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전 이집트 책에 신라가…미 서부는 지금 ‘전시의 바다’

노형석 기자 2024. 9. 2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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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재단 ‘PST 아트 2024’ 전시 현장
12~13세기 이집트에서 나온 ‘호기심의 책’ 필사본에 묘사된 ‘신라’의 모습. 푸른 잎이 주렁주렁 달린 덩굴 숲 사이로 뿔 달린 양을 비롯한 짐승들이 뛰어 노니는 풍요의 섬으로 그려졌다. 피에스티 아트 프로젝트의 일부로 미국 샌디에이고미술관에서 마련한 기획전 ‘창조의 경이’ 앞부분에 주요 유물로 나와 눈길을 끈다.

그들 눈에 비친 신라는 푸른빛 낙원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미술관 진열장에 전시된 800여년 전 이집트 그림책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안에 한반도 고대 왕국 신라가 풍요로운 섬으로 그려져 있었다. ‘호기심의 책’이란 제목이 달렸다. 12세기 유럽 십자군 원정군에 맞서 아랍 세계를 지킨 명장 살라훗딘(살라딘)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 세운 아이유브 왕조의 무슬림 지리학자와 장인들이 당대 세상 곳곳의 정보를 담아 펴낸 필사본이다. 베스트셀러였을 책 한쪽 전면에 신라 왕국은 푸른 잎이 주렁주렁 달린 덩굴 숲 사이 뿔 달린 양과 여러 짐승들이 뛰어 노니는 공간으로 묘사됐다. 당시 신라는 이미 멸망했지만, 과거 상인들과 사절단을 보내 정착민을 남기며 교류했던 아랍·페르시아 사람들은 선조들 기억과 그들의 지리과학 지식을 상상력과 엮어 ‘파라다이스 신라’를 소박하게 그려냈다.

이 필사본은 샌디에이고 시내 한가운데 발보아공원에 자리잡은 샌디에이고미술관에서 지난 7일 개막한 기획전 ‘창조의 경이’의 출품 유물이다. 7세기부터 지금까지 이슬람 시각 문화에서 바라본 예술과 과학의 여러 양상과 단면들을 들여다보는 전시다.

게티뮤지엄에서 지난 10일 개막한 피에스티 아트 기획전 ‘루멘: 빛과 예술의 과학’의 전시 현장. 관객들이 빛에 대한 종교적 성찰을 형상화한 중세 유럽의 보석 성물들을 살펴보고 있다.
몽롱한 빛을 내뿜으며 착시를 일으키는 헬렌 파시지안의 2023년 작 발광설치작품 ‘무제’. 게티뮤지엄에 따로 전시공간을 만들었다.

발길을 북쪽으로 돌려 로스앤젤레스를 대표하는 미술관인 게티뮤지엄에도 놀라운 전시가 차려졌다. 최근 20세기 빛을 주제로 한 거장들의 사진 테마 전시회를 하면서 거장 루이즈 부르주아와 에드 루셰이(루샤)의 드로잉과 회화를 매슈 슈라이버가 조명 엔지니어의 역량을 빌려 입체 홀로그램으로 재현한 작업을 함께 내놓은 것이다. 뮤지엄 쪽은 대표 명작인 반 고흐의 아이리스도 자연광이 아닌 다른 광선을 투과시켜 색다른 감상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실험적인 전시 실험을 다음달 풀어낼 참이라고 밝혔다.

엘에이 근교 글렌데일의 브랜드 라이브러리 아트센터 1층에 전시 중인 키네틱 작가 데이비드 보언의 ‘풀밭’은 한술 더 뜬다. 미국 항공우주국(나사) 제트추진연구소(JPL) 과학자들과 손잡고 만든 이 작품은 현재 화성에서 활동 중인 탐사선 퍼시비어런스호의 로버 탐색장치가 보내는 풍속 데이터를 실시간 전송받아 감지센서 위의 풀들을 흐늘거리게 해 지구 밖 행성의 바람을 처음 연출했다. 물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되는 토성의 위성 유로파를 향해 내달 떠나는 나사 탐사선에 실릴 금속제 디스크도 공개됐는데, ‘물’을 일컫는 75개 언어의 발성 녹음본이 들어가 눈길을 끌었다. 아티스트들이 나사와 협업해 꾸린 최초의 대중 공개 기획전 ‘혼합된 세계: 행성 간 상상의 실험’에 나온 10점의 출품작들 가운데 일부다.

