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레전드 30명이 서울서 경기....그 뒤엔 축구광 2명의 12년 ‘덕질’ 있었다
“만약 세계적인 수비수들이 한 팀을 이루고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한 팀을 이뤄 서로 맞붙는다면 누가 이길까?”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은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그런데 이 상상이 현실이 됐다.
온라인 게임업체 넥슨코리아는 오는 2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게임이 아닌 진짜 축구 경기 ‘아이콘 매치’를 연다. 평범한 경기가 아니다. 공격수끼리 팀을 이뤄 수비수끼리 이뤄진 팀과 붙는다. 축구 팬들이 상상 속에서나 하던 창과 방패의 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더군다나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레전드’들이 속속 참가 의사를 밝혔다. 호소력 있는 발언으로 자국 내전을 멈췄던 코트디부아르 공격수 디디에 드로그바, 잉글랜드의 ‘원더 보이’ 마이클 오언, 이탈리아의 ‘판타지 스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포르투갈 레전드 루이스 피구 등이 라인업에 포함됐다. 넥슨코리아가 발표한 양측 선수단은 총 30명. 이 가운데 1년에 단 1명, 세계 최고의 활약을 한 선수에게 주는 ‘발롱도르’ 수상자만 5명이 포진했다.
이 정도 레전드급 선수는 1명 섭외도 힘든데 넥슨코리아는 어떻게 이 많은 레전드를 한국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을까. 그 뒤엔 12년 동안 ‘덕업일치(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것)’를 해온 2명의 ‘축구광’이 있었다.
넥슨코리아에서 축구게임 FC 시리즈(옛 피파 시리즈)를 이끌고 있는 박정무(45) FC그룹장이 그 중심에 서있다. 2012년 넥슨코리아에 입사한 그는 사내에서 유명한 축구광이다. 축구가 좋아서 넥슨으로 입사해 FC 시리즈를 지금껏 키워왔다고 한다.
게임업계에서 그는 ‘애증’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사내에서 단순 기획에만 머물지 않고 유명 축구 유튜버 방송에 나가는 등 팬들과 직접 소통해 오다 보니 ‘FC 시리즈=박정무’ 공식이 생겨 비난과 찬양 모두 그에게 쏠린다. FC 시리즈는 고객이 돈을 내면 랜덤(무작위) 방식으로 선수를 공급한다. 고객은 좋은 선수가 나오면 “내가 박정무를 이겼다”라고 소리친다고 한다. 반대로 원하지 않은 선수가 나오면 모든 비난은 박 그룹장에게 쏠린다.
박 그룹장은 그냥 당하고 있지만 않는다. FC 시리즈를 할 땐 고객 스스로가 자기 별명을 입력하는데, ‘박정무’란 단어는 입력이 되지 않는다. 사칭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박 그룹장이 고객에게 주는 일종의 되받아치기인 셈이다. 2021년엔 만우절 이벤트로 박 그룹장이 직접 선수로 등록돼 큰 웃음을 주기도 했다.
장난기 가득한 박 그룹장이지만 인터뷰에선 선비 같은 모습을 고집했다. 그는 “FC 시리즈를 운영해 오면서 고객 역시 축구에 대한 높은 애정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며 “모든 고객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어서 여러 행사를 진행했는데, 이번엔 축구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하고 싶어서 이 기획을 밀어 붙였다”고 말했다.
단순히 친구 22명이 모여 축구를 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서로 다른 나라에 사는 레전드 선수들을 한 장소 같은 시간에 모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는 “진짜 어려웠다. 그런데 생각보다 호응이 좋았다”며 “실제로 더 많은 선수들이 아이콘 매치에 참여하고 싶어했지만 각자 사정으로 아쉽게 오지못한 사례도 많았다”고 했다.
