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의 베트남 총살 책임 인정…또 다른 응우옌티탄들은?

구둘래 기자 2023. 2. 7.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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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청와대에 진상규명 청원서 낸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의 사연 다시 보니
2018년 4월22일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에서 퐁니·퐁넛학살 피해자 응우옌티안(앞줄 왼쪽)과 하미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앞줄 오른쪽)이 원고로 참석하고 있다. 박종식 한겨레 기자 anaki@hani.co.kr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국가배상 소송 1심에서 승소했다. 1968년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안구 퐁니마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대해 ‘가해자 한국’이 처음으로 피해 베트남인에게 법적 책임을 져야한다는 판단이 나온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2023년 2월 7일 베트남인 응우옌티탄(63)이 한국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하며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에게 3000만100원과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했다. 재판부는 “대한민국 해병 제2여단 제1중대(청룡부대) 소속 군인들이 1호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원고 가족들에게 총격을 가한 사실, 원고의 모친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 곳으로 강제로 모이게 한 다음 총으로 사살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한겨레21>은 이같은 사실을 2019년 3월29일 제1256호 ‘한국군은 사탕을 나눠주며 주민을 모았다’ 기사를 통해 전한 바 있다. 당시 청룡부대는 남베트남인민해방전선 인민해방군(베트콩) 수색을 쉽게 하기 위한 ‘주민 소개’ 작전을 명목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17개 마을의 희생자 유가족과 피해자 103명은 2019년에서야 청와대에 청원서를 제출하며 진상규명과 공식사과를 요구한 바 있다. 이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청원서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전한 기사를 다시 소개한다.

밤이면 마을에 비명이 들렸습니다

꽝남성 주이쑤옌현 주이하이사 떠이선떠이 마을(뇨 할아버지 방공호 학살)
응우옌떤꾸이(Nguyễn Tân Quý)
2017년 12월28일 꾸이가 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사당에 향을 바친 뒤 마을 조상들을 기리는 낮은 제단 앞에서 향을 들어 절을 올리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생년: 1942년(주민등록 기준), 실제 태어난 해는 1940년

피해 날짜: 1969년 11월12일(양력)

피해 내용: 아침 6시께 가족과 밥을 먹는데 포격 소리가 들렸습니다. 유격대원이던 저와 마을 청년들은 한국군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쳤습니다. 마을에 남은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뇨 할아버지네 집 방공호로 몸을 숨겼습니다. 이내 한국군이 마을로 들이닥쳤습니다. 한국군은 방공호에 있던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 방공호 옆 대나무숲에 모았습니다.

한국군은 주민들에게 “VC(베트콩)냐”고 물은 뒤 총을 마구 쐈습니다. 총탄에 맞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한국군은 방공호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한국군이 떠난 뒤 저와 청년들은 오후 5시께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주검들 사이에서 가족을 찾아헤맸습니다. 이날 어머니 레티락(당시 62살), 아내 응오티쿠에(23살), 두 딸인 응우옌티후에(5살)와 응우옌티베(1살), 아들 응우옌떤상(3살)이 죽었습니다. 제 나이 24살 때입니다.

저는 한국군이 언제 다시 마을로 들이닥칠지 몰라 서둘러 가족의 주검을 묻고 마을을 떠나야 했습니다. 주변에서 주운 낙하산이나 우비 조각 등으로 주검들을 말아 땅에 급하게 묻었습니다. 훗날 묫자리를 다시 찾기 위해 돌덩어리 5개를 올려놓고 마을을 떠났습니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다행히 돌덩어리들이 그대로 있어 가족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밤이면 마을에서는 누군가의 울음소리, 비명이 들렸습니다. 더는 마을에서 지낼 수 없어 다른 마을로 옮겼습니다. 이웃 사람들도 마을에서 살 수 없어 한 집씩 떠나다가 지금은 마을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한국에 바라는 것: 더 늦기 전에 한국 정부가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고 사과하기 바랍니다.

한국군은 사탕을 나눠주며 주민을 모았다

꽝응아이성 빈선현 빈호아사 꺼우 마을(빈호아 학살)
후인타인꽝 (Huỳnh Thanh Quang)

생년월일: 1959년 3월3일

피해 날짜: 1966년 10월25일(양력 1966년 12월6일)

피해 내용: 한국군에게 죽임당한 내 가족입니다. 할머니 도티꽝(당시 60살), 어머니 응우옌티니엠(28살), 두 여동생 후인티렘(5살), 후인티루옥(3살) 그리고 조카 두 명, 첫째 숙모 부이티응아이, 둘째 숙모 부이티찌, 넷째 숙모 부이티중, 세 명의 사촌 후인동, 후인응아, 후인허우, 그리고 이름이 같은 두 명의 친척 누나 후인티트엉, 후인티트엉.

