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원주의의 정설,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벨라 P400 Dynamic HSE 시승기

기하학적 환원주의, 현대식 산업 디자인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하는 독일 '바우하우스'의 모더니스트들이 지향하던 철학이다. 복잡한 것을 기하학적인 기본 형태로 축약하는 그들의 디자인은 기계적이고 딱딱한 분위기가 특징이었다. 제품 고유의 본질, 내지는 명료함을 품고 있는 환원주의적 디자인은 '모더니즘'의 표본으로 자리 잡게 된다. 흥미롭게도 모더니스트들의 환원주의 디자인은 그들에게 '도덕적 자부심'까지 전하였다고 한다. 제품 본질을 담은 간결한 디자인은 뛰어난 생산성과 경제성으로 산업혁명의 효용을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환원주의 디자인은 최근 자동차 산업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 어떠한 브랜드가 '미래지향성'을 표현하고자 할 때,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하는 모더니스트의 철학은 바우하우스 설립 이래 대략 100여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하지만 자동차 디자인에서의 환원주의가 지니는 의의는 사뭇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자동차의 목적성이 아니라 브랜드의 '정체성'을 명료히 전달하기 위함이 된다. 온갖 부가가치가 얽혀있는 자동차라는 소비재는 그 기능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영역을 만족시켜야 하는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2017년, 재규어 랜드로버는 레인지로버 브랜드의 신규 라인업 '벨라'를 새롭게 출시한 바 있다. '아방가르드 SUV'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호평을 받았던 F-페이스의 플랫폼을 활용한 중형 SUV를 채택하며 브랜드의 새로운 디자인 철학을 공표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리고 2023년 레인지로버 벨라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이 공개된다. 랜드로버는 더욱 환원주의적인 디자인을 추구했다고 설명했으며, 실제 내외관 디자인에서 그와 관련한 변경점을 찾을 수 있었다. UI 운영체제 '피비프로'도 최신 OS를 탑재하면서 확장성과 사용성을 개선한다.

시승 차량은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벨라 P400 Dynamic HSE 트림이다. 벨라의 트림은 P250과 P400으로 구분되며, P400은 직렬 6기통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과 BISG 방식의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채택된다. 모델 등급도 일부 외관 디자인 요소와 옵션 사항에 따라 SE와 HSE 트림으로 구분된다. 시승차량 'HSE'의 경우 SE 기본 옵션에 다크 그레이 색상의 21인치 알로이 휠과 픽셀 LED 헤드 램프가 외장 디자인에 적용되었다. 또한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과 드라이버 어시스트 팩, 에보니 인테리어, 추가로 테크놀로지 팩과 컴포트 팩이 탑재된 차량이다.

레인지로버 벨라의 디자인은 기존 레인지로버 시리즈의 외형을 보다 현대적이고 스포티한 스타일로 재해석한다. 그 수단이 되는 철학이 '환원주의'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페이스리프트 이후 디자인이 크게 변화하지 않았지만, 새롭게 적용된 픽셀 헤드라이트는 명료한 상징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차체를 덮는 형상의 클램셀 보닛과 프레임이 강조되지 않은 라디에이터 그릴, 이러한 디자인 요소들은 컷오프 라인이 자연스레 연결되고 있다. 하나의 곡면에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 공격적인 형상의 범퍼는 쿠페 라이크한 감성을 더한다.

아방가르드 SUV를 지향하는 만큼 프로필이 진취적이다. 전고 대비 전장이 상당히 길고, 긴 휠베이스와 리어 오버행이 역동성을 전달한다. 특히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벨트라인과 낮아지는 루프라인이 긴장감 있는 스탠스를 형성했다. 또 한 가지, 보닛 컷오프 라인과 캐릭터 라인을 하나의 간결한 선으로 연결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이 역시 기하 요소를 최소화하는 '환원주의'를 지향하는 바다. 루프랙과 언더커버까지 검은색으로 꼼꼼히 도장되어 있다. 벤트에 부착된 액세서리나, 플러시 타입 도어 핸들, 21인치 다크 그레이 휠 등 개성은 확실하다.

후면 디자인이다. 서서히 상승하는 바디라인 덕분에 뒷유리 면적이 굉장히 좁아졌다. 그에 따라 테일램프의 포지션도 높아졌고, 슬림 하게 자리 잡은 DRL 그래픽이 강렬함을 증강시킨다. 테일램프 내부의 그래픽까지 정교한 패턴이 각인된 모습이다. 테일램프 가니시에는 레인지로버 엠블럼이 부착되며, 트렁크 리드 좌측에 '벨라' 레터링이 쓰인다. 리어 범퍼의 포지션을 높여 매근한 차체 볼륨을 강조하고, 페이스리프트 모델은 언더 플레이트를 덧대어 강인한 분위기를 더했다.

페이스리프트와 함께 '환원주의'를 강조한 실내 디자인이다. 천연가죽 시트와 투 톤 스티어링 휠, 다양한 고급 소재로 트리밍 한 대시보드가 인상적이다. 인터페이스에는 약 12.3인치로 보이는 TFT 디지털 클러스터와 11.4인치 커브드 센터 스크린이 채택된다. 비상등과 변속기 등 직관성이 필요한 모든 물리 버튼들을 배제하고, PIVI PRO 운영체제에 통합했다. 4존 독립 공조와 마사지 시트, 공기 정화나 3D 사운드 등 넉넉한 편의 장비가 포함된다. 훌륭한 완성도의 UI와 더불어, 스티어링 휠에 많은 버튼이 있기도 하여 '환원주의'에 대한 불편함은 없다.

