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트에 누워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쌔~쌔~’ 들판을 맴도는 바람의 소리가 공명한다. 문을 열면 펼쳐지는 쨍한 바다, 붉게 물든 대지, 침묵하는 숲. 겨울에 만난 자연은 이렇게 날 것 그대로다.
순백의 겨울을 만나다
태기산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산은 순수 그 자체다. 겨울의 태기산도 마찬가지다. 강원도 횡성에 자리한 태기산(1261m)의 들머리는 양구두미재. 야영지는 풍력발전기 아래 공터다. 정상까지 완만하고 순한 임도길이 펼쳐지지만 눈이 다져져 아이젠은 필수. 고도를 높이면 새하얀 풍력발전기를 만나고 곧이어 푸릇한 침엽수가 가득한 숲이 등장한다. 북유럽 어딘가의 풍경처럼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한 숲에 자리한 태기분교는 화전민 아이들을 대상으로 1965년부터 1976년까지 운영된 학교. 현재 이곳에서 취사와 야영은 금지다.
풍력발전기 밑 공터는 지대가 평평하고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어 야영지로 적합하다. 다만 겨울에는 풍력발전기 날개에 얼음이 얼었다가 밑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텐트 설치 시 안전한 위치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강원도 깊은 산골. 눈과 바람이 가득한 땅. 밤 사이 텐트 주변으로 눈이 한 뼘은 쌓여있고,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려 하늘과 땅조차도 구분이 안 되는 곳. 아직 아무도 지나간 적 없는 깨끗한 눈을 밟고 고즈넉한 겨울산을 만끽한다. 하얀 눈이 뒤덮인 세상은 그야말로 겨울왕국이 따로 없다.
이곳은 어딜 가나 백패킹 천국
제주
어느 한곳을 지정할 수가 없다. 섬 전체가 보석처럼 아름다운 제주도는 설명이 필요 없는 최고의 여행지이자 백패킹 명소다. 사계절 언제나 개성 있는 풍경을 내어주는 이 섬은 산과 바다, 길이 어우러진 천혜의 섬이다. 제주올레길은 물론이고 360여 개에 달하는 오름과 한라산, 본섬 외에 마라도, 우도, 비양도 등 색다른 매력이 넘치는 섬들까지. 어딜 가도 눈이 호강이다. 제주도에는 캠핑장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길을 걷다 원하는 곳에서 야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굳이 명소가 아니어도 충분히 아름다운 섬, 제주만큼 백패킹에 어울리는 곳도 드물다.
제주도에서 가장 유명한 백패킹 명소는 비양도다. 우도 속 비양도는 바다를 바라보는 해안에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이색적인 봉수대까지 어우러져 이국적인 분위기가 일품. 우도와 비양도는 다리로 연결돼 차도 사람도 손쉽게 오갈 수 있지만 인공적인 시설물 하나 없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비양도의 야영지인 연평리야영장은 무료로 이용 가능하다. 단, 화장실 외에는 개수대나 샤워시설은 없다. 작은 섬 비양도에서는 딱히 하이킹할 곳이 없지만 우도에는 하이킹을 즐길 곳이 즐비하다. 특히 검멀레 해안과 우도봉은 빼놓아서는 안 될 포인트. 우도봉 꼭대기에 올라 100년 넘은 등대도 보고, 검은 모래가 이색적인 검멀레 해수욕장과 겹겹이 층을 이룬 해안 절벽도 둘러볼 수 있다.
섬에서 만나는 겨울
풍도
풍도로 가려면 인천이나 대부도에서 하루에 한 번 뜨는 배를 타야 한다. 인천에서 출발한 배는 대부도를 경유해 남은 승객을 태우고 풍도와 육도로 향한다. 풍도까지는 인천에서 2시간 30분, 대부도에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항구에 정박하면 엄청난 크기의 배낭을 메고 묵묵히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백패커들이다.