학살 1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터라 우리 가족은 따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7살이던 나는 마을 인근 전략촌에서 외할아버지와 살았고, 우리 마을에는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마을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학살 현장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가족이 살해당한 사실을 외할아버지와 이웃들에게 전해 들었는데, 한국군이 사탕 같은 것을 나눠주며 주민들을 모았다고 했습니다. 학살 직후에도 위험해서 마을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사건 현장에서 살아남은 큰아버지가 우리 가족의 주검들을 수습해주었고, 나중에야 나는 가매장된 허름한 가족 무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군은 빈호아 마을에 있던 내 가족의 집과 재산도 모두 불태웠습니다. 학살 사건으로 전쟁고아가 된 나는 외할아버지, 이모와 함께 빈호아사에서 10㎞ 정도 떨어진 빈터이사에서 살았습니다. 간신히 글을 깨우칠 무렵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도 그만둬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를 찾으며 떼쓰고 울다가 외할아버지에게 혼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에 바라는 것: 세월이 흘러 과거 일이 돼버렸지만 나와 같은 유가족, 피해자들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과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한국 사람들이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고 베트남 피해자들의 상처가 아물도록 노력해주길 바랍니다.

둥! 둥! 둥! 죽어가던 아버지가 울리던 북소리

꽝남성 주이쑤옌현 주이하이사 투언찌 마을(당소 가족 학살)
당민코아(Đặng Minh Khoa)
2017년 12월30일 베트남 다낭에서 한겨레21 취재진과 인터뷰중인 당민코아. 김진수 선임기자

생년:1950년

피해 날짜:1969년 2월16일(양력)

피해 내용: ‘둥! 둥! 둥!’ 집 밖에서 북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설 명절을 하루 앞둔 그날, 아버지 당소(당시 59살)는 집 앞 사당에서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난데없이 한국군이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한국군은 거세게 항의하던 아버지에게 총을 겨누더니 이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아버지는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북을 울렸던 겁니다.

총소리에 놀란 가족이 집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문 앞에 버티고 있던 한국군은 가족 9명을 모두 죽이고 사당에 불을 질렀습니다. 학살 현장에 있던 누나 당티후인(당시 26살)은 혼란을 틈타 도망쳐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날 아버지, 어머니 응우옌티템(57살), 형 당마이(34살), 여동생 당티미흐엉(16살), 두 명의 형수 럼티응(32살)과 호티뜨우(30살), 조카 당티미옌(4살), 두 형수의 배 속에 있던 조카까지 한국군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국군은 주검들을 몰래 파묻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유일한 생존자인 누나 당티후인에게 전해 들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19살이었습니다. 사이공(호찌민)에서 유학 중이던 나는 전쟁 통에 설날인데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누나에게 비보를 듣고 곧장 고향인 주이하이사로 달려왔습니다. 차마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집 주변을 헤매다 남베트남 경찰에 붙잡혔고 ‘학생운동’을 이유로 호이안에서 8개월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출옥 후 사이공으로 돌아갔고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바라는 것: 그동안 가족을 학살한 한국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습니다. 한국으로부터 물질적, 경제적 도움은 받을 필요도 없고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한국 정부가 한국군이 저지른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공식 사과할 것을 요구합니다.

비에 섞인 핏물이 발목까지 차오르고

꽝남성 탕빈현 빈즈엉사 1촌 짱쩜 마을(짱쩜 학살)
레탄응이(Lê Thanh Nghị)
베트남 꽝남성 탕빈현 빈즈엉사 집 거실에 앉아 있는 ‘1968 꽝남대학살’ 유가족 레탄응이. 2018년 1월 1일 <한겨레21> 취재진과 만남. 김진수 선임기자

생년: 1949년

피해 날짜: 1969년 11월12일(양력)

피해 내용: 전날 밤부터 포격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국군이 베트콩(VC) 대대를 겨냥해 쏜 포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포격 소리가 그쳤습니다. 곧이어 한국군이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한국군은 주민 74명을 벌판으로 끌고 가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유격대장이던 나는 한국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학살 현장에서 500여m 떨어진 거리에서 참극 현장을 지켜봤습니다. 내가 20살 때 일입니다.

그날 밤 두세 겹으로 쌓인 주검들을 수습하러 갔습니다. 비에 섞인 핏물은 발목까지 차올랐습니다. 7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태어난 지 11일 된 아기 한 명만이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날 어머니 판티응으(47살)과 세 여동생인 레티옌(16살)·레티디(10살)·레티런(8살), 큰어머니, 작은어머니와 아이 3명, 사촌여동생과 아이 3명, 형수와 아이 2명, 고모와 아이 2명도 한국군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내가 숨이 붙어 있는 한 가족이 학살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여전히 악몽을 꾸고 소스라치게 놀라 깨곤 합니다. 유격대이던 나는 가족을 죽인 한국군에 대한 복수심으로 전쟁터에 섰습니다. 학살 피해 이후 고모 배 속에 있던 아이를 제외한 가족 18명의 주검을 수습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부터 미군이 마을 일대를 불도저로 밀어버려 9개 묘는 찾을 길이 없어졌습니다.(제1196호 ‘그 기억은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아요’ 참조)

한국에 바라는 것: 많은 가족이 한국군에게 학살 피해를 당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피해자와 유가족이 평생 감당해야 했던 고통과 상실에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배상을 해야 합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대한민국 청와대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이 피해를 당한 베트남 꽝남성, 꽝응아이성 내 17개 마을의 위치다. 위령비·공동묘·가족묘 좌표 또는 위령비 주변 마을의 좌표를 지도에 표시했다. 한베평화재단 누리집(kovietpeace.org)에서 더 많은 장소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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