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폭력 희생자들 "시간 없는데"…진화위 연장 '하세월'
"재판도 없이 경찰에 살해당해…치아 찾아 장례 치러"
'유일한 진실 규명 창구' 진화위 2년 전 신청 접수 종료
조사 기간 연장 발의했으나 폐기…22대 국회 재상정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지난 2022년 12월 진실 규명 접수를 마감하고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많은 국가 폭력 희생자와 유가족이 접수 절차와 사실조차 몰라 억울함을 풀지 못한 사례가 나오고 있어 진화위의 진실 규명 접수와 조사 기간이 연장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재판을 받고 돌아가셨다면 억울함이 없는데…
경찰이 끌고 가자마자 그날 그냥 다 사살했다고 하더라고요.
진화위에서 그런 조사를 했다는데 신청 기간이 끝났다니까."
한국전쟁 이듬해인 1951년 2월 6일 구정 당일. 전북 고창군 대산면의 한 마을 이장이던 강용식씨는 6.25 당시 좌익 세력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경찰의 손에 끌려갔다. 마을 사람들을 잡아간다는 이야기에 자신의 누나 집에 숨어있다 발각된 강씨는 대산지서(당시 고창 대산면 관내 경찰서)에 끌려간 이날 밤 중에 야산에 올라가 사살당했다. 경찰은 이날 강씨가 가족과 함께 살던 집도 불태웠다. 집은 3일 가까이 화염에 휩싸였고 가족사진 한 장도 남지 않았다.
강씨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집이 불타는 동안 당시 강씨의 아내는 만삭의 몸으로 자신의 친정에 있었다. 강씨의 첫째 아들은 겨우 3살이었다. 나중에야 집도 잃고 남편도 잃었다는 사실을 안 강씨 아내가 야산에서 사살당한 시신들 사이에서 치아를 살펴 겨우 강씨를 찾았다. 보름만에 치아로 찾아낸 시신으로 장례를 치르고 석 달이 지나서 강씨의 아들, 강형원씨가 태어났다.
강형원(73)씨는 CBS노컷뉴스 취재진에게 자신을 유복자라고 소개했다. 강씨는 73년이 지나서야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에 나섰지만 이미 접수 기한이 마감돼 도움을 받지 못했다.
강씨는 "올해 97세인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셔 아직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고 계신다"며 "집이 전부 타버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의 물증이 없고 당시를 기억하는 어머니와 사촌 누나의 증언이라도 남기고 싶다"며 토로했다.
강씨의 사촌 누나 강숙자(78)씨도 "당시 다섯 살이었음에도 작은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강숙자씨는 "경찰에게 자신을 제발 숨겨달라며 애원했던 모습이 기억난다"며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려는 선택까지 고민할 정도로 압박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러다 어느 순간 모습을 감춘 뒤 경찰에 끌려다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강씨의 집을 경찰이 에워싸고 휘발성 물질을 뿌린 뒤 태우던 장면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강형원씨는 최근까지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저항도 하지 못하고 희생당한 이들의 진실을 규명해 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교직에 오래 근무하면서도 혹여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을까 아버지 이야기를 감추고 살았다고 설명했다. 강씨는 자신이 국가 폭력 희생자의 유가족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강씨는 "한 친척이 왜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진실 규명을 신청하지 않았냐고 말해 진화위가 이 같은 진실 규명 접수를 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강씨는 70여년 동안 풀지 못한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을 이제라도 규명해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강씨는 "절차상 진술 신빙성이 있는 인우보증인이 필요하다고 들었다"며 "나중에 신청을 받는다 해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떡하냐"고 걱정했다.
강씨를 비롯해 아직도 수많은 국가 폭력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진화위의 진실 규명 접수 신청 사실을 뒤늦게 알거나 알지 못한 채 늙어가고 있다.
지난 2020년 12월 출범한 제2기 진화위는 2022년 12월 진실 규명 접수를 마감하고 현재 조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진화위 측은 접수 기간이 끝나 강씨의 사연을 당장 규명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진화위는 "뒤늦게 접수를 원하는 문의가 와도 활동 연장이 되지 않으면 기록해 둘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인우보증인이 필수적으로 필요하거나 접수 기준이 따로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진화위는 "진화위가 검찰·경찰 같은 수사기관이 아닌 독립된 국가 조사기관이므로 역사적인 배경과 진술 신빙성, 진실 규명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강씨와 같은 피해자들은 추후 진실 규명을 신청할 때 직접 목격자나 당사자 등의 진술을 미리 녹음해 신빙성 있는 증거를 확보하고 기록해 두는 작업이 필요하다.
진화위는 "혹여 제3기 진화위가 출범하거나 법 개정으로 추가 신청을 받기 위해서는 증거를 마련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국 전쟁 등을 겪은 지 오래됐고 돌아가신 분이 많은 상황에서는 집단 피해를 본 피해자들과의 연대와 이웃, 동네 주민 등의 참고인 진술 모두 증거자료가 된다"고 조언했다.
진화위는 현재까지 전북 고창군 일대의 국가 폭력 피해 사례 조사가 3번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진화위는 "고창 대산면 조사는 현재 진행 중"이라며 "피해 유가족 가운데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나 고령인 분이 많아 증언 확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접수기간이 끝나 도움을 주기 어렵다던 진화위는 CBS노컷뉴스 취재진의 취재가 시작되자 강씨에게 접수기간에 신청된 또다른 대산면 피해자가 있다고 전달했다. 이어 강씨에게 참고인으로 진술을 기록해 추후 피해 접수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진화위 측은 강씨와 11월 초 광주에서 만나 진술을 청취할 예정이다. 진화위는 "강씨와 어머니, 사촌 누나 등의 진술을 기존 고창 대산면 접수자 조사의 참고인 진술로 기록해 국가기관의 공식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진실 규명 이후 피해자들이 보상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직접 3년 이내 사법기관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며 "진화위의 진실 규명 결과를 토대로 사법 절차를 따로 진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잇따라 진화위 조사 기간·진실 규명 접수 기간 연장 법안을 발의하고 있다.
행안위는 더불어민주당 이훈기 의원 외 17인이 지난 8월 20일 대표로 발의한 '진화위 조사 기간 3년에서 5년으로 연장·신청 기간 2년에서 5년으로 연장' 등의 내용을 담은 법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 밖에도 행안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양부남 의원 외 12인은 지난 9월 4일 '진화위 조사 기간 5년으로 연장·신청 기간 2025년까지 연장' 등의 내용이 담긴 법안을 대표로 발의해 행안위에 회부했다.
더불어민주당 이광희 의원 외 16인은 지난 9월 5일 진화위 조사 결과의 소멸시효에 관한 특례 조항을 신설하는 법안을 대표로 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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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CBS 김수진 기자 sjsj@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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