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짜면 같은 차" 기아가 '엔터프라이즈' 실패 후 출시한 바로 그 차

'플래그쉽 세단' 앞서 '제네시스 쿠페' 편에서 짧게 언급한 스포츠카와는 또다른 형태의 부러움을 갖게되는 어찌 보면 더 보편적인 로망이 아닐까 싶은데요.

누구나 력셔리 세단의 뒷자석에 소중한 사람을 태우고 싶은 생각 한 번쯤 하니까요. 각 그룹의 리더가 주로 사용하는 차급인 만큼 회사의 기술력을 집약해 당대 넣을 수 있는 온갖 최신 사양과 고급 소재로 화려하게 꾸며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무엇보다 플래그쉽은 '기함'이라는 그 뜻처럼 브랜드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모델이기도 합니다. 가장 비싼 가격표를 달고 있는 모델을 '어떤 식으로 만드냐'를 보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소개할 이 모델의 시작은 그렇지 않았는데요. 에쿠스, 체어맨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엔터프라이즈'의 뒤를 이어 등장했지만 낮아진 체급과 불분명한 정체성으로 기아차의 구겨진 체면처럼 느껴졌던 차.

애매했던 컨셉을 확실하게 정립하면서 엔터프라이즈의 빈자리를 말끔하게 채워줬던 '이 차', 이번 시간에는 기아의 전륜구동 플래그쉽 세단 '오피러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000년 초, 기아는 여러모로 어지러운 상태였습니다. 급격하게 기울어진 회사 사정으로 제대로 된 신차 개발이 진행되고 어려웠고 이미 국산차 업체 '넘버 2'라는 큰 규모를 가지고 있던 기업인 만큼 한식구가 된 현대차와 라인업이 정확히 겹치는 것도 문제였죠.

현대차는 당시 대세로 자리잡은 '플랫폼 공유'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기아차의 라인업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막대한 개발비와 개발 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기간에 신차를 투입시킬 수 있었어요.

문제는 후륜구동 플래그쉽 세단 '엔터프라이즈' 야심차게 내놓은 고급 세단이었지만 '쌍용 체어맨'과 '현대 에쿠스'의 기세에 밀려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마쯔다 센티아'를 베이스로 만들어져 팔릴 때마다 높은 로열티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같은 그룹내에서 엄연히 현대차 경쟁구도로 유지하고 있었던 만큼 새로운 '후륜구동 플래그쉽 세단'을 출시해 에쿠스를 견제할 필요가 전혀 없었죠.

결국 후속 모델 'SJ'의 개발은 중단됐습니다. SJ 프로젝트를 사장 시키면서 회사에 자존심과도 같은 플래그쉽 라인업에 공백이 생기자 현대차는 '다이너스티'의 후속 차종으로 준비하던 전륜구동 대현세단 'GH'를 부랴부랴 기아에 넘겼습니다.

분할된 헤드램프, 에쿠스와 유사한 실내디자인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죠. 다이너스티의 후속인 만큼 에쿠스보다 반체급 아래인데다 전륜구동, 정체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디자인 등 '서자 취급'에 방점을 찍는 모델이나 다름없어 기아차 입장에서는 마냥 기분 좋은 거래는 아니었을 텐데요.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백번 나았습니다.

또 북미 등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두고 나름 신경 써서 만들었기 때문에 현대·기아차의 공동 목표했던 적극적인 해외시장 공략에도 도움이 될만한 모델이었어요.

장르는 다르지만 이시기 기아차는 7인승 MPV '카스타'나 준중형 트럭 '마이티'를 리뱃징 한 '파맥스' 등 현대에서 개발한 차량을 넘겨받아 라인업을 보강한 경우가 종종 있었죠. 덕분에 '2세대 그랜저'에 기반을 둔 다이너스티는 얼떨결에 수명이 늘어나 2005년까지 판매됐고 후속인 'GH'는 기아의 플래그쉽 세단 오피러스로 2003년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원래라면 오피러스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다들 아시다시피 현대차의 독자개발 후륜구동 럭셔리 세단, '제네시스'가 들어섰죠. 차명 '오피러스'는 성경 속 '엘도라도'와 동일한 뜻의 라틴어에서 따왔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보석처럼 빛나는 듀얼 헤드램프와 반짝이는 크롬 장식으로 화려하게 보며 고급차 분위기를 물씬 풍겼습니다. 여기에 오피러스의 'O'를 형상화한 전용 엠블럼까지 부착해 남다른 분위기를 뽐냈죠.