◇'든든한 우산’ 넥슨과 손발이 된 유튜버의 환상 조합
박 그룹장이 자금을 끌어오고 기획의 현실화를 위한 우산 역할을 해왔다면 그의 손발이 돼 준 건 160만 유튜브 채널 ‘슛포러브’ 운영자 김동준(38)씨다. 2019년 U-20 월드컵 때 김씨와 처음 연을 맺은 박 그룹장은 김씨의 족적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축구계에서 무식하게 ‘박치기’ 해온 김씨 정도면 이 기획을 제대로 구현해 줄 손발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어릴 때 미국으로 유학간 김씨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를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뒀다. 05학번인 그는 2011년 군 제대 뒤 휴학을 하고 학교로 돌아가지 않아 제적당했다. 한국에서 기부 플랫폼을 만들어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싶어서였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지역 기업과 함께 즐겁게 했던 기부 프로그램이 그의 인생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는 “매년 학교에서 모든 학생과 교직원이 운동장을 돈 만큼 지역 기업이 기부하는 프로그램을 했다. 기부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걸 느껴 그걸 한국에 이식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2012년 직접 기부 플랫폼 비카인드를 만들었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등 기념일에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직접 기부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사람들이 기부하면 공익재단으로 직접 돈이 가게 만들었는데, 생활고가 심해서 아르바이트로 연명을 했다.
그러던 중 한국소아암재단에서 돕고 있는 아이들이 그에게 또 다른 미션을 줬다. ‘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소아암 환아들 대답이 “축구가 하고 싶어요”였던 게 그를 움직였다. 그래서 그는 2014년 슛포러브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단순했다. 축구선수를 섭외해 가운데 구멍이 뚫린 과녁에 공을 차도록 하고 집어 넣으면 특정 기업이 한국소아암재단에 기부를 하는 형식이었다. 자생한방병원과 게임개발사인 플레이독소프트는 든든한 서포터였다.
김씨는 아이디어를 하나 더했다. 참가 선수들에게 ‘다음 주자’ 3명을 지명하게 한 것이다. 슛포러브 채널 성장에 첫 주춧돌이 돼준 건 안정환이었다. 이어지던 지목은 얼마 안 가 한계에 부딪혔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FC바르셀로나의 캡틴이었던 수비수 카를로스 푸욜이 지목돼서였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우리 캠페인에 참여해 줄까?”... YES!
김씨는 무작정 유럽으로 떠났다. 푸욜의 소셜미디어를 ‘스토킹’해 그가 다니는 영어학원을 알아낸 김씨는 푸욜의 선생님에게 졸랐다. 드디어 푸욜이 나왔다.
계속 ‘무식한’ 그였다. 다음 주자로 지목된 잉글랜드의 레전드 수비수 존 테리를 찾아 갈 땐 단순히 ‘호숫가에 있는 집’에 산다는 신문 속 정보만 가지고 호수 근처 부촌을 샅샅이 뒤져 그의 집을 찾았다. 며칠을 기다려 만난 존 테리는 김씨의 캠페인 취지를 듣고 경매에 쓰라며 자신이 이틀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입고 뛴 유니폼과 신었던 축구화까지 건넸다.
김씨의 활약을 유심히 지켜보던 박 그룹장은 선수 섭외와 홍보 콘텐츠 제작을 담당하게 했다. 아이콘 매치에 참여한 선수 30명 가운데 23명이 외국인 선수인데, 이 가운데 김씨와 이미 연을 맺은 사람만 푸욜을 비롯해 카카,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드로그바, 델 피에로, 에당 아자르, 리오 퍼디낸드, 야야 투레,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등 9명이다. 김씨의 이런 ‘광기’가 수많은 레전드를 한국으로 불러들이는 원동력이 됐다.
김씨는 인터뷰를 하려고 연락하면 늘 공항 와이파이로 간신히 대답을 건넸다. 얼마 전 브라질에 있던 그는 이태리에서 영국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다 말했다.
“제가 한 건 거의 없어요. 넥슨코리아에서 절 믿고 이렇게 지원과 기회를 준 것만 해도 참 감사한 일입니다.”
10년 넘게 각자의 위치에서 축구만 바라 보고 살던 두 사람의 꿈은 현실이 됐다. 오는 20일 서울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리는 경기의 티켓 6만4000장은 오픈 직후 매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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