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강국 日, 이젠 韓에 웹툰 배우러 오는 시대…제작부터 글로벌 시장 목표”
“일본 유학시절 한국인들은 만화를 못그린다는 무시를 참 많이 당했다. 그러나 이젠 콧대 높던 만화 강국인 일본 업계 관계자들도 한국에 찾아와 웹툰 제작 공정을 배워간다.”
만화 ‘용감한 시민’, ‘싸움독학’, ‘킬러배드로’를 그린 김정현(40) 작가는 한국 애니매이션고를 졸업한 뒤 2002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교토세이카대에서 만화를 전공하며 졸업 후에도 2011년까지 일본에서 만화를 그렸다. 일본 3대 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가 주최하는 최고 권위의 신인만화가상인 ‘지바테쓰야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10년 가까이 만화 종주국이라 불리는 일본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지만 ‘외국인 노동자’라는 딱지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더스튜디오파란’에서 만난 김 작가는 “그러다 우연히 한국 지하철에서 본 한 장면이 내 인생을 바꿨다”며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서 웹툰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세계 1위 만화 소비국인 일본은 오랜 기간 단행본 중심이었지만 스마트폰 앱으로 만화를 보기 시작하면서 최근 시장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모바일 시장 조사업체 데이터닷에이아이에 따르면 네이버웹툰의 일본 계열사인 ‘라인망가’는 올 8월 일본에서 비게임 어플리케이션(앱) 기준 애플(iOS)과 구글플레이 통합 수익 1위를 차지했다. 라인망가에서는 ‘입학용병’, ‘재혼황후’, ‘상남자’ 등 월 거래액 1억 엔(약 9억 원)을 넘긴 한국 웹툰이 연이어 나왔다. 일본 공략을 위해 아마존 플립툰, 애플 북스 등 빅테크들도 세로형 디지털 만화 컨텐츠를 내놓으며 시장에 뛰어들었다.
김 작가는 “과거에는 한국 만화 산업이 워낙 영세해 작가가 아무리 뛰어나도 플랫폼이 받쳐주는 시장이 되지 못했다. 반면 일본은 만화 시장 규모가 압도적으로 크고 창작자 지망생 풀이 넓고 인재양성 시스템도 뛰어나다”며 “그런데 네이버웹툰이 한국 작가들도 전 세계로 만화를 선보일 수 있는 무대(플랫폼)를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세계 2위 만화 소비국인 프랑스 현지에선 김 작가와 임리나 작가가 함께 네이버웹툰에 연재 중인 ‘킬러배드로’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둘은 올 7월 파리에서 열린 팬사인회에도 참석했다. 김 작가는 “파리 현지에서 만난 팬들이 작품에 대한 감동을 전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작품이 언제 드라마로 만들어지는지 문의하는 현지인들이 많아 무척 놀랐다”고 전했다.
이처럼 한국 웹툰의 인기가 글로벌 시장에서 확인되면서 웹툰 제작 단계에서부터 글로벌 연재와 드라마, 영화 등 영상화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웹툰이 국내에서 흥행해 수출되는 것이 아니라 제작 단계에서부터 글로벌 시장 진출을 그리는 구조다. ‘킬러배드로’ 역시 웹툰 제작 단계부터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했다. 김 작가는 “직접 ‘더스튜디오파란’를 세운 것도 글로벌 IP 비즈니스를 항상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희로애락에 집중”
이미 시장에서 한차례 대중에게 검증받은 인기 웹툰은 드라마, 영화로 제작될 확률이 높다. 특히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등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들간 경쟁이 치열해지며 웹툰 원작 드라마는 OTT업계에서 일종의 ‘흥행보증 수표’ 반열에 올라섰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마스크걸’, 디즈니플러스의 ‘무빙’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렇다보니 작가들도 웹툰 제작 단계에서부터 글로벌 독자를 염두에 두고 스토리를 구성한다. ‘킬러배드로’에는 ‘12사도’라 독특한 설정이 나온다. 서구권에서도 이해하기 쉽도록 ‘예수와 12사도’라는 설정을 차용한 것이다. 임 작가는 웹툰이 한국만이 아닌 글로벌 독자들에도 소구할 수 있는 인간 보편적 ‘희로애락’을 담은 감정선과 스토리에 주안점을 둔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유행어나 ‘밈’ 등을 넣으면 당장 조회수가 잘나오거나 화제가 될 수는 있지만 글로벌 독자들이 맥락을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따라서 반짝 유행하는 유행어와 ‘밈’을 넣는 것은 자제한다고 한다. 대신 국적과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보편적 감정과 메시지를 스토리에 녹이는데 집중한다. 임 작가는 “배드로 고유의 세계관에 집중하도록 하고, 스토리 안에서 반전과 의외성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국 독자들에게만 호소하는 메시지를 넣으면 해외 독자들을 공감하기 어렵다는 점을 늘 생각하며 스토리를 전개한다”고 강조했다.
네이버웹툰은 ‘아시아의 디즈니’를 목표로 미국 나스닥에 상장했다. 이에 대해 임 작가는 “아시아의 디즈니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본다”고 했다. 그는 “웹툰 시장이 굉장히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평가한다”며 “한국에서도 웹툰 작가를 양성하는 시스템만 잘 갖춰진다면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세종대 만화애니매이션학과 출신인 임 작가는 “다만 최근 대학교에서 만화학과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장은지 기자 j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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