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와 골목을 따라 쌓인 시간의 흔적, ‘물의 도시’ 항저우를 가다 ②‘난쉰고진’

[리뷰타임스=라라 리뷰어] 5월 1일, 8시 제주국제공항 출발 예정인 춘추항공은 7:40에 전원 탑승을 마치고 문을 닫았다. 항저우 샤오산국제공항 활주로에 내린 시각은 8:20. 활주로에 내려 항공기의 문을 열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9:05 도착 예정인 비행기가 이렇게나 빨리 도착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중국 항공기를 타본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아주 오래 전 몇 시간씩 지연이나 연착이 일상이던 때와 비교하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일찍 출발하고 일찍 도착하는 중국 항공기

항저우 도착뿐 아니라 제주에 도착할 때 이용한 베이징캐피탈항공도 일찍 출발하고, 일찍 도착했다. 한 가지 차이점은 가격이 2배 정도 더 비싼 제주→항저우 구간 춘추항공은 물조차 제공하지 않았는데, 베이징캐피탈항공은 500ml 생수 1병과 견과를 서비스로 내왔다.

타이위안에서 오는 친구는 국내선이라 터미널3, 제주에서 날아간 나는 국제선이라 터미널4에 도착했다. 샤오샨국제공항에서 eSIM을 구동시킨 후 우리는 두 터미널의 중간 지점에서 만나 지하철로 향했다.

입국심사를 할 때 내 앞에 있던 무슬림들에게는 녹음된 멘트를 틀어주던데, 내게는 담당자가 한국어로 묻는다. 입국심사 때 쓰는 한국어를 아주 조금 아는 듯한데, 존댓말이 아닌 반말이다. 입국심사인지라 딱히 말은 하지 않았는데, 다음에 또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정확한 한국어를 알려줘야겠다.

일찍 출발하고 일찍 도착하는 중국 항공기

샤오산국제공항에서 난쉰고진으로 가려면 지하철로 항저우서역까지 이동한 후 고속철을 타야 한다. 공항에서 항저우서역까지는 환승 없이 지하철로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예매한 고속철이 12:54 출발이라 항저우 시내 쯤에서 내려 점심식사를 할까 했는데 환승할 필요가 없는 노선이라 항저우서역까지 가버렸다. ‘기차역 부근에도 괜찮은 식당이 있겠지’ 하는 생각었다. 하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항저우서역은 역사만 덩그라니 있을 뿐 주변은 허허벌판(?) 수준이다. KTX 광명역이 처음 오픈했을 때의 느낌이다. 그나마 역사 내에 햄버거, 라면, 카페 3개 정도가 영업을 하고 있다.

항저우서역 내에는 햄버거, 라면, 카페 3개 정도가 영업을 하고 있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둘러본 항저우서역은 생각보다 북적대지 않았다. 의자들이 대부분 꽉꽉 차있긴 해도 예상했던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역사 밖으로 잠시 나가보고 싶지만 나갔다 들어오면 보안 검색을 또 해야 하니 귀차니즘이 발동한다. 중국은 지하철이든 고속철이든 짐에 대한 보안 검색이 필수다. 고속철의 경우 지역에 따라 국제선처럼 생수조차 버리고 타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항저우에서는 생수에 대해 제지하지는 않았다.

5월 1일 항저우서역. 생각보다 그리 북적대지는 않았다
기차역과 지하철역의 보안 검색

항저우서역에서 후저우난쉰역까지는 32분이 소요됐다. 전광판에 표시되는 온도를 보니 31도를 오간다. 후저우난쉰역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호텔에 도착하니 2시 15분. 앱으로 택시를 부르긴 했는데 역사 밖에 택시 승강장이 없어 잠시 의아했었다. 알고 보니 택시 승강장은 역사 지하층에 마련돼 있다.

새벽부터 서둘러 공항에 가느라 우리가 밖에서 보낸 시간이 이미 9시간을 훌쩍 넘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2~3시 정도인데 호텔에서 빈둥거릴 순 없으니 간단히 가방을 챙겨 난쉰고진 마을로 향했다.

