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 콘손체육관 정오. 단체전 특유의 공기부터가 달랐다. 개인전처럼 “내가 이기면 끝”이 아니라, 한 경기의 길이와 분위기가 뒤 경기를 전부 흔들어버리는 무대. 그래서 한국이 대만전 1단식에 안세영(세계 1위)을 넣었다는 건 “그냥 에이스를 출전시켰다”가 아니라, 오늘 경기를 승부가 아니라 운영으로 바꾸겠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선언은 40분도 채 안 돼 결과로 증명됐다. 안세영이 대만의 치우 핀 치안(세계 14위)을 21-10, 21-13, 게임 스코어 2-0으로 정리했다.

스코어만 보면 심심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체전에서 1단식의 2-0은 점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단체전은 결국 “몇 경기 이겼냐”로 끝나지만, 그 과정에서 체력이 어떻게 깎였고, 감정선이 어디서 무너졌는지까지 함께 기록된다. 1단식이 늘어지면 복식은 들어가기 전부터 숨이 가빠진다. 2단식과 3단식은 ‘쫓기는 경기’가 되고, 감독은 카드가 줄어든다. 반대로 1단식이 짧고 단단하면, 그날의 흐름은 ‘불안’에서 ‘관리’로 넘어간다. 오늘 안세영의 2-0은 한국이 가장 먼저 “시간”을 벌었다는 뜻이었다.
경기 내용은 더 명확했다. 초반에 2-5로 잠깐 밀릴 때만 해도 “몸이 덜 풀렸나?” 싶은 장면이 있었다. 단체전 첫 출전은 개인전 첫 경기와 다르다. 상대가 누구든 첫 라켓을 잡는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가고, 경기장 소리의 결이 달라진다. 그런데 안세영은 그 짧은 흔들림을 ‘흥분’으로 덮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상대의 발을 묶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드롭샷 파티’가 시작됐다.

안세영의 드롭샷은 단순한 기술 자랑이 아니다. 누구나 드롭을 칠 수 있지만, “언제” 떨어뜨리느냐가 다르다. 상대가 뒤로 한 걸음 빠져 있을 때, 혹은 앞으로 들어오려고 마음먹은 그 찰나에 툭 떨어뜨리면, 상대의 다리는 멈추고 머리는 복잡해진다. 오늘 치우 핀 치안이 딱 그 함정에 걸렸다. 안세영은 코트 곳곳에 공을 ‘뚝’ 떨어뜨리면서 상대의 리듬을 갈라놓았다. 드롭을 맞으면 다음 샷을 더 조심하게 되고, 다음 샷을 조심하면 공격이 늦어진다. 공격이 늦어지면 결국 수비가 된다. 단체전 1단식에서 가장 무서운 건, 이런 식으로 “상대가 스스로 소심해지는 과정”이 쌓이는 것이다. 안세영은 그 과정을 너무 쉽게 만들었다.
그래서 1게임 21-10이 단순한 점수 차가 아니다. 상대에게 “오늘 네가 할 수 있는 최대치가 여기까지일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아주 빨리 꽂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2게임 21-13은 더 무섭다. 상대가 마음을 다잡고 ‘한 번은 흔들어보자’고 들어오는 타이밍을 허용하되, 역전의 문턱까지는 절대 열어주지 않았다. 이게 에이스의 경기다. 크게 터뜨릴 때는 터뜨리되, 상대가 살아나려는 순간에는 숨통을 딱 잡는다. 마지막에 안세영이 포효한 장면은, 단체전에서 흔히 보는 “내가 이겼다”가 아니라 “우리 흐름을 내가 잠갔다”는 감정에 가까워 보였다.

이 승리가 특히 반가운 이유는, 한국이 이번 대회에서 노리는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상 첫 아시아단체선수권 우승.” 말은 쉬운데, 단체전 우승은 개인전 우승보다 훨씬 조건이 많다. 에이스가 반드시 이겨야 하고, 복식이 기대만큼 버텨줘야 하고, 2단식이나 3단식에서 변수가 터져도 수습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 결국 단체전 우승 팀은 화려한 한 명이 아니라, 팀 전체의 톱니가 고르게 맞물린 팀이다. 그런데 그 톱니를 가장 빨리 맞물리게 하는 존재가 에이스다. 안세영이 단체전에서 “우승 청부사”라는 말까지 듣는 이유는, 경기력뿐 아니라 경기의 길이와 분위기까지 계산해버리는 습관 때문이다.
대만전이 더 중요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조별리그 판도다. 한국과 대만은 이미 8강을 확정해 놓은 상황이었고, 사실상 ‘조 1위 결정전’이었다. 단체전 토너먼트는 대진 한 번이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같은 강팀들이 어느 정도 전력을 조절해서 들어왔다고 해도, 8강부터 그들을 만나는 건 껄끄럽다. 조 1위로 올라가면 길이 조금 더 편해지고, 조 2위로 올라가면 갑자기 산이 커진다. 그래서 안세영 출전은 “체력 아껴라”보다 “대진부터 유리하게 잡아라”에 가깝다. 큰 목표를 세울수록, 작은 단계에서 손해를 줄이는 게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라인업이 꽤 흥미롭다. 특히 1복식에 백하나-김혜정 조를 전격 가동한 부분이 그렇다. 기존엔 이소희-백하나, 공희용-김혜정이 ‘원투펀치’처럼 굳어 있었는데, 여기서 한 명씩 떼어 새 조합을 만든 건 메시지가 분명하다. 단체전은 “한 조합만 잘해서”는 우승이 어렵다. 상황에 따라 조합을 바꿔 상대 스타일을 흔들어야 하고, 누군가 컨디션이 떨어졌을 때 대체 카드가 있어야 한다. 새로운 조합을 실전에 넣는 건 위험해 보일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감독은 이 대회에서 운영 폭을 넓히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운영 폭은 안세영이 1단식을 짧게 끝내줄 때 가장 빛난다. 1단식이 길어졌다면 새로운 조합은 더 부담을 안고 들어갔을 것이다. 안세영의 ‘짧고 단단한 2-0’이 바로 그 부담을 덜어줬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건, 요즘 안세영의 연승 흐름이 주는 심리적 효과다. 연승은 늘 양날의 검이다. 이기고 있으니 자신감이 붙지만, 동시에 “언젠가 끊긴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그런데 오늘 경기를 보면, 안세영은 연승을 ‘방어’하려고 뛰는 게 아니라, 연승을 ‘도구’로 쓰고 있다. 상대가 이미 기가 죽어 있을 때, 더 강하게 몰아붙여서 초반에 흐름을 뺏고, 그 흐름을 팀 전체에 퍼뜨린다. 단체전에서 이건 엄청난 장점이다. 1단식이 상대를 압도하면, 복식 선수들은 몸이 가벼워진다. 반대로 1단식이 흔들리면 복식은 시작부터 다리가 무거워진다. 오늘 한국이 얻은 건 1승이 아니라, “가벼운 다리”였다.
물론 단체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2단식, 3단식은 언제든 접전이 될 수 있고, 복식도 한 번 꼬이면 길게 늘어진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 경기의 첫 장면은 분명했다. 안세영이 1단식을 잠가버린 순간, 한국은 대만전을 “승부”가 아니라 “운영”으로 바꿔놨다. 단체전에서 가장 이상적인 출발이다. 그리고 이런 출발이 쌓이면, ‘사상 첫 우승’이라는 말도 더 이상 허공에 떠 있지 않게 된다. 결국 우승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이렇게 한 경기씩 분위기를 잠그는 작업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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