풍도에서 백패커들이 가장 선호하는 야영지는 북배다. 북배는 몇 차례 미디어에도 소개됐을 만큼 수려한 경치를 자랑해 백패커에겐 최고의 숙영지. 북배로 가기 위해선 항구에서 1시간 정도 걸어야 한다. 트레킹 길 입구에 유일한 슈퍼가 있으니, 이곳에서 필요한 식재료를 사두는 것이 좋다.
북배는 ‘붉은 바위’를 뜻하는 ‘붉바위’에서 유래된 지명인만큼, 붉은 바위와 푸른 바다 빛이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는 절경을 연출한다. 해가 수평선으로 다가가면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온통 주황빛으로 물든다. 그 황홀한 서해의 일몰을 만끽하는 것은 풍도 백패킹의 백미다.
풍도에 백패커들이 몰려들면서 섬에서는 한동안 소란이 일었다. 무단으로 쓰레기를 투기하는 백패커들로 인해 한 때 야영이 금지되기도 한 것. 하지만 잠시 막혔던 풍도는 다시 너른 품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백패커들의 경각심은 필수. 아름다운 공간을 아름답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환경을 훼손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별이 빛나는 밤
안반데기
떡메로 떡살을 칠 때 밑에 받치는 안반처럼 평평하게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은 곳 안반데기. ‘구름의 땅’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고도 1200m로 구름이 무거울 때는 마을까지 흘러내려 온다는 고지의 땅이다. 60만 평이 넘는 드넓은 땅에 배추밭과 감자밭이 자리한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고랭지 채소밭이다. 그러나 겨울의 안반데기는 온통 순백이다. 푸른 배추 대신 새하얀 양탄자를 두른 드넓은 땅은 겨울이 깊어질수록 환상적인 비경으로 변신한다.
안반데기의 매력은 거침없이 트인 시야다. 드넓은 배추밭과 작은 마을 너머로 길게 이어진 산자락, 높은 하늘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풍광은 특히 해질 무렵이면 붉은 노을이 가라앉아 더욱 환상적이다. 밤이 되면 그 풍경은 더욱 신비롭게 변한다. 가릴 것 없는 너른 고원 지대와 맑은 하늘. 그곳을 가득 메운 별무리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찔한 풍경을 내어준다.
안반데기는 고랭지밭답게 제법 된 경사면이 대부분이지만 농사를 짓기 위해 곳곳에 폭이 좁은 도로와 평지대가 있어 야영지를 찾기 어렵지 않다.
이국적인 풍광을 만나다
선자령
유럽에 알프스가 있다면 한국에는 선자령이 있다. 드넓은 초원과 새하얀 풍력발전기가 어우러진 선자령은 초보 백패커가 도전하기 좋은 완만한 길이 장점이다. 선자령은 1157m의 고지지만 트레킹 시작점이 800m 지점이라 고도차가 적어 길이 순하고 완만하다. 정상까지 약 2시간이면 도착하니 백패킹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에게 꼭 추천하고픈 곳. 다만 선자령의 바람은 초보자용이 아니다.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북서풍을 정면으로 맞아 늘 거센 바람이 몰아친다. 풍력발전기가 괜히 있는 것은 아닌 듯. 방한 용품은 필수다.
무시무시한 겨울바람이 메마른 언덕을 범람하고, 거대한 풍력발전기를 어린아이의 바람개비마냥 빙글빙글 돌려낸다. 그 언덕을 새하얀 눈이 가득 메운다. 겨울왕국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곳. 흐드러지게 핀 새하얀 눈꽃과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순백의 설원. 능선을 중심으로 반대편에는 강릉 시내와 겨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이 펼쳐진다. 그 한가운데서 텐트에 부딪히는 겨울바람 소리를 들으며, 눈 녹인 물로 밥을 짓고 얼큰하게 술 한 잔 나누며 황홀한 시간을 만끽하고픈 백패커들의 성지, 선자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