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부러지자 기어와서 마셨다는 그 술…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술이라는데 [스프]

심영구 기자 2024. 10. 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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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와신상담을 낳고 루쉰이 마신 ‘샤오싱주’ - 저장 샤오싱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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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박물관 지하 저장고에서 숙성되는 황주 항아리.
기원전 1000여년 양저우(揚州)에서 한 나라가 흥기했다. 하(夏)나라 군주였던 소강의 직계 후손이 세운 월(越)나라였다. 월은 수백 년 뒤 집권세력 간의 분란이 일어나자 도읍지를 콰이지(會稽)로 옮겼다.

콰이지는 콰이지산을 끼고 있는 도시로, 오늘날 저장(浙江)성 샤오싱(紹興)이다. 월이 저장에서 성장했는데 장쑤(江蘇)에서 새 나라가 일어났다.

쑤저우(蘇州)를 도읍지로 한 오(吳)나라였다. 기원전 6세기 오의 6대 왕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를 등용해서 국력을 키웠다. 손무는 훗날 《손자병법》을 쓴 전략가다.
황주박물관에 전시된 구천 동상. 출정 직전에 황주를 마시고 있다.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의 도움 아래 숙적인 초(楚)나라를 평정했고 ‘춘추오패’로 등극했다. 그러나 기원전 496년 월의 구천(勾踐)이 오를 침략해 왔다.

합려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전투 중 중상을 입어 죽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합려는 아들 부차(夫差)를 불러 “월에 꼭 복수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왕위에 오른 부차는 아버지의 유언을 잊지 않았다. 밤마다 장작 위에 누워 자면서 복수를 맹세했다. 또한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조련했다. 기원전 494년 부차는 군사들을 이끌고 월로 진격해 월군을 대패시켰다.
샤오싱박물관에 전시된 월왕 구천이 사용했던 청동검.
구천은 자결하려 했으나, 대부인 범려가 훗날을 도모하자며 극구 말렸다. 구천은 오의 대부인 백비를 몰래 찾아 뇌물을 바친 뒤에 투항했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구천을 당장 죽여야 한다며 강경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뇌물을 받은 백비의 간언을 받아들여, 부차는 구천을 살려주었다. 그 대신에 구천 부부를 쑤저우로 압송해서 3년 동안 고된 노역에 종사시켰다.

구천은 모진 고초와 갖은 수모를 겪은 뒤 가까스로 샤오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쑤저우에서 당했던 치욕을 잊지 않고자, 구천은 허름한 초가집에 살았다.
범려는 자신의 애첩을 직접 데려가서 부차에게 바쳤다.
또한 끼니마다 곰의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맹세했다. 부차가 장작 위에 누워 자고, 구천이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하여 고사성어 ‘와신상담(臥薪嘗膽)’이 유래했다.

이런 구천의 생활이 오자서의 귀에 들어갔다. 오자서는 월이 더 강대해지기 전에 토벌에 나서자고 부차에게 여러 차례 진언했다. 그러나 부차는 구천이 바친 서시(西施)에게 흠뻑 빠져있었다.

서시는 왕소군, 초선, 양귀비와 함께 고대 중국의 4대 미녀로 손꼽힌다. 본래는 범려의 애첩이었으나, 범려가 부차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과감하게 바쳤다.

샤오싱 도심에 조성된 범려 사당에 모셔진 범려상.
서시의 교태에 흠뻑 빠진 간청 덕분에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계속 무시했다. 심지어 칼을 오자서에게 내려 자살토록 했다. 기원전 473년 구천은 5만 대군을 이끌고 오를 침공했다.

밀려드는 월군을 보고나서야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떠올리며 후회했다. 부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를 평정한 구천은 ‘춘추오패’의 마지막 패자로 올라섰다.

그 뒤 범려는 미련 없이 샤오싱을 떠났다. 대부인 문종이 말렸지만,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면서 서시와 함께 사라졌다.
샤오싱의 황주박물관에는 황주를 제조하는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여기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또한 이웃 나라와 길고 질긴 오월전쟁으로 ‘오월동주(吳越同舟)’가 나왔다. 이 같은 오월동주의 역사는 지금도 명성이 자자한 술을 남겼다.

