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01 / 정원의 격은 곧 주인의 격
인테리어에 비해 ‘익스테리어’는 전문가에게도 아직 낯설어 보인다. 먼저 익스테리어라는 단어의 사전적 해석을 보자.
인테리어라고 하니 괜히 아웃테리어를 떠올릴 법하지만(?) 의외로 익스테리어는 아직 규범 표기가 미확정이다.
글 자료 정정수(환경조형연구원 원장)
규칙이 없는 익스테리어 디자인
‘온 세상의 인위적인 것은 모두 다 디자인으로 포장돼 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 디자인하면 학창 시절에 미술에 소질이 없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먼저 생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디자인은 미술에 포함되는 한 분야이므로 편한 마음으로 생각하면 쉽다.
우리는 상품을 고를 때 디자인을 생각한다. 이처럼 디자인은 늘 우리 곁에 있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렵지 디자인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공기 중에는 산소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어 공기가 흔하다는 생각에 그 고마움을 모르고 산다. 디자인이 우리의 삶 속에 넓고 깊게 스며 있어 오히려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살게 된다.
현대를 사는 우리 사회와 세계는 점점 더 차원이 높은 디자인으로 고부가가치의 격차를 넓혀가고 있다. 이 격차를 줄이려면 작게는 각자의 삶에서 또는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디자인의 필요성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는 차이가 있다. 빈부격차란 말도 있지만 빈에도 격차가 있고 부에도 또한 격차가 따로 있다. 맨 아래부터 저 높은 데까지 디자인이 깊숙이 스며 있는 것처럼 디자인의 격차 또한 천차만별이다. 하물며 명품보다도 그 위의 명품도 있어서 이름조차 생소한 브랜드를 가진 디자인이 존재하는 것도 현실이다.
정원도 마찬가지로 격차가 있다. 값비싼 나무가 꼭 필요하다면 정원 구성이 중요하겠지만 정원의 격을 높이는 방법으로 값비싼 재료들을 선택하기보다는 집과 정원을 조화롭게 만들 수도 있다. 익스테리어의 격 있는 디자인이 훌륭하게 배치됐다면 정원과 함께 주인의 격도 높게 평가될 것으로 본다.
안팎을 잇는 소통 장치 ‘대문’
단독주택에서 익스테리어의 시작인 대문은 건축 안에 포함돼 있거나 현관문처럼 외벽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닌 조경공간 속에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문은 건물과 자연의 경계로서 기능을 갖춰야 하기에 동시에 자연과 소통하는 공간을 여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대문을 만들 때 사용되는 자재는 조경자재가 아닌 건축자재지만 위치로 보면 조경과 더 가깝다. 그런 이유로 기술적 디자인의 역할을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익스테리어의 영역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문에서부터 현관까지는 마치 익스테리어의 꼭짓점과 같아서 이 공간은 주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익스테리어의 과정에서 설계자는 의뢰인과 잦은 소통을 통해 많은 것을 결정해야 한다. 과녁을 정확하게 맞혔다 해도 서쪽을 가리키는데 남쪽에 있는 과녁을 맞혔다면 많이 빗나간 것이다. 즉,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활을 쏴야 한다는 말이다.
이때 의견을 더하자면 디자인에 곡선을 추가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홀로 조화로울 수 없듯이 직선과 곡선의 만남은 긴장과 이완의 조화를 조절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í 1852~1926)는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라고 공감이 가는 말을 했다. 가우디의 말을 떠나서라도 곡선은 디자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요소다.
필자가 디자인하는 문은 소통을 기본으로 한다. 물리적으로는 닫혀 있지만 그 경계가 시각적으로는 열려 있어야 좋다고 생각을 한다. 건축가들이 설계해서 계획된 문은 구획된 공간을 연결해 소통하는 역할을 하므로 집과 자연을 이어주는 ‘안과 밖의 통로’일 것이다.
외부를 실내에 담는 액자 ‘창’
창문이 집의 부속품이라는 발상은 옳지 못하다. 고대 왕들의 왕릉을 비롯해 죽어서 가게 되는 무덤에는 창문이 없다. 현대 건축물 중에도 미술관이나 특히 박물관에는 창이 없다. 창은 살아 있는 생명과 연결된 중요한 익스테리어다.
양택陽宅은 산자의 집이고 음택陰宅은 죽은 자의 집이다. 이집트의 미이라도 햇빛을 들이는 창이 없는 박물관에 보관 전시돼 있다. 무덤에 창이 없듯이 가족이 사는 양택의 창은 삶과 죽음만큼이나 중요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개념에 인체의 모든 부위가 부속품이라는 생각은 없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눈이나 입이 부속품일까? 두 부위 모두 보고 말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니 애초에 부속품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다른 곳을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어느 부위도 부속품은 없다.
창문 하나만 예로 들어도 같은 이치다. 훌륭한 설계를 통해 아름다운 집이 탄생돼 잘 가꿔지고 있다면 귀여운 여아가 태어나 예쁘게 커서 요조숙녀가 되었을 때 부모 마음이 기쁜 것처럼 건축도 마찬가지다. 예쁜 눈을(창) 갖고 태어나면 내 아이인데 얼마나 흐뭇할까.
창이라는 익스테리어는 그 집의 눈이며 밖의 풍경을 담는 액자이다. 현대가 추구하는 모던한 건축을 보면 창문 주변에는 무엇인가 추가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창에도 물리적인 기능을 넘어 약간의 눈 화장도 필요한 것 같이 정신적인 스토리가 디자인되길 권해 본다.
조화로울 때 빛나는 익스테리어
선조들께서는 일류대학 화공과를 다닌 것도 아닌데 식물성 단백질이 바닷물 간수와 만났을 때 응고가 된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경이롭다. 두부를 만드는 콩을 가는 데 중요한 도구인 맷돌이 옛날에는 집집마다 있었지만 지금 시대엔 믹서기가 있다.
이런 현대적 삶의 과정에서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재사용하는 데는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하지만 선조들께서 음식을 만들어 드시던 맷돌을 돈을 주고 마당에 설치한 후 밟고 다니겠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나올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무슨 천추에 맺힌 원한이 있는지는 몰라도 아침저녁 반드시 밟고 다니는 행동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옛 물건이 재사용된 좋은 예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호미가 국제적으로 거듭났다거나, 지붕으로 얹혔다가 폐기돼 용도와는 전혀 다르게 벽면에 패턴 문양으로 장식되는 기왓장이다. 이는 현대건축과도 조화롭다.
맷돌을 디딤석으로 재활용한다는 것에 관심은 있고 잘 모르니까 남이 하는 걸 보고 따라 하는 경우겠지만 친구 따라 강남을 가더라도 생각은 한 번 더 해봐야 한다. 익스테리어는 디자인이고 디자인은 주변과의 조화로움을 지켜야 한다. 정원의 격이 떨어지면 주인의 격도 같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익스테리어’가 신조어처럼 느껴지지만 집으로 들어갈 때 우리 눈에 매일 보이는 전경이 익스테리어 영역 안에서 정겹고 마음 넉넉해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