리했다. 그러나 2020년대에 접어들며, 글로벌 패션의 시선은 새로운 도시를 향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세계적인 럭셔리 하우스들이 앞다투어 찾는 도시, 문화와 소비, 스타 파워와 창의적 에너지가 응축된 도시, 바로 서울이다.

2022년 이후 서울에서 펼쳐진 럭셔리 패션쇼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하나의 흐름이 보인다. 이화여대 ECC 지하 공간에서 디올의 런웨이가 펼쳐졌고(2022), 루이 비통이 잠수교를 런웨이로 삼았으며(2023), 구찌는 600년 역사의 경복궁 근정전 앞에 섰다(2023). 그리고 2026년 봄, 샤넬이 아직 개관도 하지 않은 퐁피두센터 한화의 첫 번째 글로벌 문화 이벤트로 폭죽을 터뜨렸다. 불과 4년 사이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다. 그리고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이 거대한 패션쇼들이 단순한 마케팅 행사의 나열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각 하우스가 서울의 어떤 장소를 선택했는지, 그 장소에서 어떤 이야기를 꺼냈는지를 읽으면, 글로벌 패션계가 서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2026 샤넬 공방 컬렉션, 퐁피두센터 한화의 첫 빛이 되다
2026년 5월 26일, 여의도 63빌딩 별관, 파리 퐁피두센터의 첫 번째 해외 거점인 퐁피두센터 한화의 공식 개관은 6월 4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샤넬이 먼저 이 공간에 들어섰다. 아직 일반 관객을 맞이하지 않은 미술관의 첫 번째 문화적 이벤트를 샤넬이 만들기로 한 것이다.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의 첫 샤넬 공방 컬렉션(Métiers d’Art)은 지난해 뉴욕의 보워리 지하철역에서 초연되었다. 서울은 그 컬렉션의 두 번째 무대이며 아시아에서의 첫 쇼였다. 쇼에 앞서 샤넬은 짧은 영상 하나를 공개했다. 샤넬 앰배서더이자 모델인 바비타 만다바와 모델 신현지가 퐁피두센터 한화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었다. 영상은 의도적으로 지난해 12월 뉴욕 첫 공개 당시의 오프닝 장면을 소환했다. 뉴욕 쇼에서 바비타 만다바가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던 것처럼, 서울의 영상도 그녀가 새로운 도시의 새로운 공간 안으로 들어서는 장면으로 열렸다. 컬렉션의 스토리텔링은 두 도시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이야기로, 대서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넘어 서울을 데스티네이션으로 삼았다.

마티유 블라지의 첫 공방 컬렉션은 다채로운 개성의 인물들이 도시 속에서 스치고 교차하는 풍경에서 출발했다. 샤넬과 오랜 인연을 이어온 영화에 대한 레퍼런스가 런웨이 곳곳에 스며들었고, 슈퍼히로인을 연상시키는 실루엣들이 그 안에서 자신만의 궤도를 그렸다. 대담한 애니멀 프린트, 컬러풀한 볼륨감, 그리고 그것과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정교한 액세서리들. 아이코닉한 샤넬 수트는 새로운 각도로 재해석되었고, 하우스의 시그니처인 투톤 슈즈와 진주, 까멜리아 모티프도 각자의 방식으로 되살아났다.
뉴욕과 서울의 쇼를 모두 감상한 틸다 스윈튼은 “뉴욕의 드라마 없이 옷들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고 말했다. 틸다 스윈튼 외에 프런트 로에는 샤넬 앰배서더 지드래곤, 제니, 김고은, 고윤정, 박서준이 자리했다. 윤여정과 이병헌이 나란히 앉았고, 원빈, 이정재, 장윤주, 아이린, 김다미, 전여빈, 지창욱, 이수혁, 구교환, 김민하, 홍경, 카즈하, 코르티스의 건호와 마틴, 원희, 김나영이 그 공간을 채웠다. 서울이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는 캐스팅이었다. 이 빅 네임들이 글로벌 셀럽으로서 같은 공간에 모여 앉은 풍경이 하나의 메인 패션신이 되는 도시가 지금의 서울이다.

쇼가 끝난 뒤 애프터파티는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로 이어졌다. 제니가 특별 공연을 펼쳤고, 페기 구의 디제잉이 파티 열기를 클라이맥스로 끌어올렸다. 2026 샤넬 공방 컬렉션은 서울에서 5월 27일 먼저 선보인 후 6월 4일 전 세계 부티크에 공개된다. 서울이 세계보다 먼저 이 컬렉션을 입었다는 의미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뮤지엄과 럭셔리 패션, K컬처가 함께 한 이 머메드 이벤트는 전세계 패션 문화 이슈로 퍼져 나갔다. 리노베이션에 들어간 퐁피두 센터가 최초의 해외 거점을 서울로 선택한 것, 그리고 그 첫번째 이벤트를 샤넬이 장식하고자 했던 것으로, 서울이 글로벌 패션과 문화 지형에서 지닌 영향력과 위치가 증명되는 기념비적 순간이었다.
2023 루이 비통 프리 폴 컬렉션, 잠수교를 런웨이로 빛내다
루이 비통이 한국에서의 패션쇼 장소로 잠수교를 선택했다는 소식은 세계적인 이슈였다. 1979년 준공된 한강의 잠수교는 장마철이면 수면 아래로 잠겨버리는, 말 그대로 ‘잠기는 다리’다. 그러나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시선은 달랐다. “비가 올 때면 모습을 감췄다가 다시금 나타나는 잠수교는 서울 시민들에게 기념비 같은 공간이다. 놀라운 토목공학의 위업이며,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장소다”라고 말했다. 루이 비통이 브랜드의 기본 철학으로 삼아온 ‘여행의 예술(Art of Travel)’과 정확히 겹치는 장소였다.

