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밥으로 표현된 절제와 핵심의 미감, 류이섭 작가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톱밥이라는 소재를 통해 ‘자연의 근원(根源; 사물의 본바탕)’을 탐구하는 류이섭 작가는 버려진 것들의 재발견을 통해 ‘절제와 핵심의 미감’을 연금술사처럼 표현한다. 바탕을 마련하기 위한 긴 호흡, 명작의 조건을 자연과 가까운 단순함에서 찾기 위한 노력, 작가에게 톱밥은 ‘자연을 향한 각성’이다. 작가는 2013년 우손갤러리 개인전을 위해 대구를 찾은 쿠넬리스(Jannis Kounellis, 1936-2017)를 만난 이후, 작품을 대하는 예술가의 창작정신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액자에 갇힌 그림에서 탈출한 아르테포베라(Arte Povera)의 개념과 같이, 틀에 갇힌 창작을 벗어던진 본질 세계로의 질문과 만난 것이다. ‘물감-미디엄’ 등과 함께 섞고 이겨서 올려진 캔버스 위에서 톱밥은 또 다른 유기체가 되어 우리 앞에 자리한다. 고도로 집중한 작가의 신체 행위를 통해 흔적과 마띠에르, 자연의 변화 자체를 온전히 품은 다양한 레이어의 색채미감을 새로운 감각의 회화로 창출하는 것이다.

류이섭 작가가 적지 않은 나이까지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바탕이 마련된 이후에야 작품세계를 완성하겠다.”는 예민하고 완벽한 성품 때문이다. 이러한 작가의 성정은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유교미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논어(論語)·팔일(八佾)』 편에 나오는 회사후소란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의 뒤에 행한다.”는 뜻으로, 내면의 덕성과 깨달음을 얻은 연후에야 비로소 형식으로서의 본질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국-프랑스-이탈리아 등지에서 만난 선배 작가들과의 긴 교류를 통해 ‘자신의 호흡’을 발견한 작가의 오늘이 ‘회사후소’와 매칭되는 부분이다. 2000년도부터 10년간 프랑스 파리에서 작업한 류이섭에게 이배 작가와의 만남은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진정성 있는 작업태도를, 독일 쾰른에서의 남춘모 작가와의 만남은 ‘지금의 청도 대산학교 작업실’에서의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톱밥의 가치에서 찾은 ‘본질’, 문질빈빈(文質彬彬)

작가에게 자연은 회화 세계의 시작과 끝을 의미한다. 이는 『논어·옹야(雍也)』편의 "문질빈빈 연후군자(然後君子)”로 연결되는데, 문(文=형식)과 질(質=내용)이 서로 잘 어우러져야 비로소 ‘군자의 경지=최상의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바탕=톱밥의 깨달음’을 발견하기 위해 20여 년의 시간을 고민하고, 바탕이 마련된 연후에 ‘색(色)과 형(形)의 확장’을 시작했다. 내용과 형식의 균형에 대해 작가는 “이론을 갖다 데는 그림이 아니라 쉽게 내가 담기는 그림, 그냥 봤을 때 자연처럼 단순함이 묻어나는 그림이 보는 이들에게 진정성 있는 긍정의 에너지를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오래된 폐교 안에 자리한 작업공간은 문명화된 것을 차단한 ‘내적 수행처’이자 자연과 인간을 일체 시키는 최적화된 곳이다. 작가는 파리 시절 흡수성 좋은 한지(혹은 종이)의 물성에서 작업의 본질을 깨닫고, 현대사회가 추구해온 욕망과 무게감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감성에 충실한 작업재료를 찾기 시작했다. 자연에서 추출한 ‘톱밥’이라는 재료 역시 작품을 위해 의도한 재료라기보다, 현대산업사회가 남겨놓은 최소단위의 재료를 ‘재발견-재탄생(Rebirth)’시킨 것이다. 작가는 의도성 짙은 예술보다 산업사회의 부산물을 ‘무제(Untitled)’라는 이름의 ‘가치 추상(Value Abstraction)’으로 옮겨낸다. 회화와 결별한 ‘아르테포베라’의 정신을 진일보시켜, ‘반미학의 자연화(Naturalization through Reflection on Civilization)’ 혹은 ‘버려진 재료의 부활(Rebirth of Discarded Materials)’을 통해 현대사회가 앓고 있는 ‘예술노동의 가치회복’에 주목한 것이다.

류이섭은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 세계를 본질에 가깝게 정화(淨化)시킨다. 예술의 상업화와 물신성(物神性)에 대한 반성은 자연과 가까운 재료와 환경을 통해 “삶은 매 순간 유일하고, 따라서 모든 순간이 특별하다.”는 깨달음에 이르도록 만든다. 작가는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기보다 예술창작이라는 무대 위에 관람객의 감성이 최대한 녹아들기를 원한다. 작품 제목 대부분이 ‘무제(Untitled)’인 점은 바로 아르테포베라가 추구해온 진정성의 가치를 “21세기 한국작가의 본질 속에서 되살려내겠다”는 류이섭의 의지와도 상통한다. 작가는 자연의 본질과 가까운 작업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놓지 말아야 할 인간의 본질을 발견한다. 절망과 고통의 다중 변주 속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긍정하는 자아와 만나게 된 것이다.

