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휴에 여유롭게 읽기 좋은 책 5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봄에 아이가 태어나 여름부터 6개월짜리 육아휴직 중이다.
‘연휴에 읽기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을 말하는 걸까. 고민 끝에 다섯 권을 골랐다. 평소 바쁠 때 한 호흡으로 쭉 읽기 힘든 두꺼운 장편소설, 연휴에도 책을 읽는 책덕후 맞춤 소설, 하루키가 궁금한데 소설은 왠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위한 에세이 모음집, 휴일에 뭐라도 배우고 싶은 사람을 위한 클래식 입문서, 그리고 아무래도 휴일엔 만화.
[1]
<둠즈데이북>
“그런데 교수님, 중세 사람들은 접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아세요?”
직장이든 학교든 다닐 곳이 있을 땐, 일이든 공부든 할 일이 있을 땐 두꺼운 책이 부담스럽다. 출퇴근길 가방 안에 넣어 다니기엔 무겁다. 자기 전에 10~20분씩 쪼개 읽자면 몇 달이 걸린다. 결국 조금 읽다 멈추고, 내용이 기억 안 나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길 반복하다 절반도 못 읽고 포기하고 만다. 그런 점에서 명절 연휴는 기회다. 두껍다는 이유로 미뤄뒀던 책이 있다면 펼쳐보시길.
나도 하나 추천한다. 두껍고 심지어 두 권짜리지만 뒹굴거릴 시간만 확보되면 한 호흡에 읽어버릴 수 있는 소설 <둠즈데이북>이다. 때는 2054년,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 전공자 키브린의 졸업 과제는 ‘답사’다. 낮엔 유적지 돌고 밤엔 술 마시는 그런 답사는 당연히 아니고… 본인이 연구한 과거 특정 시점으로의 시간여행! 근데 이거 말이 좋아 여행이지, 논문 쓰는 것보다 더 고되다. 떠나기 전에 말투, 의복 등 그곳의 문화를 속성으로 배워야 한다. 게다가 키브린이 떠날 과거는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고 있던 14세기. 졸업 한 번 하려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키브린은 과연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SF를 많이 읽어보지 않았다면 이 책으로 코니 윌리스에 입문하는 것도 좋겠다. 한때 코니 윌리스를 두고 인터넷에서 이런 음모론이 돌았다. “코니 윌리스가 사실 두 명이래. 한 명은 ‘웃기는 이야기’를 쓰고, 다른 한 명은 ‘슬픈 이야기’를 쓴대.” 이 음모론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둠즈데이북>이 웃기다가 슬프고 슬프다가 웃긴 이야기임은 틀림없다.
- <둠즈데이북> 1,2 | 코니 윌리스 | 아작 | 2만 9,600원
[2]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어디선가 빌려온 것 같은 결론을 들이대며 호언장담하지 않는 것.”
몇 주째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록색 표지가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 연휴에 읽으려고 미리 사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하루키를 좋아해 신작을 기다려 왔다면 이번에 출간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면 된다. 하지만 아직 하루키를 읽어본 적 없거나 왠지 모를 거부감 때문에 외면해왔다면, 그런데 다들 하루키 하루키 하니 이번 기회에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신작 소설 대신 <잡문집>을 추천한다.
나도 이 책으로 하루키를 시작했다. 엄밀히 말해 가장 먼저 읽은 책은 아니다. 고등학교 때 그 유명한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를 읽으며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 후로 서점에서 하루키를 봐도 못 본 척했다.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잡지 에디터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당시 편집장으로부터 <잡문집>을 선물 받았다. 제목처럼 리뷰, 수상소감, 인사말, 남이 쓴 책의 서문이나 해설 등 온갖 글을 모은 책이다. 이런저런 곳에서 청탁받아 쓴 ‘잡문’을 읽으면서 하루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는지,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지 조금 알게 됐다. 비로소 하루키를 좋아하게 됐다.
내가 가진 책 맨 앞에 하루키의 문장이 손 글씨로 적혀 있다. 편집장이 선물할 때 써주셨다. 당시 신입 에디터가 네 명이었는데 각자의 <잡문집>엔 적힌 문장이 다 달랐다. 편집장은 문장 끝에 한 줄을 덧붙였다. “기명균 에디터도 남과 다른 말로 이야기하시길. 저도 그렇게 할게요.” 남과 다른 말로 이야기한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지만, 난 이 책이 있어서 최소한 그 어려움을 까먹지는 않는다. 당신도 한 번 남과 다른 말로 이야기해 보시길. 나도 그렇게 할 테니.
-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 무라카미 하루키 | 비채 | 1만 5,800원
[3]
<섬에 있는 서점>
“우리는 많은 책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때로 실망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이따금 환호할 수도 있다.”
사실 책이 아니더라도 여행, 운동, 게임, 친구들과의 술 약속 등 6일짜리 긴 연휴에 할 수 있는 게 참 많을 텐데… 굳이 추석 연휴에도 책을 읽겠다고 이 기사를 클릭했다면, 모르긴 몰라도 책을 나만큼 좋아할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내 취향의 책을 마음 놓고 추천한다. 바로 <섬에 있는 서점>이다.
서점 주인 에이제이는 질문 하나로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고 믿는 남자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입니까?” 책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도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의 빈자리가 크다.
