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못 펴고 WBC 굴욕…‘투수 가두리 양병론’까지 등장

2026. 4. 4.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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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의 스포츠 인사이드] 퇴보하는 한국 투수들, 어떻게 키울까
지난달 14일 WBC 8강전에서 도미니카공화국에 7회말 0-10으로 콜드게임 패배를 당한 한국 선수들이 아쉬워하고 있다. [연합뉴스]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고 한다. 맞는 얘기다. 야구는 투수가 공을 던지면서 경기가 진행된다. 투수는 타자가 칠 수 없거나 최소한 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공이나 종횡무진 휘는 변화구를 던져야 한다. 타자는 이런 공을 배트 중심에 맞혀 안타를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투수가 약하면 받아치는 타자도 발전하지 못한다.

지난달 끝난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한국 야구는 국제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음을 절감했다. 도미니카공화국에 충격의 0-10 7회 콜드게임패를 당한 8강전은 차치하고라도, 대표팀은 1라운드에서도 체코·대만·일본·호주를 상대로 인상적인 경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무엇보다 투수의 불안이 컸다.

이번 대회 한국 투수들의 직구(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시속 145.0㎞였다. 2009년 WBC 때의 146.3㎞보다 오히려 떨어졌다. 2009년엔 참가팀 중 일본(147.5㎞)에 이어 2위였으나 이번 대회에는 20개 팀 중 18위로 곤두박질했다. 이번 대회 4강 진출 팀의 속구 평균은 152㎞ 정도였다. 한국 투수들이 빠른 볼로 타자를 윽박지르는 건 애초 무리였다.

다음은 제구력. 이번 대회 한국 투수들이 던진 공 734개 가운데 331개(45.1%)가 ‘가상의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다. 20개 팀 중 9위다. 스트라이크 존 상하좌우 코너로 들어온 비율은 16.5%(121개)로 10위였다.

145㎞ 남짓한 직구가 스트라이크존 코너를 찌르지 못하면 그건 ‘배팅 볼’ 수준이 된다. 한국이 허용한 홈런 10개 중 9개가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한 공이었다. 한국 투수의 피장타율은 0.544로 20개국 중 네 번째로 나쁜 기록이었다.

변화구도 밋밋했다. 직구처럼 오다가 타자 앞에서 좌우로 휘는 슬라이더는 ‘좌우 무브먼트’가 14.2㎝로 도미니카공화국(26.7㎝)의 절반 수준이었다. 커브는 상하 무브먼트는 컸지만 평균 구속(123.0㎞)이 네 번째로 느려 상대 타자가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투수진 약하면 타자도 실력 못 키워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 투수는 아무도 없다. 한국 야구의 국제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이유는 투수가 약하기 때문이다. 투수가 약하면 타자도 발전하지 못한다. 때문에 투수를 우선적으로 키워야 한다. 인프라와 저변이 일본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상황에서 가끔 특급 투수가 한두 명 등장할 수 있겠지만 판을 뒤집을 수는 없다.

현실을 한탄하기 앞서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 최근 야구인들 사이에서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유망 투수 육성의 분업화-전문화’다. 야구는 단체종목이라고 하지만 투수와 타자의 운동 메커니즘이 전혀 다르고, 쓰는 근육도 다르다. 따라서 투수의 메커니즘 특성에 맞는 훈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프로야구 구단의 해외 전지훈련을 가 보면 투수조와 야수조가 각기 다른 운동장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중고교 야구팀을 비롯한 유소년 시스템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중고생 유망주를 대상으로 한 ‘KBO 넥스트 레벨 트레이닝 캠프’에서 선수들이 투구 연습에 앞서 스트레칭 시범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 KBO]
프로야구를 총괄하는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022년부터 시즌이 끝난 뒤 중고생 유망주를 대상으로 1~2주간 ‘KBO 넥스트 레벨 트레이닝 캠프’를 열고 있다. 전국에서 모인 유소년 유망주들이 프로 출신 지도자들에게 야구 실기를 배운다. 이 캠프에서는 포지션별로 특성화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물론 투수들은 투수끼리만 훈련한다. 2022년에 참가한 1기 멤버 중에서 202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정우주(한화), 정현우(키움), 김태형(KIA) 등 무려 15명이 프로 지명을 받았다.

아예 투수만 전문으로 육성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유망 투수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이른바 ‘투수 가두리 양병론’을 주장하는 움직임도 있다. 마치 가두리 양식장처럼 방학 때나 학기 중 수업이 끝난 뒤 한 곳에 모여 전문 코치와 트레이너의 지도를 받고, 경기 때만 소속 학교 선수로 출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에이스 투수들의 혹사 방지, 부상 예방 및 조기 치료와 재활, 우수 선수끼리 선의의 경쟁, 팀 내 서열화로 인한 학폭 가능성 차단 등의 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고교야구 4대 메이저대회(대통령배·청룡기·황금사자기·봉황대기)는 2주간의 대회 기간에 결승까지 가면 6~7경기를 치러야 한다. 에이스 투수는 이틀에 한 번꼴로 등판하며, 3~4 경기에 선발과 구원을 병행하기도 한다. 투구 수 관리 규정이 있지만 ‘쪼개기 등판’ 같은 꼼수로 피해갈 수 있다. 투수가 팀과 떨어져 따로 훈련하다가 대회 때만 팀에 합류한다면 ‘연투에 대한 암묵적 강요’에서 벗어날 수 있다.