중국의 10대 수향마을은 어디?

사실 쑤저우와 항저우는 오래 전부터 수로를 따라 형성된 아름다운 물가 마을(수향마을)들로 유명하다. 수나라(581~618) 때 남북 교류를 위해 건설된 대운하를 중심으로 생겨난 마을들이라 그 역사가 1,000년을 넘는 곳도 적지 않다. 중국은 문화혁명을 거치며 옛 것이 대부분 사라져버렸는데, 최근 들어 옛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다. 하지만 이런 마을들은 방문객이 늘어나면서 관광지의 색채도 짙게 더해지고 있다.

여러 수향마을들 중에서도 사람들이 자주 꼽는 중국 10대 수향마을이 있다. 쑤저우에 5곳, 후저우에 1곳, 쟈싱에 2곳, 그리고 샤오싱과 상하이에 각각 1곳이다. 수향마을 투어를 한다면 상하이로 들어가 타이호(太湖)를 끼고 있는 쑤저우를 중심으로 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중국 10대 수향마을>

  • 저우좡(周庄镇, 江苏 苏州) : 중국 제일의 수향 마을로, 60%가 넘는 민가들이 명청시대에 지어졌다. 100개에 달하는 고택과 14개의 다리가 보존돼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퉁리(同里镇, 江苏 苏州) : 송나라 때 생긴 10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마을. 동방의 베네치아.
  • 루즈(甪直镇, 江苏 苏州) : 2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수향 마을
  • 광푸(光福镇, 江苏 苏州) : 6000~7000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수향 마을
  • 무두(木江苏 苏州) : 명청 시기 쑤저우 서부에서 가장 번화했던 오 문화의 보물
  • 난쉰(南浔区,浙江 湖州) : 명청 시기 강남 실크산업의 중심지로, 오래도록 풍요가 넘치는 수향 마을
  • 시탕(西塘镇, 浙江 嘉兴) : 영화 '미션임파서클3' 촬영지,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마을
  • 우전(乌镇镇,浙江 嘉兴) : 문화의 정취가 깊은 수향 마을, 영화 ‘와호장룡’ 촬영지
  • 안창(安昌街道,浙江 绍兴) : 샤오싱의 옛 4대 마을 중 한 곳으로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운치가 있는 마을
  • 주자자오(朱家角镇, 上海) : 1700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상하이에서 가장 오래된 수향 마을

난쉰고진, 명·청 시대 중국 실크산업의 중심

난쉰고진(南浔古镇)은 남송 시대(1127–1279)인 1252년부터 형성된 마을로, 장쑤성과 저장성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명나라 중기부터 청나라 중기까지 중국의 실크 산업을 이끈 마을로, 당시 강남(양쯔강 이남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마을 중 하나였다 한다. 20세기 초까지도 중국 실크 산업을 이끌면서 ‘후저우의 성 하나가 난쉰 마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湖州一个城,不及南浔半个镇)’는 말도 생겨났다 한다.

난쉰고진은 중국 관광지의 최고 등급인 국가 5A급 관광지로 지정돼 있다

이처럼 실크 산업의 중심이었던 난쉰고진은 지금의 난쉰 지역 전체가 아니라 약 34.27㎢ 규모의 옛 마을을 말한다(33.9㎢인 서울의 송파구 면적과 비슷하다). 난쉰고진은 중국 관광지의 최고 등급인 국가 5A급 관광지로 지정돼 있다. 중국의 유명 관광지는 5단계로 나누어 관리되는데, 등급이 한 번 정해졌다고 해서 계속 유지되는 건 아니고, 주기적인 평가를 통해 품질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4A급, 3A급 등으로 강등되기도 한다.