눈치 채신 분도 있겠지만 이 엠블럼은 나중에 등장한 고급 SUV '모하비'와도 공유했는데요. 오피러스의 'O'자 엠블럼이 들어가는 게 당연하지만 '모하비에는 왜 이걸 그대로 썼나?' 하시는 분들이 계실 텐데요.

'모하비의 원래 이름' 인 '오펜바흐'를 떠올리면 납득이 되실 거예요. 가로로 길게 뻗은 LED 방향지시등과 링컨을 연상케하는 보수적인 C필러, 고급차의 상징이었던 투톤 컬러 도색을 더해 중후함이 돋보였고 에쿠스, 체어맨과 달리 5m에 미치지 못 하는 전장이었지만 넉넉한 전폭과 전고, 휠베이스로 대형 세단에 걸맞는 위압감도 충분했습니다.

또 각을 앞세워 권위적인 모습을 강조했던 기존 대형 세단들과 달리 곡선이 돋보이는 부드럽고 우아한 디자인은 신선함으로 다가왔죠. 에쿠스나 체어맨에 부담을 느끼던 사모님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다만 현대차의 향기가 짙게 베어나오는 일부 디테일과 시선을 사로잡는 거대한 방패형 라디에이터 그릴이 '갈비뼈'를 연상시키는 등 일부 소비자들에게 '첫인상이 나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다이너스티의 유산이었던 '분할된 원형 헤드램프'가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이와 유사한 디자인을 상징처럼 갖고 있던 재규어, 벤츠 E클래스 등 유명 고급차와 비교되며 국내외 할 것 없이 '짝퉁 디자인'이라는 혹평을 받았죠.

의외로 다양한 '네눈박이 차'들이 있었지만 국내에서 워낙 인지도가 낮은 차들이라 모르시는 분들이 많았고요. 얘네들은 규격화 된 헤드램프를 쓰느라 동일한 크기의 램프를 2개 달았었던 '과거의 디자인을 계승했다'는 핑계거리도 있었지만 오피러스는 그런 것도 없었으니까요. '슈마'에서 가져왔다고 우길 수도 없죠.

밝은 우드그레인과 고급 가죽으로 화사하게 꾸민 실내는 에쿠스의 것을 그대로 빼다박은 모습이었습니다.

깔끔한 슈퍼비전 계기판과 동굴 형태로 깊게 배치해 시인성을 높인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도어트림에 자리잡은 시트 조절 스위치, 운전자를 행햐 툭 튀어나온 센터페시아로 조작편의성을 높인 것 또한 에쿠스와 판박이였죠. 여기에 사이드미러, 스티어링 휠까지 기억하는 메모리시트와 9개 스피커의 JBL 오디오, DVD 내비게이션, 차량 내 전화, 전용 웹 서비스를 제공하는 텔레매틱스 시스템 '모젠'과 에쿠스에도 없던 국산차 최초의 스마트키 등 당대 넣을 수 있는 첨단 편의장비까지 몽땅 채워 넣었어요.

고급 세단의 덕목인 뒷자석 편의성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넉넉한 차체와 전륜구동의 이점을 최대로 살린 실내는 엔터프라이즈 못지않게 쾌적한 공간을 제공했고요.

뒷좌석 독립식 공조장치, 전용 인포테인먼트 모니터, 전동 리클라이닝은 물론 조수석 시트를 움직일 수 있는 버튼까지 마련해 '쇼퍼드리븐' 으로 쓰기에도 부족함없는 편의점을 제공했어요. 내비게이션을 선택하지 않으면 모니터 자리에 벽시계 만한 아날로그 시계가 들어가 있었던 게 기억이 남네요. 그나마 고급형에는 조그만 단색 모니터라도 넣어줘서 한결 나았지만요.

