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후배, 내 자리 뺏을까…‘시블링 트라우마’의 비밀

“아이들은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잊고 사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으려 애쓰며 성장할 것이다.”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하지만 승진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은 후배를 바라보며, 영지씨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평소 싹싹하고 감정 표현이 분명한 후배는 회의 중에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말하면서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업무 능력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상사에게 스스럼없이 농담을 건네며 ‘사랑받는 법’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중요한 전체 회의가 끝나고 상사가 후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좋네. 지금처럼만 하면 문제없겠어.” 옆에서 이 말을 들은 영지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상사가 웃으며 후배를 칭찬하는 모습을 보니 내 자리에서 나보다 더 자연스럽게, 잘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빼앗긴 것도 아닌데,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후배를 보면서 영지씨가 가진 감정은 다름 아닌 박탈감이었다.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누구’와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 게다가 ‘나보다 나은’ 타인이 내 자리를 대신할 것 같은 초조함은 왠지 낯설지 않았다. 또래 친구들과의 비교나, 동생과 나를 견주는 것은 영지씨에게 익숙했다. 이처럼 형제·자매뿐 아니라 또래, 동기, 친구 등 나와 닮았지만 내가 아닌 또 다른 존재, 즉 나를 ‘대체’할 수 있는 타자의 출현이 심리적 충격이나 외상으로 경험될 때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시블링 트라우마’로 이해한다.

동생이 태어날 때 걸리는 병
세설리 윌리암스는 아프리카에서 이상한 병을 앓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단백질 결핍으로 인해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가 벗겨지는 ‘콰시오커’(Kwashiorkor)는 일명 ‘동생이 태어날 때 아이가 걸리는 병’이었다. 정신분석가 줄리엣 미첼은 ‘콰시오커’를 언급하며 새로운 동생의 등장으로 인해 사랑의 중심에서 밀려난 아이는 부모의 관심과 함께 정서적 수유 또한 끊긴다고 말했다.
‘시블링 트라우마’는 나의 자리를 위협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타자’의 출현으로 인한 심리적 충격을 의미한다. 부모의 전적인 사랑을 받다가, 어느 순간 나보다 작고 연약한 아기가 등장하면 아이는 혼란을 겪는다. 부모의 관심이 새로운 자녀에게 쏠릴 때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거나 삭제된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맹목적인 사랑을 받다가 더 이상 엄마의 ‘유일한’ 아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사랑의 자리에서 ‘폐위’당하는 듯한 의도치 않은 배제의 경험이 된다. 사랑받던 자리에서 밀려나 ‘사라진 존재’, 혹은 ‘보이지 않는 아이’가 된 것이다. 새로운 동생이 생기는 것은 어머니가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고 도널드 위니캇이 말했다.

외동도 예외는 없다
반대로, ‘뒤늦게’ 태어난 아이는 이미 만들어진 가족 관계 안에서 계속해서 이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따라잡을 수 없는’ 우월한 형제·자매에 대한 열등감과 무력감을 느낄 수 있다. 외동아이도 예외는 아니다. 실제 형제자매는 없지만, 결핍과 부재를 상상 속 형제·자매 혹은 또래에서 채우려는 시도는 또 다른 외상적 감정을 경험하게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하게 경험하는 ‘시블링 트라우마’는 인간이 타인과 관계 맺는 일 자체가 품고 있는, 존재의 불안과 맞닿아 있다.
‘시블링 트라우마’의 심리적 양상
□ 누군가 나보다 더 사랑받는다고 느끼면 견디기 어렵다.
□ 동료나 친구의 성취가 나의 실패처럼 느껴진다.
□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면 내 입지가 좁아질까 불안하거나 위축된다.
□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동료나 형제·자매가 있다.
□ 형제·자매 중 한 명과 연락을 끊었거나 불편한 감정이 있다.
□ 형제·자매 이야기를 하면 죄책감, 분노, 무력감이 뒤섞인다.
3개 이상 해당한다면, 성장 과정에서 형제·자매 관계로부터 ‘시블링 트라우마’를 경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누가 더 인정받는가’라는 질문
줄리엣 미첼은 ‘시블링 트라우마’가 형제자매 간의 경쟁과 질투, 배제, 동일시 등을 통해 개인의 발달 이슈를 넘어 사회적 경쟁과 연대의 무의식적 원형이 된다고 말한다. 사회적 층위에서 거대한 ‘시블링’ 무대가 펼쳐지면 같은 나이, 같은 시기에 비슷한 삶의 단계를 밟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게 된다. ‘같은 나이에 저 사람은 승진했는데…’, ‘같이 시작했는데 왜 나만 뒤처진 것 같을까?’하는 감정이 켜켜이 쌓이고 승진, 연봉, 결혼, 출산 등 인생 과업이 하나의 경쟁 지표가 된다.
‘누가 더 많이 성취했는가’, ‘누가 더 인정받는가’라는 질문은 수평적 관계를 가장해 보이지 않는 서열을 만들어낸다. 또한 ‘동년배 문화’는 같은 세대를 살아가며 느끼는 피로와 좌절, 불안을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버팀목이 되기도 하지만, 다름과 차이에 대한 이해심보다 수평적 경쟁 사회 속에서의 미묘한 긴장감을 강화할 수 있다.

가능성 만큼의 위험성
하지만 이상적이고 완벽한 대안으로서 선택한 관계 역시 상처와 오해, 권력의 미묘한 비대칭 속에서 예기치 못한 위험성을 품고 있음을 잊지 말자. ‘차이’와 ‘어려움’을 견디며 함께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하려는’ 시도에는 새로운 가능성의 크기만큼 불안과 실패의 그림자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볼 질문들
1. 나의 ‘형제자매’ 관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2. ‘가족처럼’, ‘형제처럼’ 맺은 관계에서 불편하거나 위축된 감정을 느낀 적 있나요?
3. 혈연이 아니어도 내 삶에 깊이 스며든 새로운 ‘형제자매’가 있다면 누구인가요?
오늘의 용어: 시블링 트라우마(Sibling Trauma)
‘시블링 트라우마’는 형제자매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한 경쟁과 질투, 비교, 배제, 동맹 등으로 인해 형성된 근원적인 외상을 의미하며, 임상적 진단으로서의 증상이나 병명보다, 개인의 발달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이다. 영국의 정신분석가 줄리엣 미첼은 ‘동기간(Siblings : Sex and Violence)(2003)’에서 프로이트 이후 간과된 형제자매 관계를 정신분석의 새로운 차원으로 제시하며, 부모-자녀의 수직적 관계 못지않게 형제자매의 수평적 관계가 성격 형성과 대인관계 패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저서인 ‘프라트리아키(Fratriarchy)(2023)’에서는 ‘형제(Frater)-지배(Patriarchy)’의 혼성어인 ‘형제·자매의 질서(fratriarchy)’란 개념을 통해 부계적 질서가 아닌, 형제자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과 그로부터 파생되어 사회적으로 이어지는 관계들이 권력과 젠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루었다.
노은정의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은?
개인이 느끼는 일상의 정서와 감정에는 무의식적인 모순과 억압된 기억, 문화적 압박과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뒤섞여 있습니다. 때문에 잘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마음을 돌보는 일은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모호하고 낯선 마음에 하나씩 이름을 붙여보는 노은정의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https://www.hani.co.kr/arti/SERIES/3316?h=s)을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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