명청시대 실크문화의 중심지 '난쉰고진'

별다른 사전정보 없이 방문한 거라 우리는 마을 곳곳의 안내판을 따라 수변을 걸었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명나라 때 축조된 민가로 강남(江南) 지역에서 가장 잘 보존된 건물이라는 바이젠러우(百间楼), 3개의 정원과 5채의 집으로 구성된 청나라식 건물인 장징장고택(张静江故居), 청나라 말기 난쉰의 부호 류융이 지은 개인 화원이라는 샤오롄좡(小莲庄), 장서가 풍부한 개인용 서고인 자예탕짱수러우(嘉业堂藏书楼) 등이 유명하다 한다.

사람에 치일 정도가 아니었다면 유유자적 걸으며 구석구석 찬찬히 둘러봤을 텐데 이날 난쉰고진은 거의 북새통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의 무리가 가는 흐름에 따라 함께 걷는 것 외에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다. 혹시나 모를 안전사고에 대비해 안전요원들도 곳곳에 배치됐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명·청 시대의 복장과 메이크업을 한 여성들이었다. 중국은 요즘 어딜 가나 이렇게 옛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사진촬영을 하는 여성들을 볼 수 있다. 경복궁뿐 아니라 제주의 목관아에서 한복을 입고 사진촬영을 하는 중국인들이 많은 것도 이런 현지의 트렌드 탓이다. 의상과 메이크업만 할 수도 있고, 전문 사진작가를 섭외할 수도 있다. 의상과 메이크업만 하면 199위안(약 4만원), 사진 촬영이 포함되면 298위안(약 56,000원)이다.

중국에선 옛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사진촬영을 하는 게 트렌드다
중국에선 옛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사진촬영을 하는 게 트렌드다
수변에 자리한 찻집들

수로를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빽빽이 자리한 옛 건물들에서 고풍스러움이 묻어난다. 건축 전문가가 아니니 명·청 시대의 건축양식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이날처럼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면 시 한 수쯤 저절로 나올 만한 풍광이다.

사람들의 물결을 따라 걷다 보니 커다란 사원이 자리하고 있다. 난쉰고진의 유일한 도교사원이라는 광혜궁(广惠宫)으로, 북송 치평시대(1065~1068)에 지어졌다 한다. 광혜궁은 신선으로 불리는 황대선과 보살을 함께 모시는, 도교와 불교가 결합된 몇 안 되는 사원 중 하나란다. 전설에 따르면, 진나라 사람인 황대선(黄大仙, 328~386)은 갈홍의 제자인데, 40년 동안 인간 세상의 조리된 음식을 피하고, 매일 잣을 먹어 마침내 신선이 되었다 한다. 1915년에는 황대선이 홍콩에 전해져 홍콩에서 크게 발전했고, 대만, 마카오뿐 아니라 동남아 등으로도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한다.

난쉰고진의 유일한 도교사원 광혜궁(广惠宫)

도교사원을 잠시 둘러보고 나와 다시 수변을 따라 걷는다. 유명 관광지답게 수변으로 주전부리, 토속 먹거리 등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고, 찻집들도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술이 있기는 하지만 그 자리에서 마실 수 있는 건 아니고 난쉰의 별미라는 ‘미주(米酒)’를 판매하는 상점이다. 조금 맛을 보니 ‘맑은 막걸리맛’과 비슷하다. 안전사고의 우려가 있어서인지 술을 파는 음식점은 없는 듯하다.

각종 과일 말린 것들도 팔고 있는데, 귤이 눈에 띈다. ‘어라? 제주 귤은 명함도 못 내밀겠는걸~’

난쉰고진의 상점
명청시대 실크문화의 중심지 '난쉰고진'

난쉰고진의 무형문화먹거리 ‘수앙쟈오미엔’

조금 더 걸으니 청나라식 건물이라는 장징장고택(张静江故居)인데, 문이 닫혀 있다. 안내문을 보니 장징장(1877~1950)은 국민당 원로로 신해혁명 때 중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란다.
고택을 구석구석 돌아보기보다는 난쉰고진의 분위기를 즐기는데 그쳤지만, 그래도 난쉰의 별미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맛집을 검색해 일부러 간 건 아니고 슬슬 배가 고파 오길래 한 곳을 고른 건데, 결과적으로 최고의 선택이었다.