투수의 혹사는 부상으로 이어진다. 최근 야구계에는 “투수로 성공하려면 중·고교 때 토미존 수술을 해야 한다”는 무서운 이야기가 돌고 있다. 토미존 수술은 손상된 팔꿈치 내측측부인대(MCL)를 내 몸 다른 곳의 힘줄로 교체하는 것을 말한다. “토미존을 하면 구속이 향상된다”는 잘못된 속설 때문이기도 하고, ‘에이스라면 팔꿈치가 갈릴 정도로 던져야 한다’는 세태를 반영한 현상이기도 하다.

용병 투수에 의존하는 구단에 씁쓸
재능이 뛰어난 투수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프로 또는 대학 진학의 근거가 되는 ‘기록’에 대한 접근도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는 전국대회에서의 팀 성적, 개인 승수, 평균자책점 등을 토대로 선수를 뽑는다. 그러니 팀 성적이 중요할 수밖에 없고, 이는 에이스의 혹사로 이어진다. 하지만 투수가 아무리 잘 던져도 타선 침묵, 수비 실수, 빗맞은 안타 등으로 인해 승패가 바뀌고 기록이 나빠질 수 있다.

스포츠과학과 측정 장비의 발달로 방대하고 자세한 데이터가 생산되고 있다. 이를 활용해야 한다는 거다. 은승표 코리아정형외과 원장은 “볼 스피드뿐만 아니라 제구력, 변화구 각도 등을 잴 수 있는 장비가 보급되고 있다. 투구 시 상체와 하체의 꼬임 정도를 보여주는 수치도 나온다. 테크놀로지와 데이터의 결합으로 나오는 정량적 평가를 기준으로 진학과 프로 진출을 결정할 수 있어야 투수의 혹사를 막고 향후 성장을 위한 자질을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끝판대장’ 오승환과 이대은(은퇴) 등의 에이전트를 맡았던 김동욱 스포츠인텔리전스 대표도 “은퇴한 투수들 중에는 숟가락질을 제대로 못할 만큼 후유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투수가 성장하고 장수하기 위해서는 학생 시절부터 투수를 따로 관리하고 체계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장으로서 SK 와이번스(2018)와 SSG 랜더스(2022)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류선규씨는 ‘투수 가두리 양병론’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지적했다. “얼마나 많은 곳에 그런 시설을 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학생 선수들이 학교 수업을 받고 이동해서 훈련하기에는 절대적 시간이 부족하다. 또 좋은 시설과 최신 장비, 뛰어난 코치진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큰 자금이 필요한데, 어떻게 수익모델을 만들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현실적으로 ‘KBO 넥스트 레벨 트레이닝 캠프’의 규모와 기간을 늘리고, 이같이 분업화-전문화된 투수 육성 프로그램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야구인들은 입을 모은다.

아들(투수 최원일)을 LA 다저스로 보낸 ‘베이스볼 대디’ 최승표씨는 “현재 한국의 야구 수준은 미국과 20년, 일본과 10년 정도 차이가 난다고 본다. 그들이 하고 있는 걸 우리가 안 한다는 건데, 그건 스포츠과학을 야구에 적용하는 작업이다. 첨단 장비를 활용한 측정과 분석뿐만 아니라 코치와 선수 간의 커뮤니케이션, 멘탈 관리, 영양과 휴식 등을 다 포함하는 개념이다. 학교 야구부 차원에서는 꿈도 못 꾼다. 이런 것들을 구현할 수 있는 시설과 조직이 생긴다면 대환영이다”고 말했다. 이번 WBC에서 한국 대표팀 투수진은 42세 노경은(SSG)이 승리를 책임지는 ‘마당쇠’ 역할을 했고, 39세 류현진(한화)이 가장 중요한 경기의 선발로 나섰다. 8강전에서 참담한 콜드게임 패배를 당하고 보름 뒤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렸다. 5경기 모두 매진이었다.

‘코치라운드’라는 야구 코칭 모임도 운영하는 최승표씨가 씁쓸하게 말했다. “프로야구 1200만 관중의 환호에 취하고, 구단은 ‘용병 투수만 잘 뽑으면 우승할 수 있다’고 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도 ‘투수 가두리 양병론’ 같은 문제 제기를 하는 것 자체가 반갑습니다.”

정영재 칼럼니스트. 중앙일보·중앙SUNDAY 스포츠 기자 출신 칼럼니스트. 2013년 스포츠 기자의 최고 영예인 ‘이길용체육기자상’을 받았다. 현재 대학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스포츠 다큐: 죽은 철인의 사회』 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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