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만질 땐 느리게, 볼거리 즐길 땐 빠르게…전남 고흥 가볼까 [ESC]

박미향 기자 2024. 9. 2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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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의 요즘 어디 가전남 고흥
전남 고흥 ‘우도 레인보우교’를 일몰 때 걷고 있는 여행객. 우도 거주민을 위해 만든 다리지만, 알록달록한 무지개색 때문에 여행 명소가 되어 가고 있다. 박미향 기자

바다·산·섬 고루 갖춘 가을 여행지
이순신 장군 ‘절이도 해전 승전탑’
녹동항 드론쇼·거금생태숲 매력
편백치유숲·우주발사전망대 명소

화끈한 박치기로 국민을 울고 웃게 한 프로레슬러 김일(1929~2006)은 1960~70년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당시 야근이 일상이었던 가장도 김일 경기 날만은 일찍 귀가해 누런 봉투에 싼 통닭을 아이들과 뜯으며 응원했다. ‘박치기왕’은 오락거리가 딱히 없던 시절 재미를 선사하며 국민 영웅으로 등극했다. 그의 흔적이 이젠 거의 없지만, 전남 고흥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고흥군 거금도가 그의 고향이다. 지금 거금도엔 김일기념체육관과 조형물 등이 조성돼있다. 그는 고향에 묻혔다. 그런가 하면 녹동항 ‘녹동 바다정원’에선 매주 토요일 밤 9시 드론쇼가 펼쳐진다.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죄다 모여 먹물 같은 까만 하늘에서 펼쳐지는 신기술의 향연을 구경한다.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곳이 고흥이다.

녹동항 ‘녹동 바다정원’에서 펼쳐지는 드론쇼. 박미향 기자

여름을 보내고 가을맞이 여행지로 고흥을 골랐다. 바다와 산, 들이 함께 어우러져 ‘고르는 맛’이 있는데다가 최근 ‘진흙 속에 보석 같은 여행지’란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스시(ESC)가 2박3일 일정으로 여행 코스를 짜봤다.

잘 조성된 해안도로

고흥 ‘마리안느-마가렛 나눔 연수원’ 전망대에서 한눈에 보이는 소록대교와 다리 건너편에 있는 소록도. 박미향 기자

여행 첫날 이에스시 커플은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오전 9시30분 고흥행 버스에 올랐다. 하루 네 번(오전 8시, 9시30분, 오후 2시40분, 5시30분) 운행한다. 고속열차를 타고 순천에 내려 버스로 가는 방법도 있다. 오후 2시30분에 고흥에 도착한 커플은 렌터카로 거금도로 향했다. 고흥군 부속 섬인 거금도는 고흥반도 남쪽에 있는 녹동항에서 대교 2개(소록대교, 거금대교)를 지나면 ‘입성’할 수 있다.

2011년 개통한 거금대교는 관광 명소다. 국내 최초로 보행자 도로와 자동차 도로를 복층으로 구성한 길이 2028m의 다리다. 고흥군 거금도(금산면 대흥리)와 소록도(도양읍 소록리)를 잇는다. 커플은 소록대교로 진입하기 전 ‘마리안느-마가렛 나눔 연수원’를 먼저 찾았다. 20대에 소록도에 들어가 한센병 환자 치료에 평생을 바친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 마리안느(1962년부터 43년간)와 마가렛(1966년부터 39년간)을 기리는 이들이 만든 연수원이다. 1층에는 ‘마리안느와 마가렛 기념관’이 있다. 마음이 숙연해진다. 전망대에 오르면 소록도와 녹동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기념관’에는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기리는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박미향 기자
거금대교 휴게소에 있는 조형물 중 하나. 박미향 기자

커플이 다음으로 찾은 곳은 거금대교 휴게소다.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의 잊힌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1598년 절이도(거금도) 앞바다에서 긴박한 해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를 진두지휘한 이는 이순신 장군. 그는 왜선 50여척을 괴멸시키며 승전고를 울렸다. 하지만 일명 ‘절이도 해전’은 거의 알려진 게 없다. 이순신 장군인데도 말이다. 기록이 적어서였다. 휴게소엔 ‘절이도 해전 승전탑’이 있다. 거금대교 보행자 도로 여행은 휴게소에서 시작한다. 1층 다리에 들어서자 다리 가운데에 깊게 패인 커다란 연못이 보였다. 기함할 뻔했다. ‘트릭아트’(눈속임 예술)다. 착시효과로 여행자들에게 극적인 재미를 주는 장치다.

