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호주인의 드라마, 한국에서 ‘호러 장르’ 웹툰으로

임지영 기자 2024. 10. 16.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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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서 한국계 호주인들이 만든 단편 시리즈가 방영되었다. 한인 이민자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가 곧 국내에 웹툰으로 공개된다. 장르는 호러이다.
9월30일 '밤에 피는 자들' 프로젝트의 기획자 신인아씨가 서울 종로구 작업실에서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핼러윈을 앞둔 2023년 10월28일,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공영방송 SBS의 한 채널에서 〈밤에 피는 자들(Night bloomers)〉이 방영되었다. 한국계 호주인 앤드루 언디 리(이보영) 감독이 만든 호러 단편 시리즈다. 호주 한인 이민자 사회를 배경으로 호주-한국인의 디아스포라를 다룬다. 작가와 출연진, 스태프 대부분이 한국계 호주인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작품에 등장하는 도깨비, 한복 입은 무용수, 정화의 춤 같은 키워드를 묘사하며 ‘한국-호주 이민 경험의 다양한 측면을 다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1년 뒤인 현재, 〈밤에 피는 자들〉이 웹툰으로 각색되어 국내 공개를 앞두고 있다. 영상의 스크립트를 참고해 웹툰 작가 4명이 5개 에피소드를 그렸다. 앤드루 리 감독의 대학 동기이기도 한 그래픽 디자이너 신인아씨가 기획자로 참여해 영상과 웹툰 사이에서 번역자 역할을 했다. 3년 전 호주와 한국 간 콘텐츠 교류를 지원하는 사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앤드루 리 감독이 ‘영상-웹툰화’를 구상하면서 신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할지 궁금해하던 감독은 한국 고유의 ‘포맷’인 웹툰으로 이야기가 재해석되길 바랐다.

웹툰 작가들은 영상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작업에 참여했다. 처음부터 감독과 기획자 모두 스토리만 가지고 웹툰을 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가들은 영상은 물론 다른 에피소드의 내용도 모른다. 신인아씨는 “호주 이민자들이 만든 이미지가 영상이라면, 그걸 한국 사람이 재해석한 이미지가 웹툰이다. 그 둘이 섞이지 않고 나왔을 때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 웹툰이 영화화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반대로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디아스포라를 재현하는 장르가 왜 호러일까. 호주 공영방송 SBS 홈페이지의 ‘밤에 피는 자들’ 소개글에도 ‘고대 민속에서 영감을 받은 호주 한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 오싹하고 기괴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악의 세력과 싸우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10대와 20대를 호주에서 보낸 신인아씨가 보기에 장르가 호러인 건 어쩌면 매우 자연스럽다. “호주 주류 사회에서 한국적인 것은 낯설고 이상하고 가까이 하기 싫은 것에 가깝다. 타이틀도 ‘밤에 피는 자들’이다. 낮으로 상징되는 주류 문화에서 꽃필 수 없는 사람들이 뒤에서 본인들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고 거기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앤드루 언디 리 감독(왼쪽)이 ‘밤에 피는 자들’을 만들고 있다. ⓒNight Bloomers 제공

웹툰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빠지고 새로 들어간 에피소드도 있다. 총 다섯 편 중 ‘친구 아니면 적(Friend or Foe, 전낙주 작가)’은 1970~1980년대 호주로 이민 온 1세대 이민자들의 디아스포라를 다룬다. 옛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저장강박에 빠진 주인공 로사는 그것 때문에 아들과 갈등을 빚는다. ‘재림(The Second coming, 197 작가)’은 성소수자로 살아가고 있는 한국계 호주인이 겪는 이중 억압을 뱀파이어에 비유해 유쾌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감독 본인의 삶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밖에도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 아버지인 이민 1세대와 2세대의 갈등을 다룬 ‘영혼 훔치기(Jacking Soul, 전낙주 작가)’, 하는 일마다 완벽함을 증명해야 하는 ‘모범적 소수자’로서의 강박을 표현한 ‘쇼팽 야상곡 5번 사단조(Nocturne No.5 in G minor, 김산호 작가)’, 이민 3세대 혹은 해외 입양자의 정체성 혼란을 외계인에 비유한 ‘날 위해 빛나는(Shine for me, 파라나 작가)’이 있다.

웹툰 작가를 섭외할 때 감독과 기획자가 함께 원칙을 세웠다. 유명한 작가보다는 그동안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은 작가 위주로 섭외할 것,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고 호러 장르를 잘 구현하는지 고려할 것. 그렇게 청탁한 작가 대부분이 흔쾌히 응해주었다. ‘친구 아니면 적’ ‘영혼 훔치기’ 두 편을 그린 전낙주 작가는 처음 연락을 받고 의외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그림체가 해외에서 ‘먹힐’ 거라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다.

2019년 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과 억압을 받던 ‘숙이’의 성장담을 그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데뷔한 전 작가는 평소 민화나 탱화 등 한국적인 이미지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그려왔기 때문에 현대물을 표현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잘할 것 같아 제의를 주셨다고 했다. 한국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 제안했다는 점에서 내 정체성과 가치관을 이해해준 것 같아 기뻤다.”

호주에 가본 적은 없지만 전 작가의 언니와 동생이 곧 영주권을 얻기 위해 호주에 갈 계획이다. 작품 속 인물에서 언니와 동생의 ‘선발 주자’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치원에 다닐 때 잠시 홍콩에서 살았던 전 작가는 그림체에서 중국 느낌이 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만화를 시작할 때 일본 만화의 영향으로 일본 색채가 강했는데 그 부분을 지적받은 뒤에는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천착했다. 나 혼자의 해석이지만 해외에 살던 경험도 작품에 반영되었을 텐데, 그걸 감독이 알아보고 외주를 준 게 아닌가 싶어서 신기했다.”

