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덕칼럼] 캐나다의 길, 한국의 길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
한국도 중견국이나 상황 달라
그래도 적절한 공감 필요
그게 실용·국익외교의 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의 대표적 소설 '마의 산'의 무대인 스위스 다보스. 지난달 말 이곳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의 압권은 의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었다. 1500명을 수용하는 콩그레스홀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주최 측은 실시간 중계하는 공간을 4곳 더 마련했다. 다보스포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연설 메시지나 문장의 힘, 언어의 품격 측면에서는 결코 트럼프가 주인공이 아니었다. 외신이 전하는 다보스포럼의 영웅은 트럼프보다 22시간 먼저 같은 무대에 선 캐나다의 마크 카니 총리였다. 2000여 자 분량의 연설을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오자 사회자의 첫 코멘트, "다보스에서 이런 기립박수는 처음 봅니다." 트럼프나 미국이란 단어는 단 한마디도 사용하지 않은 카니. '미국의 헤게모니'라는 표현을 쓸 때의 형용사, '아메리칸(American)'이 유일했다.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초강대국의 힘과 폭력. 그러나 여전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한, 소위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에 미련을 두는 국가들. 카니는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의 에세이, '무력한 자들의 힘'에 나오는 명언을 끄집어낸다. '거짓 속에서 살아가기'. 규칙 운운한다면 그건 명백한 위선. 지금 세계는 파열(rupture)의 한가운데 있다고 진단한 카니. 그는 중견국(middle power)의 단결과 연합을 주창하면서 함께 행동하자고 촉구했다. 캐나다의 길이라면서.
카니의 연설에 전 유럽 국가들이 열광한 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루가 멀다고 조롱에 시달리고 문명 말살이란 경고를 받는 그들이 미국에 돌려주고 싶은 말을 대신 했으니 말이다. 트럼프는 심기가 불편했는지 카니에게 한 방 날렸다. "캐나다는 미국 때문에 살아가는 나라다. 마크, 다음에 말할 때는 이 사실을 꼭 기억하라"고.
카니의 주장에 공감한 건 단지 유럽뿐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도 부인할 수 없는 미들파워다. 중견국 협의체인 믹타(MIKTA·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튀르키예 호주) 결성을 주도했으며 캐나다와 같은 주요 20개국(G20) 회원국이다. 정도가 덜할지는 몰라도 미국의 전례 없는 강공에 시달리는 것도 매한가지다. 진보 정권의 외교·안보 책사로 인정받는 문정인 전 대통령 특보는 "강자의 횡포를 그대로 둘 수 없기에 미들파워들이 세를 규합해야 한다는 호소가 인상적이었다"며 "이재명 정부의 국익 기초 실용외교와 맥을 같이한다"고 평가했다. 물론 노선을 같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현명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단서를 달고.
맞는 말이다. 캐나다를 따라 하기엔 국제 현실이 엄혹하다. 한국이 미들파워이긴 하나 캐나다와는 다르다. 경제력이나 인구 측면에선 밀리지 않으나 자원이 부족하고 핵심 기술 역시 우위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직면한 안보 위협은 직접적이고 실존적이다. 조희용 전 주캐나다 대사는 "캐나다는 마치 북미의 이스라엘 같은 나라"라며 "믿는 구석이 있어 배짱을 부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결정적인 시대적 변화를 외면하는 것도 답은 아닐 것이다. 힘의 우위를 앞세우는 강대국 간의 패권 경쟁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은 점쟁이들이나 하는 일. 무모하기 짝이 없다. 그냥 이제 뉴노멀로 가정하고 우리의 전략을 세울 일이다. 그건 '줄타기'라는 비난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우선 동맹을 강화하고, 동시에 스스로 힘을 키우며, 그걸 토대로 '다층적 연대망'을 구축하는 일. 원론적이나 이 이상의 답은 없다. 그게 국익외교, 실용외교다. 그런 점에서 우리도 미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카니의 발언에 어느 정도 공감을 표명하는 것은 필요해 보인다. 그건 글로벌 공급망을 무기로 은근히 위압적 자세를 견지하는 중국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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