한편 출판사 영업사원 어밀리아는 지난주 소개팅 상대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뭐예요?” <회계원리 제2권>이라는 대답과 함께 소개팅은 끝나고, 어밀리아는 앨리스 섬의 아일랜드 서점을 찾는다. 올겨울 신간을 홍보하기 위해서다. ‘서점 주인이 좀 독특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뭐 별일 없겠지.’ 그렇게 두 사람이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소설의 사건은 대부분 책 때문에 벌어지고, 또 다른 책 덕분에 해결된다. 페이지마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책 얘기로 부족했는지, 챕터 제목은 전부 유명 소설에서 따왔다. 책 좋아하는 사람에겐 선물 같은 책이다. 그리고 끝까지 읽고 나면 평소 믿던, 아니 믿고 싶던 말에 힘이 실리는 기분이다. 그래, 책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을 거야. (참고로 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몇 페이지 읽다가 다음날 바로 반납했다. 어차피 소장할 책, 새 책으로 읽고 싶어서!)
- <섬에 있는 서점> | 개브리얼 제빈 | 루페 | 1만 4,800원
[4]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그럼 굳이 클래식을 왜 듣는 건가요?”
휴일에도 의미 있는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책도 마찬가지. 재미는 기본이고 다 읽고 나서 뭔가 남길 바라는 그 마음, 이해한다. 모범생 마인드를 탑재한 당신을 위해 클래스를 하나 추천한다.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다.
‘음악은 귀로 듣고 느끼는 거지, 글로 음악을 배우는 게 가능한가?’ 맞는 말씀이긴 한데 클래식만큼은 귀로 아무리 들어도 좀처럼 그 ‘느낌’이 안 오더라. (잠은 잘 오더라) 게임, 축구, 케이팝 등 잘 몰라도 하나씩 접하면서 알아가는 취미도 많지만, 진입장벽이 높으면 접근 자체가 쉽지 않다. 그래서 수업이 필요하다.
수업은 수업인데, 대형강의가 아니라 과외를 받는 느낌이다. 선생 역할의 저자가 말하는 사이사이 학생 역할을 맡은 가상의 인물이 딴지를 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클래식은 일부러 복잡하게 만든 어려운 음악이에요.” “음악을 일부러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있나요?” “한 번에 파악될 정도로 쉬우면 재미가 없다고 여긴 거죠.” 학교에서도 이런 ‘딴지’가 가능했다면 수업이 훨씬 더 재밌었을 텐데…
물론 ‘귀로 듣고 느끼는’ 재미도 놓치지 않는다. QR코드를 통해 본문에 언급되는 곡을 직접 들어볼 수도 있다. <모차르트 교향곡 25번 G단조>라고만 하면 생소하지만, 곡을 들어보면 바로 느낌이 온다. “아, 이 노래!” 그렇게 작곡가와 음악을 하나씩 연결하다 보면 클래식이라는 드넓은 세계도 조금은 만만해 보인다. 7권까지 출간되어 있지만, 이번 추석 연휴엔 일단 1권 모차르트부터!
-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1 | 민은기 | 사회평론 | 1만 8,000원
[5]
<요나단의 목소리>
“그 애를 사랑하는 동안 계속해서 나는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나는 평생 그 마음을 그리워한다.”
하루키도 좋고 클래식도 좋지만 휴일에 만화가 빠질 수 없다. 최근 1년 사이 본 만화 중 가장 좋았던 <요나단의 목소리>를 추천한다.
읽기 전부터 기대가 컸다. 2023 부천만화대상 신인만화상을 받았고 연재 후 단행본 펀딩이 열렸을 때 목표액의 1,740%를 달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만화를 이끌어 온 작가들이 입을 모아 극찬했다. 아니, 사랑을 고백했다.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이대로 완전해진 이야기를 만났다(권교정).” “이렇게 멋진 작품들이 있는 이런 세계관에 내가 살고 있다니 진짜 행복합니다(천계영).”
배경은 교회 재단에서 설립한 고등학교다. 반강제로 참석해야 하는 채플(예배) 시간에는 성가대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주인공은 기숙사 2인실을 같이 쓰는 선우와 의영이다. 선우는 성가대원 중에서도 특히 노래를 잘하는 솔리스트고, 의영은 그런 선우의 노래를 좋아한다. 둘은 ‘룸메이트’에서 ‘친구’가 된다.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또 다른 주인공은 다윗과 주영이다. 둘은 선우의 중학교 친구다. 목사 부모의 영향으로 선우는 교회와 찬송가에 둘러싸여 살았다. 우연히 친구가 된 다윗, 주영과 어울리며 교회 밖의 세상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랑을 알게 된다. 아찔하게 확 커지는, 그래서 덜컥 겁나는 마음을 만화는 조곤조곤 보여준다.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림체도 색감도, 인물들의 대사도 무덤덤하기만 한데, 난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저리 소중한 마음이라면, 웬만하면 좀 지켜졌으면 하는데 아무래도 그러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만화 속 대사처럼, 나도 따라 묻게 된다. “너의 하나님은 왜 그렇게 가혹해?”
- <요나단의 목소리> 1~3권 | 정해나 | 놀 | 5만 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