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함락” 말이 나온 밤…흥국생명 조커 박민지, 이 한 경기로 판 뒤집었다

김천체육관은 이번 시즌 한국도로공사에 ‘요새’였다. 홈 13승 무패, 분위기까지 완벽했다. 그래서 0-2로 끌려가던 흥국생명이 3-2 역스윕을 완성했을 때, 단순한 이변으로 보기 어렵다. 이건 “드디어 한 번 터졌다”가 아니라, “터질 만한 균열이 쌓여 있었다”에 가깝다.

경기는 1~2세트만 보면 도로공사의 계획대로 흘렀다. 모마(레티치아 모마 바소코)와 타나차가 앞에서, 뒤에서 번갈아 몰아쳤고, 김천의 관중석은 늘 그랬듯 도로공사의 편이었다. 레베카 라셈(레베카)은 초반 범실과 타이밍 문제로 흔들렸고, 흥국생명은 사이드아웃이 버거워 보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홈 무패가 계속되겠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로공사는 1세트부터 추격을 허용하는 모양새가 반복됐다. 점수는 앞서가는데, 마무리가 매끈하지 않았다. 리드를 잡은 팀이 더 단단해야 하는 순간마다 네트터치, 공격 범실, 첫 볼 흔들림이 섞였다. 김종민 감독이 경기 후 “첫 볼이 다 튄다”고 말한 대목이 핵심이다. 배구는 화려한 한 방보다 ‘첫 터치’가 흔들리지 않을 때 가장 강해진다.

흥국생명의 전환점은 3세트 초반의 결단이었다. 요시하라 도모코 감독은 과감하게 판을 갈아엎었다. 박민지, 정윤주, 문지윤, 김연수 등 벤치 자원을 대거 투입해 리듬을 바꿨고, 그게 딱 맞아떨어졌다. 이 변화는 단순 교체가 아니라 “경기 템포를 다시 짜는 작업”이었다. 도로공사 공격이 힘으로 누르려 할 때, 흥국생명은 수비와 연결을 두껍게 만들어 버텼다.

특히 박민지가 ‘특급 조커’로 불린 이유는 점수만이 아니다. 흔들리던 팀의 중심을 잡아주는 선수는 기록지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리시브가 무너지기 직전 한 번 더 올려주고, 블로킹이 뜯기기 직전 한 박자 더 버텨준다. 0-2로 밀리던 팀이 “아직 할 만하다”는 표정을 되찾는 순간이 있었고, 그 표정의 한가운데 박민지가 있었다. 이런 선수는 플레이오프 같은 큰 경기에서 더 무섭다.

3세트는 사실상 ‘심리전’이었다. 도로공사가 계속 앞섰지만, 흥국생명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 20점 이후의 공은 늘 더 무거워진다. 그 무게를 버티는 쪽이 이기는 법인데, 그때 도로공사에서 나온 모마의 공격 범실은 단순한 1개의 실점이 아니었다. “불안이 점수로 변한 장면”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4세트가 더 결정적이었다. 도로공사는 모마가 3연속 득점으로 분위기를 다시 끌어오기도 했다. 그런데 흥국생명은 피치(아닐리스 피치)의 서브 득점과 연속 득점으로 순식간에 균형을 되찾았다. 레베카도 이때부터 ‘살아났다’. 초반에 안 맞던 미팅이 조금씩 정리되자, 레베카의 공격은 단단해졌고 도로공사 블로킹도 타이밍을 잃기 시작했다.

요시하라 감독이 경기 후 표정이 마냥 밝지 않았다는 말이 오히려 인상적이다. “좋지 않은 흐름이었다”는 자평은, 이 역스윕을 운으로 돌리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결과만 보고 웃는 감독이 아니라, 과정에서 ‘승률을 더 올릴 방법’을 찾는 사람이다. 실제로 흥국생명은 범실 관리에서 19-31로 크게 앞섰는데, 이런 숫자는 팀이 어떤 배구를 하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화끈하게 때리되, 안 되는 날은 더 안전한 길로 돌아간다. 우승권 팀들이 가진 현실적인 힘이다.

5세트는 한마디로 ‘기세’가 모든 걸 삼켰다. 피치와 레베카가 초반부터 3-0을 만들었고, 도로공사는 쫓아갈 발판을 만들지 못했다. 15-9는 점수만 보면 쉽게 끝난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앞선 두 세트 동안 쌓인 체력과 심리 소모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특히 역스윕을 당하는 팀은 “한 점만 더 내면 되는데”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몸이 굳는다.

도로공사 입장에선 ‘충격’이 맞다. 홈 무패가 끊겼고, 0-2에서 3-2로 뒤집힌 건 더 아프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이 패배는 예방 가능한 패배였다. 첫 터치와 범실, 그리고 리드 상황에서의 집중력 유지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모마가 32점을 올려도, 팀이 30개의 실책을 내면 결국 승부는 거기서 갈린다.

반대로 흥국생명은 이 한 경기로 선두권을 진짜 ‘혼전’으로 만들었다. 도로공사(승점 56), 현대건설(승점 53), 흥국생명(승점 53). 이제는 순위표가 아니라 ‘컨디션’과 ‘범실 관리’가 우승을 가른다. 그리고 오늘 경기만 보면, 흥국생명은 그 기준에서 가장 빠르게 문제를 고치고, 가장 과감하게 판을 바꿀 줄 아는 팀이었다.

김천 요새가 무너진 밤은 그래서 더 무섭다. 한 번 무너진 성벽은, 다음엔 더 쉽게 흔들릴 수 있다. 이제 도로공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우리가 실수했다”가 아니라, “왜 리드에서 더 불안해졌는지”를 정확히 뜯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흥국생명은 이 승리를 ‘기념’이 아니라 ‘예고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역스윕은 한 번이면 드라마지만, 두 번이면 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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