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롤렉스보다 좋은 시계

서울문화사 2024. 9. 1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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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렉스는 잘 팔린다. 튼튼하고 유명하니까. 하지만 자신에게만큼은 롤렉스보다 더 좋은 시계가 있을 수 있다. 직업도 취향도 다른 여섯 남자가 소개하는 내게 좋은 시계.

“리베르소를 처음 산 무렵에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대화 첫 10분은 시계 이야기로 시작했다.”

Jaeger-LeCoultre Reverso Classic

박정희 | 맨즈웨어 크리에이터

2016년 아내와 예물로 구입한 시계다. 리베르소 외에도 여러 후보가 있었지만 롤렉스를 고민한 적은 없다. 공식처럼 통하는 ‘예물 시계=롤렉스’를 따르기 싫었고, 나름 리베르소와 뜻깊은 사연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패션 기자 생활을 시작하고 촬영장에서 처음 손으로 만져본 고가 시계가 리베르소였다. 그때는 ‘Jaeger- LeCoultre Reverso’를 제대로 읽을 줄도 몰랐지만, 여전히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리베르소 중에서도 ‘클래식’ 모델을 선택했다. 결혼식을 몇 달 앞두고 참석한 시계 박람회 ‘SIHH’에서 이 모델을 만난 게 인연이 됐다.

좋은 시계는 책에 적힌 각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주가 낯선 단어나 내용을 설명해주듯, 시계도 개인이 지닌 취향과 에피소드를 은밀하게 드러낸다. ‘자기만의 시계’를 찬다는 건 굉장한 커뮤니케이션 기술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인기 모델이 됐지만, 리베르소를 처음 산 무렵에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대화 첫 10분은 시계 이야기로 시작했다. 리베르소의 특별함 중 하나는 다이얼 뒤편에 각인을 새길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 일곱 살인 아들이 스무 살이 되면 ‘Father to Son’을 새겨서 선물할 생각이다.

“내게 좋은 시계는 매일 찰 수 있는 시계다.
포러너 945가 그렇다. 튼튼하고, 오래가고, 합리적이니까.”

Garmin Forerunner 945

안정주 | ‘헤이헤이 스튜디오’ 대표

포러너 945는 매일 차는 시계다. 작년 풀마라톤을 처음 나갔을 때도, 지난달 후지산 백패킹 때도 포러너 945를 찼다. 수면 모니터링 기능도 있어 잘 때도 차고, 튀지 않는 디자인 덕분에 평소 어떤 옷을 입어도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시계를 벗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매일 러닝을 뛰는데, 배터리 지속 시간이 길다. 시계는 2년 전 중고로 구매했다. 이미 출시한 지 3년이 지난 구형 모델이었지만, 막 러닝을 시작하던 시기라 ‘일단 한번 써보자’라는 생각으로 구입했다. 어떤 물건도 한 번 사면 오래 사용하기에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

롤렉스? 여전히 기회만 되면 사고 싶다. 10년 전에는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도 있다. 그때는 매일 러닝을 하지도, 롤렉스가 지금만큼 구하기 어렵지도, 비싸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롤렉스를 품을 여유가 없었다. 그 사이 나도 롤렉스도 바뀌었다. 롤렉스는 웃돈을 얹어야만 살 수 있는 물건이 됐고, 나는 프리미엄 가격이 붙는 물건에는 매력을 못 느낀다. 내게 좋은 시계는 매일 찰 수 있는 시계다. 포러너 945가 그렇다. 튼튼하고, 오래가고, 합리적이니까. 언젠가 롤렉스를 사더라도 중고 포러너 945보다 자주 차지는 않을 거다.

“내게는 보호필름 붙인 롤렉스보다
상처투성이 파네라이가 훨씬 근사하다.”

Panerai Radiomir

안태옥 | 패션 브랜드 ‘스펙테이터’ 대표

롤렉스만 사 모으던 시절이 있었다. 서브마리너, 데이토나, 데이트저스트, 익스플로러 , GMT 마스터 등등. 신제품, 빈티지 할 것 없이 롤렉스를 사 모았다. 사실 파네라이에 빠져든 것도 롤렉스 때문이다. 과거 파네라이가 롤렉스 무브먼트를 얹어 시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럼에도 거부감이 컸다. 롤렉스 시절에는 ‘42mm보다 큰 시계는 시계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구경하는 셈치고 들어가본 파네라이 매장에서 ‘PAM 00797’을 구입해버렸다. 지난 1년간 구입한 파네라이가 20개 이상이다.

오늘 손목에 올린 시계는 파네라이 라디오미르다. ‘어나니마스’라는 별명처럼 다이얼에 어떤 문구도 없다. 남들은 ‘왜 비슷한 시계를 계속 사 모으냐’고 물을 수 있지만 ‘파네리스티’에게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미묘한 차이점을 찾고 그걸 들여다보는 게 파네라이를 차는 즐거움이니까. ‘파네라이 사는 사람은 계속 파네라이만 산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내게 시계는 장난감이다. 시계를 소중히 찰 줄 아는 것도 필요할 테지만, 재미있게 차는 게 더 중요하다. 내게는 보호필름 붙인 롤렉스보다 상처투성이 파네라이가 훨씬 근사하다.

