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반도체 빅딜, 강제 퇴장의 뼈아픈 기억
LG그룹은 과거 반도체 산업에서 강제 퇴장이라는 뼈아픈 경험을 겪었다. 1999년 4월 22일 현대그룹과 LG그룹 간의 반도체 빅딜이 타결되며, 현대전자가 2조5,600억 원에 LG반도체를 인수했다. 이는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 주도로 추진된 이른바 반도체 빅딜로, 당시 LG는 끝까지 독자 생존을 시도했지만 금융권 압박과 정책 기조를 넘어서지 못했다. 1998년 9월부터 반도체 경영권 다툼이 팽팽하게 이어지며 합병 파경 위기감이 감돌았지만, 결국 1999년 7월 LG그룹은 현대전자에 LG반도체 지분 100%를 넘겨주고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게 됐다. 이후 현대전자는 재편을 거쳐 현재의 SK하이닉스로 성장했다.

카드 대란과 유동성 위기, 반도체 재인수 불발
LG가 반도체 인수전에 나서지 못한 배경에는 그룹 전반의 재무 위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2000년대 초 카드 대란으로 금융 계열사가 큰 타격을 입으며 그룹 전체가 유동성 압박에 직면했고, 생존을 위해 선택과 집중 전략이 불가피했다. LG는 반도체 대신 배터리와 디스플레이 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고 이는 사실상 그룹의 미래를 건 승부수였다. 단기 수익성이 불확실했던 반도체 인수에 나설 여력이 없었고, 내부적으로도 고위험 자산 확대를 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업계에서는 이후 여러 차례 하이닉스 매각 가능성이 거론될 때마다 LG가 재인수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가 나왔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 과정에서 LG는 반도체 산업과 거리를 두게 됐고 시장에서는 이를 보수적 선택으로 평가했다.

배터리와 디스플레이로 체력 회복, 반격 준비
이후 LG는 배터리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며 체력을 회복했다. 전기차 시장 확대와 함께 LG에너지솔루션을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 잡았고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도 기술력을 유지했다. LG디스플레이는 2025년 연간 흑자 전환을 달성한 기세를 이어 2026년에는 설비 투자 규모를 전년 1조 원대 중반에서 2조 원대로 확대하며 성장에 집중한다고 밝혔다. 유기발광다이오드 기술 경쟁력 강화와 미래 준비를 위해 파주사업장과 베트남 후공정 공장에 투자해 모바일 OLED 신기술 적용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배터리와 디스플레이 투자 전략은 LG그룹이 반도체 제조 경쟁에서 밀려난 후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HBM 하이브리드 본더로 반도체 생태계 재진입
최근 LG는 반도체 제조 자체보다는 장비와 공정 기술 등 핵심 인프라 영역으로 재진입 전략을 구체화하고 있다. LG전자는 인하대, 경북테크노파크, 중소 장비 업체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HBM용 하이브리드 본더 개발 국책 과제를 수행하고 있으며, 2028년까지 양산 검증을 완료하고 2030년부터 본격적인 사업화에 나선다는 목표다. 2025년 7월 나노코리아 전시회에서는 반도체 패키징 장비를 공개하며 차세대 HBM 제조에 핵심이 되는 하이브리드 본더 개발 착수를 공식화했다. LG 생기원은 반도체 기판용 레이저 다이렉트 이미징 노광 장비, 반도체 유리기판용 글라스관통전극 레이저 및 검사 장비, HBM용 6면 고속·고정밀 검사 장비 등 첨단 반도체 패키징 장비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으며, 연말부터 단계적으로 장비를 출시할 계획이다.

단순 장비가 아닌 AI 인프라 종합 전략
LG전자는 단순한 장비 개발을 넘어 스마트팩토리 솔루션, 냉난방공조 사업과 결합해 AI 인프라스트럭처 시장 전반을 겨냥한 종합 전략을 병행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의 자동화 시스템, 친환경 공조 설비, 차세대 본더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단일 장비 공급에 머무르지 않고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생산 생태계 전체를 아우르는 사업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조주완 LG전자 CEO는 최근 SNS에서 차세대 HBM 메모리 생산에 필수인 전문 기술에 투자하는 등 AI 인프라를 지원하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확장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조 CEO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최대 가전 전시회 IFA 2025 현장에서도 부품·장비 사업을 LG전자 미래 성장축 중 하나로 꼽았다.

구광모 회장의 복수혈전, 26년 만의 귀환
변화의 동력은 최고경영자 결단에서 비롯되고 있다. 2024년 6월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는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인공지능 반도체 스타트업 텐스토렌트의 짐 켈러 CEO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화제였다. 이는 LG그룹이 반도체 산업으로의 복귀를 본격화하고 있다는 신호탄으로 해석됐다. 단순 생산 기업이 아니라 반도체 산업의 필수 공급망을 장악하는 구조를 목표로 삼고 있으며 중장기적으로 시장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일각에서는 LG가 반도체 사업 부활에 시동을 거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지만, 직접 기판을 만드는 기술이 아닌 만큼 단순 포트폴리오 다각화 일환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온다. 과거의 강제 퇴장 이후 방향을 바꿔 체력을 키운 LG가 새로운 방식으로 반도체 산업에 복귀하는 흐름이 본격화되고 있으며, 이는 26년 만의 복수혈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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