거금대교 1층 보행자 다리에 있는 ‘트릭아트’. 박미향 기자

휴게소에서 차로 5~6분 거리에 김일기념체육관이 있다. 늦은 오후, 체육관 마당엔 마지막 남은 기력을 토해 내려는 듯 여름 햇살이 따갑게 쏟아지고 있었다. 금색 김일 동상도 보였다. 코브라 트위스트, 박치기, 수도치기 등 4가지 레슬링 기술을 역동적으로 형상화한 동상이 김일 동상을 호위하고 있었다. 공사 중인 기념관을 지나 체육관에 들어서자 웅장한 김일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 고작 사진 한 장으로 그를 추억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체육관 1층에 있는 ‘유품 전시실’이 섭섭한 마음을 달래준다. 벽에는 그의 삶이 잘 정리된 도표가 걸려 있다. 어린 시절 나무기둥 등을 활용한 혹독한 훈련부터 세계 챔피언을 따며 화려했던 날과 말년 병마에 시달렸던 노년까지, 롤러코스터 같은 그의 시간들이 정리돼 있다.

거금도에 있는 ‘김일기념체육관’에는 4가지 레슬링 동작을 형상화한 동상과 고 김일 전 프로레슬러의 동상이 있다. 박미향 기자
거금도에 있는 ‘김일기념체육관’에는 4가지 레슬링 동작을 형상화한 동상과 고 김일 전 프로레슬러의 동상이 있다. 박미향 기자
‘김일기념체육관’ 1층에 있는 유품 전시실 벽에 걸린 김일 사진. 박미향 기자

거금도의 또 다른 매력엔 잘 조성된 해안도로가 있다. 도로를 달리면 창밖으로 출렁이는 파란 바다가 보인다. 곧 ‘소원동산’이라고 적인 돌비석과 정자를 만나게 된다. 바다 풍경도 일품이다. 대취도 등 여러 섬이 눈에 들어온다. 고흥은 고흥반도와 230개(유인 23개, 무인 207개) 섬으로 구성된 고장이다.

김일의 박치기를 형상화한 드론쇼. 박미향 기자
‘소원동산’ 정자. 박미향 기자

이날 마지막 여행지는 녹동항 바다정원. 밤 9시에 펼쳐지는 드론쇼는 거금도에서 다시 육지 고흥으로 나올 만큼 볼거리가 풍성했다. 쇼에 등장한 인물은 김일, 천경자 등 고흥을 빛낸 이들.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세계여행’ 등 쇼마다 내용이 다르다. 약 10분 정도 이어진 쇼는 오는 11월까지 한다. 입장료는 없다.

일몰 놓치면 ‘앙꼬 없는 단팥방’

해돌마루펜션 아래에 난 데크길 중간에 있는 바다 전망대. 박미향 기자
해돌마루펜션 아래에 난 데크길. 박미향 기자
해돌마루펜션에서는 바다를 보며 각종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 박미향 기자

두번째 날 오전 10시 걷기 채비를 하고 나섰다. 전날 잠자리로 고른 해돌마루펜션 야외 테라스 아래엔 나무 테크길이 나 있다. 넓적한 돌과 나무 사이를 비집고 난 데크길을 20분 걷자 청석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이름에는 이유가 있다. 금이 박힌 푸른빛 돌(청석)이 자주 발견돼서라고 한다. 마을 앞 도로를 건너면 최근 주목받고 있는 ‘거금생태숲’(면적 122헥타아르)에 닿는다. 이 숲은 후박나무, 이팝나무, 노각나무 등 11종이 자라는 난대림의 보고다. 생태숲 탐방로는 쉼터-계곡관찰로-구름다리-캐노피(덮개) 하이웨이-전망대-쉼터로 이어진다. 숲 초입에서 쉼터까지는 완만한 길이 이어지지만, 구름다리까지는 가파른 돌길과 흙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등장한다. 몸이 온 힘을 다해 몸 속 물기를 짜내려는 듯 땀이 쏟아진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쯤 구름다리가 나타난다. 구세주다. 다리에선 숲 사이로 바다가, 바닷물결 사이로는 섬이 보인다. ‘캐노피 하이웨이’를 섭렵하고 도착한 전망대에선 가파른 숲길을 오르며 다 비워낸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대략 1시간30분 걸리는 탐방은 ‘안 가본 이는 있어도 한번만 간 이는 없다’란 말이 실감 날 정도로 매력적이다.

가파른 ‘거금생태숲’ 일부 구간을 오르는 여행객. 박미향 기자
‘거금생태숲’ 구름다리를 지나는 여행객. 박미향 기자

다음 행선지는 연홍도. 섬 전체가 미술작품으로 가득해 ‘지붕 없는 미술관’ ‘사진 맛집’으로 불린다. 거금도 신양선착장에서 배로 5분 거리에 있다. 커플은 오후 12시30분에서 10여분 넘긴 시각에 도착했다. 배가 떠난 뒤였다. 입도하는 배는 하루 7번(오전 7시55분, 9시45분, 11시, 오후 12시30분, 2시30분, 4시, 5시30분 혹은 6시) 운행한다. 섬에서 나오는 배도 하루 7번(오전 8시, 9시50분, 11시5분, 오후 12시35분, 2시35분, 4시5분, 5시35분 혹은 6시5분)이다. 하지만 뜻밖에 연홍도 여행 실패가 전화위복이 됐다. 고흥 해수욕장 대부분은 소박하고 소담하다. 시끌벅적한 해변이 없다. 거금도에 있는 연소해수욕장도 마찬가지. 울창한 송림이 병풍처럼 싸고 있는 해변은 밀물 때와 썰물 때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이날 오후에 도착한 해변은 모래사장이 좁게 보일 정도로 밀물에 압도당해 있었다. 어라, 그 바닷물 위로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는 게 아닌가. 물을 땅처럼 딛고 서 있는 나무 세 그루, 물 속에 뿌리 내린 듯한 나무 세 그루. 목가적인 풍경을 담은 엽서가 눈앞에서 현실화된 듯했다. 검색으로도 정보를 찾기 힘든 소나무 세 그루다.