글렌데일의 브랜드 라이브러리 아트센터 1층에 전시 중인 키네틱 작가 데이비드 보언의 ‘풀밭’. 미국 항공우주국(나사) 제트추진연구소(JPL)의 과학기술자들과 손잡고 만든 이 작품은 현재 화성에서 활동 중인 탐사선 퍼시비어런스호의 로버 탐색장치가 화성에 부는 바람의 풍속 데이터를 실시간 전송받아 감지센서 위의 풀들을 흐늘거리게 하는 얼개다. 아티스트들이 나사와 협업해 꾸린 기획전 ‘혼합된 세계: 행성 간 상상의 실험’에 나온 출품작들 가운데 일부다.

이런 파격적 시도들은 배경이 있다. 이달 초부터 로스앤젤레스와 샌디에이고 인근의 70여개 미술관과 갤러리들은 ‘예술과 과학기술의 충돌’을 화두 겸 주제로 잡아 세계 미술계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거대한 기획전시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미국 석유재벌 폴 게티(1892~1976)의 유산을 토대로 만들어진 게티재단이 무려 2천만달러 이상을 각 미술관에 지원하며 진행 중인 ‘피에스티(PST) 아트 2024’다. 피에스티는 원래 태평양 인근 미국 서부 지역에 적용되는 ‘태평양 표준시’(Pacific Standard Time)를 줄여 부르는 약어. 게티재단 쪽은 앞서 2011년과 2016년에도 피에스티란 이름으로 엘에이 지역의 20세기 미술사와 라틴아메리카 미술의 자취를 쫓는 1, 2회 프로젝트 행사를 치른 바 있는데, 올해 세번째 행사부터 ‘아트’를 피에스티 뒤에 붙이고 5년마다 개최하는 것을 정례화했다.

공동기획자인 앤드루 퍼처크 게티미술연구소 부소장은 “연구소와 미술관이 미국에서 가장 높은 비율로 밀집한 캘리포니아에서 예술과 과학의 적극적 상호작용에 대해 관련 기관들이 오랜 연구를 통해 교감하고 혁신적인 전시로 공유하는 협업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 시인 아라토스가 신화 속 뮤즈 우라니아와 우주의 신비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새긴 시리아 출토 고대 은판. 게티뮤지엄의 기획전 ‘루멘: 빛과 예술의 과학’에서 눈길을 끄는 유물들 가운데 하나다.

엘에이 시내와 패서디나, 샌타바버라, 글렌데일, 샌디에이고 등 남부 캘리포니아 일대에 800명 이상의 작가와 기획자들이 참여해, 예술과 과학이 만나는 최전선의 작업들을 보여주는 70여개의 전시가 내년 1월까지 이어질 참이다. 첨단 설치미술과 디지털 아트, 엔에프티(NFT), 고대 그리스·로마부터 중세기, 특히 이슬람 세계의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짚은 기획과 나사의 우주탐사 기획전까지 세계 미술계의 관심을 집중시킬 대형 전시들이 수두룩하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게티재단의 본거지 게티뮤지엄의 전시들. ‘루멘(Lumen): 빛의 예술과 과학’을 필두로 ‘확대된 경이로움: 18세기 현미경’, ‘추상화된 빛: 실험 사진’ 등의 전시가 잇따라 막을 올렸다. 특히 ‘루멘’전은 기원전부터 17세기까지 빛에 대한 종교적 성찰을 형상화한 서구의 여러 성물들과 아스트롤라베, 구체 등의 측정 장치를 비롯해, 고대 그리스 시인 아라토스가 신화 속 뮤즈 우라니아와 우주의 신비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새긴 고대 은판 같은 희귀 유물들이 나왔다. 몽롱한 빛을 내뿜으며 착시를 일으키는 헬렌 파시지안의 2023년 작 발광설치작품 ‘무제’와 미술관 로비에 쏟아지는 자연광을 무지갯빛으로 뒤바꾼 찰스 로스의 광학적 설치 작품들도 한켠에 따로 설치됐다.