쇼는 철저히 서울의 것이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가락으로 시작해 산울림, 펄 시스터즈, 한대수의 음악이 흘렀다.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이 크리에이티브 어드바이저로 참여했다. 오프닝은 배우 겸 모델 정호연이 열었다. 서울 곳곳에 설치된 LED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된 이 쇼는, 한강이라는 공간이 가진 서울적 감각을 전 세계에 동시에 전송했다. 루이 비통 역사상 최초의 프리폴(Pre-Fall) 쇼였고, 한국 첫 패션쇼였으며, 잠수교 역사의 새로운 챕터가 열린 순간이었다.
2024 구찌 크루즈 컬렉션, 경복궁 근정전을 걷다
루이 비통의 잠수교 쇼로부터 불과 2주 후, 구찌가 경복궁 근정전에서 ’2024 크루즈 컬렉션’을 공개했다. 아시아 최초의 구찌 크루즈 패션쇼였다. 구찌는 늘 그 도시의 문화유산을 쇼의 무대로 삼아왔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카스텔 델 몬테, 그리고 그 계보 위에 경복궁이 놓였다. 1395년 조선 왕조가 세운 제일의 법궁, 그 중심인 근정전 앞에서 런웨이가 펼쳐지는 광경은 또하나의 역사적 장면이었다.

구찌는 장소만 빌린 것이 아니라, 컬렉션 곳곳에 한국 문화에 대한 진지한 오마주를 새겼다. 도포를 연상시키는 긴 기장의 봄버 재킷, 한복 치마의 볼륨에서 영감 받은 스커트, 저고리 매듭을 재해석한 리본 디테일, 색동저고리의 색 배열을 펼쳤다. 이정재, 신민아, 아이유, 등 뿐 아니라 다코타 존슨, 엘리자베스 올슨이 경복궁의 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구찌는 이후 3년간 경복궁 보존 관리를 후원하겠다고 밝혔다.
2022 디올 가울 여성 컬렉션, 이화여대를 선택하다
디올은 서울 이화여대 ECC에서 ’2022 가을 여성 컬렉션' 쇼를 개최했다. 패션쇼로서는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궁궐도, 미술관도, 호텔 볼룸도 아닌 대학 캠퍼스, 그것도 여성 전문 대학의 지하 캠퍼스 공간이었다. 디올은 쇼만 진행하지 않았다. 디올 회장 피에트로 베카리와 이화여대 총장이 공식 파트너십 협약을 체결했다. 여성 리더십 육성 프로그램 ‘Women@Dior’를 함께 운영하고, 패션 전공 학생들이 실제 쇼의 드레서로 참여하는 기회를 열었다. 당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피날레 무대에서 이화여대 ‘과잠’을 입고 등장한 장면은 이 쇼가 의미 깊은 파트너십임을 알리는 퍼포먼스였다. 패션과 여성 교육, 글로벌 하우스와 로컬 아카데미의 특별한 협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의 디올 패션쇼는 2007년 서울 올림픽공원 행사 이후 15년 만의 귀환이었다. 디올은 그 귀환을 화려한 장소 보다는 의미 있는 관계로 채웠다.

네 개의 쇼를 나란히 놓고 보면 공통점이 있다. 각 하우스는 서울의 가장 ‘서울다운’ 장소, 곧 가장 화려한 곳이 아니라, 가장 의미 있는 곳을 선택했다. 잠수교는 강남과 강북을 잇는 시민의 다리이고, 경복궁은 600년 왕조의 법궁이며, 이화여대는 한국 여성 교육의 역사이고, 퐁피두센터 한화는 한불 문화의 미래다. 서울이 새로운 세계 경제 중심 일뿐 아니라 문화적 맥락을 가진 도시라는 사실을 각각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하나는 각 쇼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디올은 이화여대와 파트너십을 맺었고, 구찌는 경복궁 보존을 약속했다. 루이 비통은 서울시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한강 보전 활동에 참여했다. 이 하우스들은 마케팅을 위해 K 컬처의 진원지인 서울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동시에 서울과 관계를 맺으러 왔다. 세계 패션의 런웨이가 된 서울에서 펼쳐질 새로운 역사의 챕터는 이제 첫 장을 넘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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