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튼 누르니 벽이 ‘스르르’… 가구 유형 따라 변신하는 아파트
움직이는 거실 벽 ‘트랜스포밍 월’… 30초 만에 숨어 있던 침실 드러나
내부 공간 활용도 높이기 위해, 외부에 기둥 두고 내력벽 최소화
다양한 유형의 1, 2인 가구 늘며 자녀 유무-연령대 맞춤 평형도
단순한 방 배치를 넘어 가구원 수와 나이, 취향 등에 맞춰 방의 크기와 개수를 바꾸고, 움직이는 벽을 설치하는 등 거실과 방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1∼2인 가구가 급증하면서 아파트 평면도도 다양해지고 있다.
“앗, 여기 방이 있었네.”
8일 인천 연수구 송도동 현대건설 ‘힐스테이트레이크 송도 5차’ 본보기집. 전용면적 105m²(약 32평) 평면도에는 방이 4개였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3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때 본보기집 직원이 거실 벽에 부착된 버튼을 눌렀다. 두께 60cm, 길이 3.5m 크기의 육중한 거실 벽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실 벽 뒤에 약 6.6m²(약 2평) 크기의 숨어 있던 침실이 등장했다. 방 3개였던 집이 방 4개짜리 집으로 변신하는 데 걸린 시간은 30초 남짓이었다.
이 단지는 현대건설이 국내 건설업계 최초로 개발한 ‘트랜스포밍 월&퍼니처Ⅲ’가 처음 적용된 사례다. 트랜스포밍 월은 움직이는 벽이라는 뜻이다. 가족 수와 상황에 맞춰 거실과 침실 사이 벽을 움직여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하도록 한 기술이다. 평소에는 거실 벽을 침실 방향으로 이동시켜 거실을 넓게 쓰다가, 명절에 자녀가 오거나 손님이 방문할 경우 벽을 거실 방향으로 움직여 숨어 있는 침실을 게스트룸으로 활용하는 식이다.
본보기집 방문객들은 움직이는 벽이 약 1600만 원짜리 유상 옵션인데도 활용도가 높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인천 연수구에 거주하는 임모 씨(35)는 “평소 거실을 넓게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 같다”며 “전용면적 105m²에만 있는 옵션이라 계획을 바꿔 해당 평형대를 분양받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 벽, 기둥 최소화… 방의 경계를 허물다
아파트가 국내 대표 주거 공간으로 자리 잡은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평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70∼90년대 지어진 아파트 대부분은 판상형이었고 평면도 획일적이었다. 2000년대 타워형으로 설계된 초고층 아파트가 등장한 뒤에도 방의 위치나 방향이 달라진 수준이었다. 그런데 1인 가구, 고령 가구, 맞벌이 무자녀 부부인 ‘딩크족’ 등 인구 구조와 생활 방식이 급격히 달라지자 최근 아파트 평면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18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단순한 방 배치를 넘어 입주자 가구원 수, 나이, 취향 등에 맞춰 방의 크기와 개수를 바꾸고 거실과 방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그간 ‘국민평형’으로 불리는 전용면적 84m²는 거실 하나에 방 세 개가 공식처럼 통했다. 앞으로는 거실 두 개와 방 두 개, 거실 하나에 방 네 개짜리 전용면적 84m² 평면이 등장할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8월 입주자가 원하는 대로 평면을 짤 수 있는 미래형 아파트 평면 ‘넥스트홈’을 공개했다. 넥스트홈을 구현하는 핵심 기술은 삼성물산이 독자 개발한 ‘넥스트 라멘 구조’와 ‘인필 시스템’이다.
라멘 구조는 기둥과 대들보가 건물 하중을 떠받친다. 벽이 건물 하중을 지탱하는 벽식 구조에 비해 공간 활용도가 높다. 넥스트 라멘 구조는 라멘 구조에 필수적인 기둥을 공간 외부에 배치해 내부 공간을 극대화한 게 특징이다. 인필 시스템은 공장에서 사전 제작한 바닥재, 벽체 등 구조물을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도록 한 방식이다. 더 나아가 바닥재 아래로 수도관이 지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위치 선정에 제약이 많은 주방과 욕실의 위치와 개수까지 자유롭게 정할 수 있도록 했다. 회사 관계자는 “내년 1월 입주 예정인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래미안 라그란데(이문1재개발)’ 경로당에 우선 적용하고 추후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 비혼족, 딩크족 맞춤형 평면도 등장
포스코이앤씨는 올해 8월 가구 유형과 연령대까지 고려한 미래형 평면 ‘플렉시 폼’을 선보이며 향후 분양 단지에 적용한다고 밝혔다. 가구 인원이 똑같아도 자녀 유무와 연령대에 따라 원하는 공간과 생활 방식이 크게 다르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세분화한 특화 평면은 공개한 것만 20종에 이른다.
