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자 브랜드’ 상실한 이재명호, 소극적 임시 봉합 급급
[여의도 톺아보기] 내부 균열 커지는 민주당
특히 민주당 내 최대 의원 모임인 ‘더좋은미래(더미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모임은 비주류 의원들과 달리 이 대표 사퇴 대신 전면적 인사 쇄신을 요구하면서 일견 이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격적인 당내 균열을 앞두고 단계적으로 명분을 축적해 나가는 또 다른 수 싸움의 첫 조치로 볼 수도 있다. 양측의 단기적 봉합이자 하반기 본격적인 힘겨루기를 앞둔 숨고르기인 셈이다. 지금의 민주당을 지배하고 있는 이 같은 정서는 ‘점진주의적 봉합’과 ‘수동적 관리’로 요약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모습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보인 큰 정치(Big Politics)와 도전자 정신 등 기존의 민주당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가치와 어젠다를 선도하고 확장하는 도전자 정치가 아니라 단기적 권력 셈법과 수동적 관리의 정치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다. 애덤 모건이 『1등 브랜드와 싸워 이기는 전략』에서 적시한 것처럼 도전자 브랜드란 직전의 과거와 단절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 대표 지지파와 반대파 모두 직전의 과거와 단절하지 못한 채 소극적·임시방편적 대응에만 급급한 게 현실이다.
이래서는 내년 총선과 차기 대선 전망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더욱이 당내 기류를 좀 더 들여다보면, 윤석열 정부의 실책과 실패를 구원의 동아줄로 삼으려는 분위기가 강한데, 이 또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미래에 당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란 점에서 수동적 정치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선거에서 패한 정당이 혁신한다”는 저명한 정치학 이론을 제시한 다니엘 갤빈 교수도 한국 민주당의 사례를 접하면 이론과 현실의 불일치에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이 대표의 독특한 리더십 기질과도 연관성이 크다. 그동안 민주당은 수많은 부침 속에서도 가치·이슈·태도에선 늘 ‘도전자 브랜드’를 견지해 왔고 이를 바탕으로 자기희생과 모험, 그리고 긴 호흡을 통해 정국을 돌파해 왔다. 김대중 총재는 소수 세력인 재야에 지분 50%를 양보했고 노무현 후보는 불리한 단일화를 수용했다. 이런 도전자 전통이 쌓이고 쌓이면서 지금의 민주당이 만들어졌다.
반면 이 대표는 도전자 유형이라기보다는 ‘방어형’이자 ‘단기 생존 지향형’에 가깝다. 언제나 정국을 선도적으로 돌파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반사체처럼 행동해 왔다. 그런 뒤 조금씩 브랜드 변신을 시도했다. 지난 대선 때 패배가 예감되고 나서야 정치개혁 어젠다를 전면에 내건 게 대표적이다. 최근에도 체포동의안 정국과 전 비서실장 죽음 이후에서야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튜브 방송에 나와 극단적 지지자들을 자제시키고 비명계 중심의 공천 TF를 구성했다. 더미래와 간담회에선 포퓰리스트 대신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다원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점진적으로 변하는 이 대표의 모습에서 질적인 변화를 발견하긴 쉽지 않다. 이는 비주류로 전락한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천아용인’ 카드를 내놓으며 과감한 변신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과도 대비된다. 이 대표가 당내 비주류를 향해 포용적 제스처를 취한 바로 다음날 강경 팬덤은 이전과 똑같이 비주류 비판 행보를 이어가는 모습도 마치 ‘약속 대련’을 하는 모습으로 비칠 뿐이다.
이 대표에 비판적인 진영도 입장만 다를 뿐 점진주의적 전술과 수동성이란 측면에선 묘하게 일치한다. 그러다 보니 당내 비주류 목소리 또한 “설탕물만 계속 찾을래, 아니면 민주당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 한국 정치를 바꿀래”라는 절박한 질문으로 들리기보다는 “그래서 공천은 어떻게 할 거니”라는 지엽적인 요구로 받아들여지기 쉬운 게 현실이다.
이처럼 양측 모두 점진적이면서 현실 안주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사이 민주당도 어느새 외부 환경 변화에 수동적인 종속변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장 이 대표의 선거법 위반 여부 판결과 검찰의 추가 구속영장 청구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다. 검찰이 기소를 늦추면 늦추는 대로 민주당은 총선 직전까지 ‘사법 리스크’ 속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런 위기 상황에서 소극적 대응을 지속했다가는 실기할 가능성만 키우기 쉽다. 위기감이 한껏 고조된 뒤에야 부랴부랴 내놓는 비상 대책은 효과가 크게 반감될 수밖에 없다.
민주당 내부에서 시야를 더 넓혀 야권 전체를 봐도 이 같은 점진주의와 수동성은 이미 만연해 있는 상태다. 과거 ‘혁신과 통합’이란 외부 시민정치 운동의 동력을 활용해 민주당을 혁신하고 확장했던 모델도 이젠 수명을 다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으로 양극화된 정서적 내전의 틈바구니에서 이들을 긴장시킬 제3의 세력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거대 양당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 중도나 진보 스펙트럼 속에서 제3의 대안 세력이 출현할 토대가 갖춰지기 마련이다. 자유당을 대체하고 양당의 한 축을 차지한 영국 노동당 모델이나 ‘급진적 중도’를 내걸며 단숨에 제1당이 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앙 마르슈’ 모델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권엔 이런 가능성이 지닌 정당이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정의당도 대안 세력으로 떠오르기엔 힘이 부쳐 보인다.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기존 정치권을 개혁하려는 움직임도 아직은 세가 부족한 실정이다. 범야권 전체가 점진적·수동적 교착상태의 늪에 빠져 있는 형국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누가 도전자 정신을 다시 앞세우며 새로운 캠페인에 나설 수 있을 것인가. 그 시작은 결국 누가 먼저 직전의 과거와 확실히 단절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민주당과 범야권에 주어진 시간은 결코 많지 않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