거금도 연소해수욕장에서 만난 바닷물 위로 서 있는 소나무 세 그루. 박미향 기자
거금도 연소해수욕장에서 만난 바닷물 위로 서 있는 소나무 세 그루. 박미향 기자

고흥반도 동쪽으로 가면 가을 단풍 산행하기 좋은 팔영산(608m)이 나타난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봉우리 8개 때문에 ‘팔영산’이라고 불린다. 은둔 고수처럼 전문 산악인들도 잘 몰랐던 팔영산은 2011년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도립공원에서 국립공원으로 승격했다. 팔영산 아래 있는 능가사는 417년 신라시대 때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644년 벽천대사가 다시 지었다. 이날 찾은 능가사는 새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팔영산이 품은 데가 능가사만은 아니다. ‘팔영산 편백치유의 숲’은 전국 최대 규모 편백나무 숲이 조성된 곳이다. 무려 면적이 416ha 규모다. 편백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영접하며 나무 데크에 ‘놀멍쉬멍’ 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의 한가로운 쉼과 함께하고 싶은 충동이 절로 인다.

‘팔영산 편백치유의 숲’에서 쉬고 있는 여행객. 박미향 기자
새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는 하고 있는 능가사. 여러 건물 중 한곳에 있는 카페에선 다양한 전통 차를 판다. 박미향 기자
‘고흥우주발사전망대’ 외관. 고흥에는 여러 지역에 다양한 ‘우주 여행 콘텐츠’가 있는데, ‘고흥우주발사전망대’는 그중 하나. 박미향 기자

하지만 고흥반도에서 일몰을 놓치면 앙꼬 없는 단팥빵을 먹는 것과 진배없다. 그렇다고 고흥의 ‘우주여행 콘텐츠’를 놓치기도 아쉬운 게 여행자의 마음이다. 팔영산에서 차로 20여분 가면 나타나는 ‘고흥우주발사전망대’를 먼저 골랐다. 나로우주센터에서 해상으로 17㎞ 직선거리다. 우주센터에서 로켓을 발사하면 그 광경을 볼 수 있다. 360도 도는 7층 카페가 인기다.

‘신상 사진 맛집’ 우도 레인보우교

고흥 일몰 명소는 ‘중산일몰전망대’다. 해지기 직전 도착한 커플은 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두꺼운 구름 아래로 툭 떨어지는 해를 만났다. 급하게 차를 몰아 5~7분 거리에 있는 ‘우도 레인보우교’로도 향했다. 지난 7월 완공한 이 다리는 길이가 1.32㎞로 국내에서 가장 긴 연륙 인도교다. 난간과 바닥이 무지개색으로 칠해져 있어 시각적으로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루 두 번 바닷물이 빠져서 생기는 길을 이용하는 우도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었다. ‘필요’ 때문에 만든 구조물이지만, 지역민들조차 높은 점수를 줄 정도로 근사하다. ‘신상 사진 맛집’으로 뜨고도 남을 풍경이다. 떠날 시각을 알려주는 자명종 시계처럼 다리에 형광등이 켜졌다. 한반도 가장 아래에서 맞는 일몰은 스산한 삶을 반추하게 한다. 동시에 용기도 선물한다. 자연은 그런 것인가 보다.

전남 고흥 ‘우도 레인보우교’의 낮 풍경. 우도 거주민을 위해 만든 다리지만, 알록달록한 무지개색 때문에 여행 명소가 되어 가고 있다. 박미향 기자
‘중산일몰전망대’의 목가적인 풍경. 박미향 기자

이에스시 커플은 마지막 날, 오후 3시10분 서울행 버스표를 샀다. 숨 가쁘게 한 고흥 여행이었다. 오전 시간을 차분하게 화룡점정 찍을 만한 여행지를 찾았다. 터미널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흥분청문화박물관이 제격이다. 박물관에는 시대별 도자기와 고흥 가마터에 대한 소상한 역사가 정리돼 있다. 여행 시간은 여행자에 따라, 여행지에 따라, 느리게도 빠르게도 흐른다. 고흥 2박3일은 마음을 매만지게 하는 데선 느리게, 생경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데선 빠르게 흘렀다.

고흥/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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