난쉰무형문화먹거리(南寻非遗名小吃).
샨롄고추기름훈툰(善琏辣油小馄饨), 향토6훈툰(特色六馄饨), 난쉰슈앙쟈오미엔(南寻双浇面) 등 3가지가 주 메뉴다. 수앙쟈오미엔(双浇面)은 발음이 같은 双交面이라고도 쓰는데, CCTV의 중국 전통음식 다큐멘터리인 《舌尖》에서도 방송된 적이 있다. 최소 2가지 이상의 토핑이 올라가는 면 요리로, 바삭한 고기와 튀긴 생선이 함께 올라간다 한다. 우리는 향토6훈툰(特色六馄饨)과 난쉰슈앙쟈오미엔(南寻双浇面)을 주문했다.

난쉰고진의 무형문화먹거리
난쉰의 무형문화먹거리

테이블에 차려진 걸 보니 설명 그대로 돼지고기와 생선 한 마리가 면 위에 올라가 있다. 제주의 고기국수에 익숙한 나는 돼지고기와 면을 함께 집어 맛봤는데, 그다지 특별한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국물 속 튀긴 생선은 돼지고기와 전혀 달랐다. 전혀 생각지 못한 감칠맛이 나는데다 그 맛이 국물에 어우러져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한 그릇 더 먹고 싶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선 완탕이라 부르는 훈툰은 국물 자체는 늘 먹던 익숙한 맛인데, 훈툰의 피가 얇고 속이 꽉 차있다. 매운 걸 못 먹어서 샨롄고추기름훈툰(善琏辣油小馄饨) 대신 이걸 주문했는데, 다음에는 난쉰 토속요리인 샨롄고추기름훈툰을 시도해 봐야겠다.

명청시대 실크문화의 중심지 '난쉰고진'

식사를 마치고 다시 거리를 걷다보니 우리나라와 비슷한 팥고물 시루떡, 장아찌 등 다양한 먹거리가 많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피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있으니 바로 취두부다. 홍어 냄새 정도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취두부를 곳곳에서 튀기고 있다. 취두부는 난쉰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만날 수 있지만 난쉰만의 독특한 비법이 있어 난쉰 특미 중 하나라 한다. 지독한 냄새와 달리 맛은 꽤 좋다는데, 그 냄새를 참으며 맛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취두부를 맛보게 될지 장담은 못하겠다.

거리를 걷다 쉬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7시가 다 돼간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3시간이나 지났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니 난쉰마을에도 하나 둘 불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밤을 향해 갈수록 마을은 아름답게 빛나고 사람들도 많아진다.

수로를 운항하는 배를 탈까 했는데, 부두에 도착하니 긴 줄이 벌써 100여 미터에 달한다.
17시부터 20:30까지 운영되는 아경 유람선은 1인당 30~50위안이고, 낮에 운영(08:00~16:20)되는 유람선은 8명이 탑승하는 배 1척당 160위안, 280위안, 380위안 세 종류가 있다. 전통 의상을 입고 혼례를 특별히 장식된 배 위에서 올리는 수향혼례도 있다 한다. 수향혼례는 618위안(1시간 내외 소요)이다.

명청시대 실크문화의 중심지 '난쉰고진'
명청시대 실크문화의 중심지 '난쉰고진'
명청시대 실크문화의 중심지 '난쉰고진'

유람선은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호출했다.

야경을 찾아 늦은 시간에 난쉰고진에 들어오려는 사람들과 난쉰고진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뒤섞여 마을 입구에서부터 교통정체가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2대의 택시가 예약을 취소하고, 30분을 더 기다려 세 번째 택시를 타고 겨우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람이 많지 않을 때 방문한다면 만족도가 최고였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분위기는 다르지만 실제 사람이 살지는 않고, 상점들만 가득한 전주한옥마을이 문득 머리 한 켠을 스친다.

<lala_dimanc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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