파워트레인은 그랜저, 에쿠스와 공유하던 V6 2.7L 델타 엔진과 3.0, 3.5L 시그마 가솔린 엔진 2.7L LPG 등 모드 6기통 라인업으로 채웠고, 5단 자동변속기를 맞물려 고급세단의 걸맞는 안정적인 힘과 부드러운 회전 질감을 제공했습니다. 국산 대형 세단답게 서스펜션은 흔히 물침대라고 일컫는 부드러운 세팅으로 고속 영역이나 와인딩 등 과격한 주행에서는 차체가 허둥댔었는데요. 대부분의 잔진동은 모두 걸러내 일상 주행에서 안락하고 포근한 승차감을 제공했어요. 여기에 에쿠스 못지않은 정숙성까지 더해져 차급과 가격에 기대하는 만족감을 선사하죠.

전륜구동을 채택하면서 고속 영역에서의 주행감각은 엔터프라이즈나 체어맨에는 미치지 못 했지만 전자제어서스펜션, 자세제어장치 VDC를 탑재해 보완했고, 눈 오는 날 강남에 언덕길 한복판에서 체면을 구길 일도 없었습니다. 이후 2005년에는 파나소닉 오디오, 후방카메라 적용 등 각종 편의사양을 업그레이드하고 기존 3.5L 시그마 엔진을 새로 개발한 '3.8L 람다 엔진'으로 대체해 출력과 효율을 높인 연식 변경 모델을 출시했습니다.

리어램프의 의미없는 '하얀색 링'을 제거해 좀 더 깔끔해졌고, 3.8L 모델에 한해 전용 알루미늄 휠과 듀얼머플러가 장착 됐는데요. 이 등급을 선택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아서 '듀얼머플러 달린 오피러스'를 도로에서 보기는 쉽지 않아요.

사회적인 성취를 이루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인물을 뜻하는 하이오너를 타겟으로 내세운 오피러스는 보편적인 럭셔리 세단처럼 기사를 두고 타는 '쇼퍼드리븐'과 직접 운전하는 '오너드리븐' 두 가지를 모두 커버할 수 있는 모델이었습니다.

그랜저와 에쿠스 사이의 넓은 간극. 그 사이에 정확히 위치해있기 때문에 XG를 타기에는 아쉽고, 에쿠스는 어딘가 부담스러웠던 고객들을 기아차로 끌어들일 수 있었죠. 덩치는 조금 작았지만 플래그쉽이라는 위엄에 걸맞게 오너들을 위한 문화행사나 '오피러스 전용 정비라인'을 갖추는 등 각종 프리미엄 마케팅에서 힘썼습니다. 덕분에 높은 가격에도 불구 출시 초 2,000여 대가 넘게 판매되며 순조롭게 출발했어요.

하지만 애매하게 높은 가격과 '어중간한 포지션' 혹평받은 외관 디자인 때문에 판매량이 지속적으로 떨어졌고 결국 아쉬운 성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신차 효과가 한창일 2004년 마저 집안에 우환이 있었던 '뉴 체어맨' 보다 판매량이 적었을 정도였어요. 설상가상 세련된 감각의 '르노삼성 SM7', 'GM대우 스테이츠맨' 등 새로운 고급차들이 국내 시장에 뛰어들면서 그나마 챙기던 점유율까지 나누어야 했습니다. 야심차게 준비한 해외시장 성적은 더 심각했는데요. 

오피러스 대신 '아만티' 라는 이름으로 투입했고, 국내에선 역차별 논란이 일어날 정도로 공격적인 가격을 매겼는데요. 출시 초기 신선한 분위기로 잠깐 주목받았을 뿐, 이후 '짬뽕 디자인''감흥없는 상품성', '낮은 내구성'이란 혹평이 쏟아지며 사실상 실패했습니다.

멜론머스크의 이용허락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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