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본격적인 '관세 전쟁' 여파가 전세계로 번지는 가운데, 해외 생산 거점을 두고 있는 국내 기업들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특히 국내 양대 가전 업체인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미국 시장을 겨냥해 멕시코와 캐나다에 생산기지를 세웠지만, 관세율이 기존 0%에서 25%로 오르면 현지 생산의 이점이 상쇄될 위기에 직면했다.
다만 극적으로 미 행정부가 시행 하루 전 캐나다, 멕시코에 대한 관세 부과를 한달 간 유예하기로 하면서 대응책 마련을 위한 시간을 벌었다. 양사는 멕시코 공장에서 생산하는 가전제품 물량의 일부를 미국 내 다른 생산시설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는 등 대미 전략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트럼프 리스크 직면한 K가전…생산지 조정 등 대응 구체화
7일 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멕시코와 캐나다산 제품에 대한 25% 관세 부과 조치를 한 달간 유예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일 멕시코산 모든 수입품에 25%, 캐나다는 에너지(10%)를 제외한 모든 수입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이를 4일 0시부터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이번 유예 조치로 업계에선 시간을 벌었다는 판단이다. 다만 미 행정부가 유예 기간 뒤 기존대로 정책을 강행할 수 있어 리스크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라는 평가다.
이에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생산지 조정 시나리오를 구체화하는 한편 미국 내 재고 쌓기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당초 양사는 북미시장 공략를 위해 멕시코에 생산시설을 조성해왔다. 멕시코가 미 현지와 비교해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고 '미국-멕시코-캐나다 자유무역협정(USMCA)' 혜택을 통해 무관세로 완제품을 미국 시장에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USMCA' 앞서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인 2018년 기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개정해 맺은 무역협정이다. 지난 2020년 본격 발효됐으며 협정에 따라 오는 2026년에 협정의 유지·보완 여부 등을 판단하기 위한 '공동 검토'(joint review)를 진행하게 돼 있다.
현재 삼성전자는 멕시코 케레타로와 티후아나에서 가전 공장과 TV 공장을 운영 중이다. 이와 관련, 케레타로 공장에서 생산하는 건조기 등 일부 물량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뉴베리 공장에서 만드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5' 기자간담회에서 "삼성은 (세계에) 공장을 꽤 많이 갖고 있다"며 "어느 한 곳에 집중하지 않고 이를 잘 활용할 것"라고 말했다.
또 박순철 삼성전자 최고재무책임자(CFO) 부사장은 최근 실적발표 후 진행된 컨퍼런스콜에서 "미국 등 전 세계 각지에서 운영하는 생산 역량, 글로벌 공급망 관리능력, AI 기술을 바탕으로 한 제품 경쟁력과 사업 포트폴리오 같은 장점을 살려 트럼프 행정부 출범으로 인한 변화와 리스크에 대응하겠다"고 전했다.
멕시코 레이노사(TV), 몬테레이(냉장고), 라모스(전장) 등 세 곳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는 LG전자도 세탁기와 건조기를 생산하는 미국 테네시주 크라크스빌 공장에 냉장고·TV 등을 함께 만드는 부분도 고려 중이다.
앞서 김창태 LG전자 최고재무책임자(CFO) 부사장은 최근 실적발표 후 진행된 컨퍼런스콜에서 "관세 인상의 수준이 본질적인 공급망 구조의 변화를 필요로 할 경우 업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 팩토리 구축 역량과 이미 성공적으로 운영 중인 미국 내 생산 시설의 운영 노하우를 활용하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선 미국 현지에서 생산 거점을 늘릴 경우 인건비, 환율 등에서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만큼 가격 경쟁력에 타격을 입게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결국 미국 내 판매 가격을 올리거나, 이윤을 줄이는 방안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며 "트럼프 정부 특성상 불확실성도 계속 상존하는 만큼 우리 기업들의 공급망 조정이 시급하다"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1기 '한국 세탁기' 관세…결국 美 소비자 부담 증가
미국 현지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폭탄' 전략이 자국 소비자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특히 1기 행정부 당시 시행한 '한국 세탁기 관세'도 결국 소비자 부담으로 귀결됐다는 평가다.
글로벌 경제학 저널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에 따르면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수입 세탁기에 50%의 관세를 부과하자 소비자 가격은 12%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세탁기 1대당 평균 86달러(약 12만7000원)가 오른 것으로, 세탁기 구입에 미 소비자들이 연간 15억달러(약 2조2069억원)를 추가로 부담한 것으로 조사됐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미 국제무역위원회(ITC)를 통해 연간 120만대를 초과하는 외국산 대형 가정용 세탁기 수입물량에 대해 최대 50% 관세를 추가 부과하는 '세이프가드' 조치를 발동한 바 있다. 이 조치는 바이든 정부 집권기였던 2023년 2월에 종료됐다.
당시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미국 내 현지 생산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했다. 삼성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 3억8000만달러(약 5500억원)를, LG전자는 테네시에 약 2억5000만달러(약 3600억원)를 투자해 안정적인 현지 생산 체제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양사는 미국 시장에서 매출 점유율 1, 2위를 유지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랙라인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생활 가전 시장에서 매출 기준으로 삼성전자가 점유율 21%를 차지하며 1위에 올랐다. 이어서 LG전자(19%), 제너럴일렉트릭(GE·18%), 월풀(15%) 순으로 조사됐다.
이에 이번 추가 관세 조치도 결국 미국 소비자들에게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앞서 블룸버그 은 최근 투자은행 ING의 자료를 인용해 캐나다와 멕시코에 25%, 중국에 10%의 관세를 각각 부과하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으로 인해 최악의 경우에는 미국 국민 1인당 835달러(약 123만원), 4인 기준으로 3242달러(약 477만원) 상당의 경제적 손실을 입을 수 있다고 예측했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도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로 인해 미국인의 소득이 줄어드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내다봤다. 특히 소득 상위 20%는 약 2%, 하위 20%는 약 4% 소득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중산층은 매년 약 1700달러(약 249만원) 손실을 볼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정부도 정인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주재로 지난 3일 정부 세종 청사에서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열고 트럼프 행정부의 이번 관세 조치에 대한 대응 방안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정 본부장은 "정부와 민간이 역량을 결집해 효율적·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미국의 통상·에너지 주요 행정 조치에 대해 부서 내 모든 가용 수단을 동원해 시나리오별로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부는 대미 통상 대응의 컨트롤타워로서 향후 미국의 관세 정책 등 동향을 면밀히 관찰하고 초기 대응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아울러 가용한 모든 협력 채널을 활용해 미국 신정부와 긴밀히 소통하는 등 한국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을 강구할 계획이다.
권용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