바로 ‘샤오싱주(紹興酒)’다. 샤오싱주는 중국술 중 황주(黃酒)에 속한다. 황주는 갑골문에 기록이 남아있어 포도주, 맥주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술로 손꼽힌다.

황주의 제조법은 간단하다. 쌀을 쪄서 식힌 다음 보리누룩을 섞어 발효하여 빚는다. 이에 따라 짙은 황색을 띠고, 알코올 도수는 15~20도에 불과하다.
황주의 원료가 잘 숙성되는지 확인하는 품주사(品酒師).
술맛이 진하면서 부드럽고 가격이 싸다. 저장에서는 각종 요리 맛을 내는 조미료로 황주를 쓴다. 구천은 출정하기 직전에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샤오싱주를 한 사발씩 마시도록 했다.

사실 샤오싱주는 다른 황주와 제조법에서 차이가 난다. 일반 쌀이 아닌 찹쌀을 쪄서 보리누룩과 발효시킨다. 누룩 외에 신맛이 나는 재료나 감초를 섞는다.

또한 물은 샤오싱 교외에 있는 젠후(鑒湖)에서 물을 떠서 사용한다. 젠후의 물은 미네랄이 풍부하다. 이것을 보통 진흙으로 빚은 큰 항아리에다 3년 이상 숙성시킨다.

루쉰이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마을인 루쉰고리(魯迅故里).
따라서 오래 숙성될수록 술 향기가 좋아지고 빛깔은 암홍색을 띠게 된다. 오늘날 샤오싱은 황주의 본고장으로 손꼽히면서 여러 종류의 황주를 빚고 있다.

샤오싱주를 외국까지 유명하게 만든 이는 단연 루쉰(魯迅)이다. 1919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 《쿵이지(孔乙己)》에 등장한다. 소설은 주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어린 소년의 눈으로 서술하지만, 주인공은 쿵이지다.

쿵이지는 가난하게 살면서 육체노동은 수치로 여겼던 봉건적인 지식인이었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마을 주민이 맡긴 필사로 근근이 생활했다.
《쿵이지》에 등장하는 술집 셴헝주점. 루쉰이 귀향할 때마다 즐겨 찾았다.

돈 몇 푼을 손에 넣으면 곧바로 술집을 찾아 술을 마셨다. 그런데 필사 일도 제대로 해내질 못해 문제만 일으켰다. 결국 일거리가 끊기자 쿵이지는 도둑질에 손댔다.

어느 날 물건을 훔치다 들켜서 매를 맞고 다리가 부러졌다. 며칠 뒤 부러진 다리를 끌고 손으로 기어서 주점을 찾아왔다. 그게 소년이 쿵이지를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루쉰은 《쿵이지》를 통해 유교사상의 도덕적 위선과 과거제도의 폐단을 고발했다. 쿵이지가 즐겨 마셨던 술은 샤오싱주이고, 단골로 찾아갔던 술집은 셴헝(咸亨)주점이다.
셴헝주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루쉰의 자택.

셴헝주점은 루쉰의 고향마을에 실제로 있다. 고향마을에는 루쉰과 동생 저우쭤런(周作人)의 저택, 싼웨이(三味)서옥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싼웨이서옥은 루쉰이 12세부터 17세까지 전통적인 유학교육을 받았던 서당이다. 루쉰은 1881년 샤오싱의 한 권세 높은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성은 저우(周)이고, 갓 태어날 때 이름은 장서우(樟壽)였다.

어릴 때는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며 전통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12세 때 할아버지가 뇌물사건으로 투옥되고 아버지가 병을 앓다 죽으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루쉰과 저우쭤런이 수학했던 싼웨이서옥.
따라서 집 앞 서당에서만 줄곧 공부해야만 했다. 17세에 난징(南京)의 해군 학교에 들어가면서 이름을 수런(樹人)으로 바꾸었다.

1902년 루쉰은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을 갔다. 센다이(仙臺) 의학 학교에 들어갔지만, 강의 중 중국인을 처형하는 영화를 보여주자 격분해서 자퇴했다. 그 뒤 도쿄로 가서 외국 작품을 번역하는 일에 전념했다.

하지만 1909년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가족을 돌보기 위해 귀국했다. 그 뒤 교사로 일하다 1912년에 교육부 관리가 되어 일했고 이듬해 거처를 베이징으로 옮겼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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