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대통령' 그려도 무사할 자유

강희철 2022. 9. 25.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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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아침햇발]
지난 1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주변에 윤석열 대통령을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표현한 포스터를 붙이고 있는 이하씨. 이하씨 페이스북 갈무리

강희철 |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얼마 전 ‘벌거벗은 임금님’이 됐다.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의 앞섶을 망나니처럼 풀어헤친 채 웃고 있다. 와이존에는 금지를 뜻하는 붉은 픽토그램 아래 부인 김건희 여사의 얼굴 캐리커처가 선명하다. 며칠 전 이런 그림이 용산 대통령실 주변에 나붙어 논란이 됐다.

의도는 명확하다. 포스터를 그려 붙인 이하라는 이는 유튜브 채널 <서울의 소리>에 대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서 불행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한테 청량감을 주고 싶었다.”

사이다 맛이라고 환호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스럽다며 얼굴을 찌푸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각자가 호오의 감정을 느끼는 선에서 그쳤다면 더 이상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런데 경찰이 득달같이 달려들면서 차원이 달라졌다. 이젠 사법적 판단의 영역으로 끌려들어가기 직전이다. 이런 일에 늘 그렇듯 경찰은 신속하게 내사 사실을 공표하고, 벌써부터 ‘옥외광고물관리법 위반’을 들먹이고 있다.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은 이씨의 처벌 여부로 옮겨갔다. 하지만 진짜 시험대에 오른 사람은 윤 대통령이다.

과거 대통령들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처벌이 이어졌다. 경찰이 일차로 훑어 송치하면 검찰은 적당한 죄목을 붙여 기소했다. “법원에 가서 무죄가 나더라도 일단 기소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전직 검찰총장)이 이런 경우다. 최고 권력자가 조롱을 당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랫것’들이 못 본 척 좌시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과거 권위주의 시대처럼 ‘국가원수모독죄’라는 만능 치트키가 있는 것도 아니니 결국엔 옥외광고물관리법이나 경범죄처벌법을 동원해 기어코 ‘불경의 대죄’를 물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거나 그러지 말라고 말린 대통령은 찾아볼 수 없다. 이하라는 이름이 익숙한 것도 실은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비슷한 활동으로 유죄를 받은 전력이 있어서다. ‘인권 대통령’을 자처한 문재인 전 대통령도 불관용의 쳇바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는 대선 때 말했다. “(납득할 수 없는 비판, 비난도) 참아야죠. 그렇게 권력자를 비판함으로써 국민들이 불만을 해소할 수 있고, 위안이 된다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닙니까.”

집권 이후엔 달랐다. 한 대학생은 홍콩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던 2019년 11월 완전 개방돼 있는 단국대 천안캠퍼스에 들어가 문 대통령의 소극적 대중 외교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였다가 건조물 침입 혐의로 기소됐다. 언론 보도로 시끄러웠던 이 사건을 대통령이 몰랐을까. 그 학생은 올해 5월에야 무죄가 확정됐다. 문 전 대통령은 자신을 비방하는 전단지를 뿌린 30대 김아무개씨를 모욕 혐의로 직접 고소하는 진기록도 남겼다. 김씨가 휴대전화를 압수당하며 강도 높은 수사를 받고 있던 2020년 8월, 문 대통령은 교계 지도자 모임에서 “대통령을 모욕하는 정도는 표현의 범주로 허용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다 2021년 5월 고소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논란이 커지자 그제야 고소를 취소했다.

이제는 윤 대통령 차례다.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전임자들을 반면교사로 삼을 것인가. 경찰의 처분은 대통령의 심기에 달렸다. 한데, 이번 유엔 연설에서 21번, 취임사에서 35번, 광복절 경축사에서 33번, 도합 89번이나 ‘자유’를 예찬한 윤 대통령이지만, 정작 다른 모든 자유의 바탕이 되는 표현의 자유에 관해서는 언급이 드물고 상황 따라 편차도 크다. “표현의 자유는 정치적 자유의 전제이고, 강력하게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지난 2월18일 페이스북)이라고 밝힌 적도 있지만, 그 무렵 김 여사 비하 논란을 부른 ‘마이클 잭슨을 닮은 여인’이란 노래에 대해선 “표현의 자유도 상식의 선은 지켜야 한다”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 바 있다. 이하의 이번 그림에는 마침 김 여사가 등장한다.

윤 대통령이 좋아하는 미국에선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모욕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오바마는 영화 <배트맨>의 백인 악당 ‘조커’로, 트럼프는 히틀러로 묘사당한 적이 있다. 그래도 호오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질 뿐 수사로 이어지진 않는다. “대통령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거나, 옳든 그르든 대통령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비애국적이며 맹종적일 뿐 아니라 국민에게 도덕적으로 반역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런저런 공격에 진저리를 낼 만한 미국 대통령(시어도어 루스벨트)이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이다. 무려 116년 전 노벨상 수상 소감을 굳이 인용해야 하는 우리 현실이 딱하고 민망하다.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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