2인 가구 중 딩크족(맞벌이 무자녀 가정)을 위한 평면은 부부의 수면 공간을 분리한 게 특징이다. 집 하나에 안방이 두 개인 셈이다. 출퇴근 시간, 업무 패턴이 달라 침실을 따로 쓰는 맞벌이 부부가 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설계다. 부부가 각자 업무를 보거나 취미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개인 서재도 따로 마련했다. 시니어 부부를 위한 평면은 침실뿐만 아니라 거실까지 두 개로 분리해 부부가 독립된 공간에서 쉴 수 있는 선택지를 줬다.
자녀 연령대를 고려한 맞춤형 평면도 있다. 학령기 자녀가 있는 가구에는 소음이 적은 위치에 공부방을 배치하고, 어린 자녀가 있으면 어른들이 돌보기 쉽도록 거실 바로 옆에 놀이방을 두는 식이다. 1인 가구를 위해 집 안에 스파 공간을 두는 설계도 제안했다.
부동산 개발회사인 피데스개발은 독립적인 공간을 중시하는 트렌드와 시니어 세대 증가가 앞으로 주거 공간을 크게 바꿀 것이라고 내다봤다. 피데스개발은 지난해 12월 발표한 ‘2024, 2025년 공간 7대 트렌드’에서 주거 공간 관련 핵심 키워드로 ‘각자 공생룸’을 꼽았다. 생활 패턴이 다른 부부가 취침 시 트윈 침대를 쓰거나 각방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앞으로 이런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결혼하지 않는 싱글 구성원들이 한 집을 공유하는 ‘밍글족’(Mixed Single), 입주 간병인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필요한 고령자 가구 등도 새로운 수요다.
● 2052년 4곳 중 3곳이 1, 2인 가구
건설업계가 새로운 평면 개발에 역량을 쏟는 건 인구 구조의 변화를 ‘정해진 미래’라고 보기 때문이다. 출산율이 급증하지 않는 한 1인 가구와 고령 가구의 증가세는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다. 이런 변화에 맞춘 평면 제공이 경쟁력 확보의 필수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와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2015년만 해도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7.2%였다. 그 비중은 지난해 35.5%까지 올랐고 2037년이면 40%를 넘는다. 2인 가구도 계속 증가해 2052년이면 전체 가구의 76.8%가 ‘2인 이하’가 된다. 28년 뒤에는 가구 4곳 중 1곳만 3인 이상이라는 얘기다. 전통적인 가족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4인 가구 비중은 지난해 13.3%에서 2032년 10% 이하로, 2052년에는 6.7%까지 쪼그라든다.
1인 가구 성격도 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 1인 가구 대다수는 대학생, 사회초년생 등 청년층이다. 실제 올해 1인 가구의 36.7%가 30대 이하였다. 하지만 2052년 1인 가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령대는 80대 이상(23.8%)이 된다.
가구 유형의 변화도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부부와 미혼 자녀로 구성된 가구가 전체 가구의 27.3%로, 자녀 없이 부부 단둘이 사는 가구(17.3%)보다 10%포인트 많다. 2037년이면 두 가구 비중이 역전된다. 송인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그간 공급된 주택 대부분은 3, 4인 가구에 최적화돼 있었다”며 “앞으로 점차 늘어나는 1, 2인 가구에 맞춰 평수를 줄이고 평면도 바꾸는 등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반려인들이 증가하는 추세도 집 구조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봤다. 김진욱 예지학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일본에서는 ‘펫 하우징’이라는 이름으로 현관에서 반려견을 씻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며 “신혼부부 대상으로 현관에 유모차를 둘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등 다양한 평면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이런 평면 혁신이 미분양 위기의 돌파구가 될 거란 기대도 나온다. 이승엽 경주대 건축학과 교수는 “짓기만 해도 무조건 팔리던 시대에는 평면도가 큰 의미가 없었지만, 지금처럼 부동산 경기에 따라 미분양이 대량으로 발생하는 때에는 다양한 건축 요구에 맞춰 대응해야 한다”고 짚었다.
인천=오승준 기자 ohmygod@donga.com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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