게티뮤지엄의 기획전 ‘루멘: 빛과 예술의 과학’의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이 17세기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지구의 구체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미국 서부에서 게티와 쌍벽을 이루는 전시기관인 로스앤젤레스카운티뮤지엄(라크마)에서는 팝스타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를 포함한 1980년대판 첨단 영상물부터 2000년대 이후의 디지털 미디어아트까지 첨단 영상예술의 40여년 역사를 처음 대규모 회고전 얼개로 정리해 엮은 ‘디지털 증인들: 디자인, 사진, 영화의 혁명’의 전시 내용을 선보여 시선을 집중시켰다.

베벌리힐스 근처 해머미술관의 ‘숨(쉬기): 기후 및 사회정의를 향해’ 특별전에선 제주 해녀의 삶을 바라본 영상 설치작품을 내놓은 한국의 작가그룹 ‘이끼바위쿠르르’(조지은·고결)와 일본 쓰시마섬(대마도)에 흘러들어온 한국의 쓰레기 부유물을 모아 괴물 모양의 설치작품을 만든 양쿠라 작가의 작업이 관심을 모았다.

해머미술관에 마련된 ‘숨(쉬기): 기후 및 사회정의를 향해’ 특별전에 제주 해녀의 삶을 바라본 영상 설치작품을 내놓은 한국의 작가그룹 ‘이끼바위쿠르르’의 조지은 작가(오른쪽)와 고결 작가.
해머미술관에 마련된 ‘숨(쉬기): 기후 및 사회정의를 향해’ 특별전에 일본 쓰시마섬(대마도)에 흘러들어온 한국의 쓰레기 부유물을 모아 괴물 모양의 설치작품을 만든 양쿠라 작가가 지난 12일 취재진 앞에서 설명하고 있는 모습.

패서디나 교외 헌팅턴 라이브러리 미술관의 전시 ‘스톰 클라우드(폭풍 구름): 기후 위기의 기원을 상상하다’는 18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던 세계 곳곳의 풍경이 예술가들의 감각에 미친 영향을 러스킨의 구름 드로잉 같은 200점의 예술 작품과 아카이브를 통해 꼼꼼하게 재구성했다.

에이즈에 걸린 게이 작가들의 내면을 표현한 조형물 등을 통해 ‘질환과 장애’를 표현한 샌디에이고현대미술관의 전시 또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기후변화, 인공지능, 디지털화 등에 맞닥뜨린 현시대 예술과 과학의 만남은 필연적 흐름으로 비친다. 하지만 이는 디지털 시대의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고대부터 우주와 세계를 고민했던 인류에게 오랜 화두였고, 작가들에게는 절박한 과제이며 문명사회의 필연적 흐름이라는 것을 피에스티 아트 프로젝트의 전시들은 일러주었다.

지난 15일 피에스티 아트 프로젝트의 개막 행사로 엘에이올림픽콜리시엄 경기장에서 진행된 중국 작가 차이궈창의 폭죽놀이 퍼포먼스의 모습.

지난 15일 중국 현대미술가 차이궈창이 개막을 알리는 퍼포먼스로 2028년 올림픽 주경기장인 엘에이 메모리얼 콜리시엄에서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초대형 폭죽놀이를 펼쳤다가 굉음과 파편 낙하로 관객이 다치고 재단 쪽이 사과하는 돌발사태를 빚은 건 그런 면에서 주제(‘예술과 과학의 충돌’)를 위력으로 과시한 선언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구글에서 ‘PST ART’를 치면 내년 1월까지 펼쳐지는 세부 전시정보들을 검색할 수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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