“5억짜리 기계식 시계도 기능만큼은
50만원짜리 애플워치보다 적다.”

Apple Apple Watch Series 7

유영민 | 아시아나 승무원

어림잡아 승무원 중 95%는 스마트워치를 찬다. 안 차는 경우는 두 가지다. 롤렉스 차거나, 카시오 차거나. 승무원은 식사 시간, 휴식 시간, 랜딩 시간을 수시로 체크해야 한다. 그래서 알람 기능은 필수다. 하지만 손님들 앞에서 스마트폰을 꺼낼 수는 없지 않나. 착륙 후에도 애플워치는 여전히 유용하다. 시곗바늘을 돌릴 필요 없이 곧바로 현지 시간을 확인할 수 있고, 12시간 넘게 쌓인 메시지와 부재중 통화도 바로 볼 수 있다. 애플워치는 출근길에 꼭 챙기는 물건이 됐다. 같은 의미로 애플워치는 승무원이 아니었다면 사지 않았을 물건이기도 하다.

나는 무척 시계를 좋아한다. 첫 월급을 타고 산 시계는 애플워치가 아닌 세이코 알피니스트였다. 돈이 없던 대학 시절 가장 갖고 싶은 시계였다. 하지만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기계식 시계는 팔찌나 다름없어졌다. 5억짜리 기계식 시계도 기능만큼은 50만원짜리 애플워치보다 적다. 내게 좋은 시계는 두 가지다. 필요한 시계와 갖고 싶은 시계. 전자는 다재다능한 스마트워치고, 후자는 예쁜 팔찌 같은 시계다. 롤렉스를 산다면 데이트저스트 쥬빌레 브레이슬릿 모델을 사고 싶다. 롤렉스 중에 가장 팔찌처럼 생긴 시계다.

“J12가 데이트저스트보다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J12 차는 사람이 데이트저스트 차는 사람보다 적다.”

Chanel J12

임주엽 | 브랜딩 컴퍼니 ‘Y2K 엔터테인먼트’ 대표

시계 애호가들은 샤넬 J12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패션 시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시계’ 같은 명성도, ‘112년’에 달하는 오랜 역사도 없으니까. 패션 시계야말로 내가 J12를 차는 이유다. 시계는 2년 전 아내가 처음 구입했다. 막상 차보니 크고 무겁다며 내게 건넸다. 샤넬에서 근무 중인 아내가 말하길 J12는 샤넬 옷과 함께할 때 진가를 발휘한다고 한다. 나는 시계 애호가보다 샤넬 애호가에 가깝다. 평소 샤넬 트위드 재킷을 즐겨 입는데 실제로 잘 어울린다. 물론 트위드를 못 입는 한여름에도 일주일에 4일은 J12를 찬다.

J12의 장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소재. 베젤과 브레이슬릿은 세라믹으로 만들었다. 그 덕분에 사소한 생활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두 번째는 희소성. 롤렉스는 좋은 시계지만 특별한 시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J12가 데이트저스트보다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J12 차는 사람이 데이트저스트 차는 사람보다 적다. 사람은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시계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시계를 모시면 그때부터는 몸이 머리를 가누지 못하는 가분수가 된다. 좋은 시계는 내 분수에 맞는 시계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 카시오 시계는 <007> 속 첩보원처럼
저마다의 비밀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Casio WQV-1

윤종후 | 레트로 가젯 편집숍 ‘레몬서울’ 대표

일본 버블경제가 한창이던 1980~90년대. 카시오는 말도 안 되는 시계를 잔뜩 만들었다. 오늘 밤하늘에 어떤 모양의 달이 떠 있는지 알려주는 시계, 친구들의 생일을 기록하고 시간대에 따라 다른 표정을 화면으로 띄우는 시계, 바로미터를 탑재해 현재 기압을 알려주는 시계,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다이얼을 위로 열면 계산기로 변신하는 시계. 그 시절 카시오 시계는 <007> 속 첩보원처럼 저마다의 비밀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재미있는 물건은 대부분 쓸모없는 물건이지 않나. 그 쓸모없음의 매력에 빠져 카시오를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 찬 시계 이름은 WQV-1 카메라 워치다. 12시 방향에 달린 카메라로 촬영하면 작은 화면에 사진이 떠오른다. 사진은 적외선 통신 기능을 이용해 다른 시계로 옮길 수 있다. 30년 전에 이미 아이폰 에어드롭 기능을 갖춘 시계가 나왔다. 좋은 시계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시계라고 생각한다. 물론 롤렉스도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 다만 내게는 너무 먼 시계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먹지 않을 두리안 같은 시계랄까? 내게는 번쩍거리는 롤렉스보다 이 쓸모없는 플라스틱 시계들이 더 매력적이다.

Editor : 주현욱 | Photography : 신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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