12개의 스피커가 포함된 400W급 메리디안 오디오로 2열까지 풍부한 음향을 누릴 수 있다. 2열 공간은 적당한 크기의 레그룸과 편안한 포지션의 시트가 마련된다. 독립 공조 등 편의 장비와 개방감이 훌륭한 파노라믹 선루프로 거주성이 개선되었다. 각 시트 하단부에는 전동 리클라이닝 버튼까지 마련했다. 리어 오버행을 최대한 늘린 디자인의 특성상 전장대비 트렁크 공간이 굉장히 길게 구성되어 있다. 그만큼 넉넉한 길이의 러기지 스크린이 구성되며, 매트 하단에는 또 넓은 잔여 공간이 마감되어 있어 활용하기에 좋아 보인다.

P400 HSE 트림에는 3.0L급 직렬 6기통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과 48V BISG가 탑재된다. 최고출력은 400마력, 최대 토크는 56.1Kg.M에 달한다. 재규어 랜드로버에서 직접 생산하는 '인제니움' 유닛으로 기계 마찰을 최소화하여 극강의 효율과 내구성을 확보한 뒤, 정숙하고 부드러운 회전 질감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I6 엔진 특유의 잔잔한 아이들링 감각이 마음에 들었다. 시동을 거는 순간에는 배기 사운드가 증폭되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성능 차량을 타고 있다는 만족감이 든다. 기어 시프터의 고급스러운 그립감이 인상적이었다.

발진감은 부드럽다. 변속기로는 8단 토크컨버터가 채택되어 있고, 기본적으로 후륜 기반 AWD와 전자식 에어 서스펜션이 탑재된다. 그로 인한 공차중량은 2190Kg, 공인 연비는 8.2km/l에 해당한다. 제로백은 5.5초로 P400 사양 자체가 중량 대비 고출력, 다이내믹을 지향한다. 기본적인 컴포트 모드에서는 노면 충격을 적절히 흡수해 주는 편안한 승차감과 여유로운 출력으로 정숙성이 강조된다. 특히 고속에서의 급가속이나 언덕길 등 높은 RPM을 요하는 구간에서도, 큰 부밍 사운드나 울컥거림 없이 가속되는 느낌으로 차고 넘치는 출력을 체감할 수 있었다.

고속에서의 정숙성과 안정성 모두 수준급이다. 특히 선회 안정성이 마음에 든다. 저속에서의 부드러움과는 또 다른 탄탄함이 느껴진다. 스티어링 휠은 기본적으로 묵직하게 세팅되어 있다. 다이내믹 모드를 키게 되면 에어 서스펜션은 본격적으로 롤을 억제하고, 고 RPM 영역에서 날카로운 엔진 사운드를 들려준다. 더욱 즉답적인 펀치력과 거친 변속감이 느껴진다. 본성적으로 변속기는 재미보다 편안함에 초점을 두고 있으나, 인위적으로 조율한 부밍 사운드의 날카롭고 중후한 음색이 은은히 자극을 준다.


기본적으로 무게 중심이 낮게 깔려있고 접지력이 강해 다루기 쉬운 거동 특성이 나타난다. 마치 세단을 타는 것 같았다. 그렇듯 온 로드에서의 편안한 승차감, 때로는 역동적인 피드백을 보여주는 레인지로버 '벨라'는 승용 목적으로 충분한 안락함을 제공한다. 반면 '랜드로버'의 진가는 오프로드에서 나타나는 법이다. 오프로드 모드에서는 지상고가 레벨 2로 높아지며 차체 하부를 보호하고, 지형 상태에 따른 다양한 지형반응 솔루션으로 구동된다. 최대 65cm까지의 도강 능력을 보증하며, 서라운드 뷰 카메라와 수심 감지 기능까지 제공한다.

참고로 서라운드 뷰 카메라는 온로드 모드와 오프로드 모드로 구성된다. 오프로드 모드에서는 전륜 휠을 클로즈업하여 바라볼 수 있는데, 차량 교행이나 좁은 골목에서도 상당히 유용히 사용했다. 파크 어시스트가 적용되어 자동 주차 기능도 활성화할 수 있다. 주행보조 기능 ADAS의 경우 레벨 2.5 수준, 기본적으로는 레인 어시스트 기능이 작동된다. 풍부한 편의 장비들과 다양한 테마로 구성 가능한 디지털 인터페이스, 고급스러움으로 무장한 인테리어 트림은 더욱 만족스러운 이동 경험을 보조했다.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벨라 P400 Dynamic HSE 페이스리프트를 시승했다. 스포티하며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은 향후 오랜 시간까지도 현대적인 SUV 디자인의 정설로 남을 것 같다. 그것만으로 소유욕을 자극하기 다분하다. 더불어 시각과 촉각으로 전해지는 인테리어의 고급스러움, 숙련된 에어 서스펜션 세팅과 여유로운 출력까지 '모던 럭셔리' SUV 그 자체의 품질을 지향했다. '환원주의'는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을 생략한다. 하지만 실제 자동차는 더욱 복잡한 첨단 장비로 구성되어 왔기에, 우리는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법이다.

글/사진: 유현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