자연과 사람 사이의 에너지, ‘균형 추상’

류이섭의 최근작들은 2017~2018년 당시 시작한 톱밥 작업으로부터 발전한 것이다.종이작업의 한계들은 제재소(製材所)에 우연히 본 톱밥의 재해석을 통해 해소되었고, 새로운 미감의 바탕이 되었다. 톱밥의 불순물을 걸러낸 후 미디엄을 섞어 ‘종이죽’과 유사한 상태로 만들어 개념적으로 본질에 가까운 ‘류이섭 만의 작업’으로 연결한 것이다. 다양한 색과 연결한 ‘톱밥-죽’의 원형이 ‘손의 제스츄어, 이른바 행위성(액션)’과 만나 ‘자연 추상’으로 기록하는 것이 작업의 핵심이다. 

작품의 시그니쳐는 톱밥작업을 시작할 당시 ‘송화가루가 날리던 봄의 기억’을 살린 노란 작업들이다. 작가는 송화가루가 생명의 씨앗이자 자연의 시작과도 연결된다고 말한다. 작가에게 색의 확장은 변화무쌍한 자연의 순환을 의미한다. 작가는 수행하듯 탱탱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투명성과 발색을 적절히 충족시키는 서너 겹의 단계를 거쳐 ‘색과 톱밥의 균형’을 캔버스에 펼쳐낸다. 행위성이 가장 잘 드러난 ‘전면 컬러페인팅 시리즈(Full Color-Field Painting Series)’는 작가의 자유로운 감각이 무계획의 계획 속에 어우러진다면, ‘세로 형상 시리즈(Vertical Painting Series)’는 정신을 집중시킨 일정한 반복 속에서 어떠한 도구도 개입되지 않는 손끝의 에너지가 창출해낸 ‘감각적 부조 추상’라고 할 수 있다.

사군자(四君子)를 치듯이 자연을 자신만의 감성으로 형상화하는 작업들은 선비들이 난을 치듯이 집중하는 상태를 요한다. 사선구도와 물결작업의 경우에도 라인을 그어서 만든 자연이 아니라, 감성과 이성을 결합한 ‘제스츄어의 균형’을 이룬 작업들이다. 간격과 두께 등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사람의 손으로 하는 본질적 노동을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속에서 이루어낸 ‘균형 추상(Balanced Abstract Painting)’인 것이다. 작가는 “캔버스 틀을 벗어났을 때 톱밥과 행위성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입체-설치’ 부분까지 작품세계를 확장해 선보일 예정이다. 각성(Awakening)-정화(Purification)-발견(Discovery)을 통해 만들어진 작가의 길, 이제 좋은 바탕 위에 ‘류이섭 만의 개성화’를 빛낼 시간이 다가왔다.


Untitled

73X61cm_Mixed media on canvas_2023

Untitled

73X61cm_Mixed media on canvas_2023

Untitled

91X73cm_Mixed media on canvas_2023

Untitled

130X97cm_Mixed media on canvas_2023

전시전경


전시회명 : <Rebirth-회사후소(繪事後素)>
전시기간 : 2023.8.30 ~ 9.20
전시장소 : 맥인아트(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524 인터콘티넨탈서울코엑스 B2. C-29), 0507-1415-6532


류이섭 작가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2023년 맥인아트 ‘Rebirth-회사후소(繪事後素)
2022년 ‘from the nature’ 동원화랑 앞산점 대구
2020년 ‘자연으로부터’ 동원화랑 대구
2018년 ‘Yellow’ 동원화랑 대구
2016년 ‘감각에서 감성으로’ 봉산문화회관 대구

<단체전>
2022년 대구아트페어 동원화랑 EXCO
2022년 KIAFE 동원화랑 COXE
2021년 대구아트페어 동원화랑 대구
2021년 울산 현대 미술전 울산 문화예술회관
2021년 4인 4색전 환겔러리 대구
2021년 류이섭 장준석 2 인전 이상숙겔러리 대구
2020년 대구아트페어 동원화랑 EXCO
2020년 다비전 월갤러리 울산
2019년 대구아트페어 동원화랑 EXCO
2019년 사월애 동원화랑 대구
2018년 대구아트페어 동원화랑 EXCO
2016년 독불장군 (독일과 프랑스의 감성) 류이섭, 박경아 2인전
2016년 H겔러리 대구현대백화점
2009년 PARIS-L.A-N.Y (Korean cultural center L.A)
2009년 NOSTALGIA AT RIO RANCHO (Inn Rio Rancho & conference center California USA)
2007년 LES PASSAGERS N.Y (gallery HUTCHINS N.Y)
2007년 FRONTIERES (musee du Montparnasse PARIS)
2005년 SONAMOU PARIS-SEOUL(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
2004년 SONAMOU (Korean celtural center PARIS)

청년타임스 정수연 디렉터(syyw032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