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주운 카드 썼다가 붙잡힌 노인…75년 ‘유령 인생’ 벗어난 사연
편의점서 10만원 쓰고 검찰 송치
신원 회복 위해 노력한 검사 덕에
주민번호 받았지만 암으로 숨져
지난 1월 길거리에 떨어진 신용카드를 주워 편의점에서 10만원어치 물건을 산 A(75)씨가 사기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기록을 받은 수원지검 성남지청 형사2부 조진희 검사는 A씨가 이름과 주소만 있을 뿐,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검사 생활 5년 만에 처음으로 ‘신원불상’ 피의자를 만난 것이다.
조 검사는 A씨를 검찰청으로 불러 면담을 했다. 깔끔한 옷차림으로 출석한 A씨는 조 검사에게 자신이 살아온 삶을 털어놨다. 1949년 충북 괴산군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전국 각지를 떠돌며 살아 왔다고 했다. 1986년 경기 성남시에 자리를 잡고 살았지만, 사실혼 관계의 아내가 받는 기초생활수급비로 겨우 생계를 꾸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A씨는 “평생 주민등록증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며 “주민등록번호도 모른다”고 했다. 주민등록번호가 없다 보니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치과를 못 가 이가 여러 개 빠진 채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A씨는 조 검사에게 “얼마 전부터는 배가 아픈데 치료비가 걱정돼 병원도 못 가고 있다”고 했다.
조 검사는 A씨의 처벌보다 ‘신원 회복’이 우선이라고 판단해 관할 주민센터 등 유관 기관에 지원을 요청했다. 겨우 A씨의 호적과 가족관계등록부를 찾았지만, 행정기관 어디에도 A씨의 주민등록 뒤 번호 7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A씨의 치료가 급하다고 판단한 조 검사는 행정안전부 측과 협의해 A씨 친족의 신원 보증서와 이를 입증할 객관적 증거 확보에 나섰다.
조 검사는 A씨가 기억하는 친척의 이름과 본적지를 중심으로 주민 조회를 실시해 6촌 관계의 친척 B씨를 찾아냈다. 대검찰청 과학수사부(부장 허정 검사장)는 A씨와 B씨의 구강상피세포, 혈액, 모발 등을 비교 검사해 약 한 달 뒤 “두 사람이 동일 부계로 추정되며, 7촌 이내의 친족 관계로 판단된다”는 결과를 행정 당국에 통보했다.
이런 신원 회복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A씨의 복통은 갈수록 심해졌고,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 A씨는 지난 6월 결국 숨졌다. 행정 당국이 A씨에게 새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한 직후였다. 조 검사는 “주민번호를 받고 싶다는 A씨의 소원은 이뤄졌지만, 치료받지 못하고 사망해 실질적인 도움을 못 드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조 검사는 A씨 사건을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했다.
차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국민의 기본권 보호는 가장 중요한 검찰의 책무 중 하나”라며 “향후 신원불상자를 수사할 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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