아시아인이 많이 사는 호주 동네의 분위기가 어떤지 신인아씨의 도움을 구했다. 저장강박을 가진 로사를 묘사하기 위해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외할머니 댁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참조했다. 평소 웹툰을 그릴 때 쓰는 3D 소프트웨어 ‘스케치업’ 대신 아날로그 방식으로 ‘손맛’ 나게 그렸다. 스스로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의 스토리라 더 신경 써서 작업했다.

이쪽도 저쪽도 이해하는 사람

앤드루 리 감독은 호주 방송 SBS 팟캐스트에 출연해 한국계 호주인이자 성소수자로서 겪은 어려움을 이렇게 설명했다. “호주 사회에서는 너무 한국적이었고 한인 사회에서는 충분히 한국적이지 않았다.” 열여섯 살에 호주로 유학을 가 27세에 한국에 돌아온 신인아씨가 보기에 호주 이민자들은 미국 이민자와도 성격이 좀 달랐다. “이민의 계기 자체가 미국의 경우 아메리칸드림의 성격이 강한데, 호주는 그와 다르다.” 유학생으로서 그가 호주를 선택한 건 영어권 다른 국가에 비해 물가가 저렴했기 때문이다. 세대마다 이주한 이유도 다양했다. 앤드루 리 감독의 아버지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뒤 한국이 너무 싫어서 호주로 온 경우였다. 태권도 사범이던 그는 호주에서 처음으로 태권도 도장을 열기도 했다. 1970~1980년대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신인아씨는 최선을 다해 호주 사회와 동화되려 하면서도 한국 문화를 습득하기 위해 애쓰는 한국계 호주인의 모습을 많이 목격했다. 이들은 한국인을 향한 차별적 시선이 담긴 질문을 받을 때도 한국 문화에 대해 설명하며 성심껏 답했다. 지나고 보니 항상 ‘그들’과 다른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태도가 몸에 밴 게 아닌가 싶다. 충분히 한국적이지 않았다는 앤드루 리 감독도 한국의 무속신앙, 제사, 탈춤 같은 것들을 깊이 파고들었다. 감독은 호주 방송 SBS 팟캐스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드라마를 통해 우리 문화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지만 또한 우리 문화를 아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알리고 싶다.”

김산호 작가가 재해석한 ‘쇼팽 야상곡 5번 사단조’ 웹툰 콘티 일부 장면. ⓒNight Bloomers 제공

영상을 웹툰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신인아씨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가령 호주에 사는 이민 2세대가 왜 한국 음식을 해먹는지 작가가 궁금해했다. 또 왜 호주인인데 영어 이름이 아니라 한국 이름을 쓰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작가도 있었다. 모국의 이름 형식을 따르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어서 등장인물의 이름이 한국식인데 창작자 입장에서는 그것 때문에 캐릭터가 1세대 이민자인지 2세대인지 알기 어려웠다. 창작자들이 알아서 재해석하게 두고 필요한 경우에만 조율했다. 오해하고 풀리는 소통 과정 자체도 프로젝트의 일부로 여겼다.

‘날 위해 빛나는’을 그린 파라나 작가는 스스로 스크립트를 수정하기도 했다. 처음 그가 받은 스크립트에서 주요한 키워드인 ‘고국’의 번역어가 ‘mother land’였다. 탯줄, 출산 등의 이미지가 연상되는데 한국의 젊은 여성이 볼 때는 여성혐오적이고 고루한 단어였다. 작가가 ‘고국’ 말고 ‘족보(Family Tree)’로 바꿔서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주어서 그렇게 바꿨다. 신인아씨는 “한국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 조금 더 설명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 과정이 한국 사람에게 주는 메시지도 있다고 본다.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점들을 한 발짝 떨어져 생각해볼 수 있을 같다”라고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가 창작자 개인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연재를 끝낸 뒤 6개월 정도 웹툰 그리는 걸 쉰 전낙주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더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중학생 남자아이 2명이 차를 훔쳐서 몰래 타는 내용이 있다. 차를 그려본 것도 처음인데 현대물을 그리면서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더 다양한 장르에 도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인아씨는 한국에 다시 왔을 때의 낯선 감각을 기억한다. “호주에 있을 때 친구들이 나를 호주 사람으로 대했지만 막상 중요한 타이밍에 호주 국적이 아니라서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거기서 오는 박탈감이 컸다. 한국에 오면 긴장감을 내려놓고 편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초반 몇 년은 문화 충격을 겪었다. 호주에서 겪은 일이 사는 데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프로젝트를 하면서 내가 이쪽도 저쪽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으로 한국과 한국 배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호주에서도 한국계 호주인 캐릭터나 한국어 대사가 늘고 있는 추세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접하기조차 어려울 때와 비교하면 멀리 왔지만, 당사자가 볼 때 ‘그들’이 그리는 한국계 호주인의 모습은 너무 전형적이거나 빈틈이 많다. 그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던 이들이 의기투합한 결과 ‘한국계 호주인들이 만든 첫 드라마’가 탄생했다. 같은 스크립트를 바탕으로 한국어 웹툰도 만들어졌다. 영상에서 웹툰까지 1년 걸렸다. 핼러윈을 앞두고 일주일에 한 편씩 다섯 편의 만화가 창작 플랫폼 ‘포스타입’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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