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통감 괴롭히고 유일한 의병 사진 남긴 진짜 ‘영국신사’들[이기환의 Hi-story](71)

2023. 2. 2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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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국권 침탈기에 조선과 대한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평생을 싸운 영국인들이 있다. 그중 항일신문인 대한매일신보(왼쪽)를 창간한 어니스트 베델과 1907년 각지를 돌며 의병전쟁을 취재하면서 분투하는 의병들의 사진(오른쪽)을 찍고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한 프레더릭 매켄지 기자가 대표적이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이 이토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기사)이 한국인을 감통(느낌이나 생각이 통함)시키는 힘이 크다. 그중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 계속되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의 언급입니다. 대한제국을 집어삼킬 야욕을 거리낌 없이 펼쳐가던 이토를 괴롭힌 ‘일개 외국인’이 누구일까요.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인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이었습니다.

최근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한·영 수교 140주년을 맞아 영국 브리스톨시에 ‘베델(한국명 배설) 동상’의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저는 “일제강점기 영국 출신의 독립운동가가 베델을 비롯해 6명에 이른다”는 보훈처장의 언급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요. 그분들은 베델(대통령장)과 프레더릭 매켄지(1869~1931)·조지 루이스 쇼(1880~1943)·프레더릭 브라운 해리스(1883~1970·이상 독립장), 더글러스 스토리(1872~1921)·어거스틴 스위니(1909~1980·이상 애족장) 등입니다.

진정한 영국신사 6명 ‘영국신사’라는 말이 있잖아요. ‘영국인들이 여성과 약자를 배려하는 신사도를 중시한다’는 표현이죠.

적어도 이 여섯분이야말로 진정한 ‘영국신사’라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분들이 활약한 19세기 말~20세기 초 영국은 우리에게 절대 ‘신사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1885년(고종 22)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나라가 영국이었죠. 영국과 일본은 1·2차 동맹(1902·1905)을 맺어 ‘영국=청과 인도, 일본=대한제국과 관련된 특수한 이익과 지배권’을 서로 보장해줬죠.

하지만 그 와중에서 한국을 위해 몸을 바친 영국인이라면 그분들이 ‘영국신사’가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그중 대표적인 영국신사는 바로 베델이라 할 수 있죠.

베델은 서른두 살 때인 1904년 3월 10일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으로 조선에 부임합니다. 2월 8일 발발한 러일전쟁을 취재할 종군기자 자격이었습니다. 기자정신을 발휘해서 특종기사까지 실었지만, 곧 해임됐습니다. 데일리 크로니클이 친일성향의 신문이었기 때문에 베델의 체질과 맞지 않았던 겁니다.

베델은 아예 대한제국에서 터를 잡습니다. 한글과 영문을 섞은 대한매일신보(The Korea Daily News)를 창간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가 된 영국인은 베델(대통령장), 프레더릭 매켄지(1869~1931)·조지 루이스 쇼(1880~1943)·프레더릭 브라운 해리스(1883~1970·이상 독립장), 더글러스 스토리(1872~1921)·어거스틴 스위니(1909~1980·이상 애족장) 등 6명이다. / 국가보훈처 소장



물론 베델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발행인 겸 편집인이 베델이었고, 양기탁(총무)과 박은식(주필), 신채호(필진) 등이 참여했습니다. 1904년 7월 18일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곧 항일의 필봉을 휘둘렀습니다.

7월 22일 영문판(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일제의 ‘황무지 개간 계획’을 비판하는 글을 실어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비판하는 여론을 일으켰습니다. 일제가 한반도 땅의 3분의 1에 달하는 황무지 개간권을 움켜쥐겠다는 야욕을 드러내자 “절대 안 된다”고 나선 겁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등이 시중의 여론을 주도하자 일제의 ‘황무지 개간 계획’은 철회됐습니다.

영문판 ‘시일야방성대곡’ 보도 1905년 11월 27일자에는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장지연(1864~1921)의 논설(‘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영문 번역기사를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호외로 발행했습니다.

1906년 1월 29일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조목조목 기록한 밀서를 영국 트리뷴 기자인 더글러스 스토리에게 건네주었는데요. 스토리는 이 밀서를 2월 8일자 트리뷴에 보도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1년 이상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스토리는 그해(1906년) 12월 1일 ‘동양의 미래’라는 기획기사를 쓰면서 다시 이 문제를 다뤘고, ‘밀서’ 사진까지 실었답니다.

대한매일신보도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1907년 1월 15~16일자에 ‘스토리 밀서’ 기사를 밀서 사진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실었습니다. 대한제국 국새가 찍힌 밀서의 골자는 “을사늑약은 한국 황제가 동의하지도, 서명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1월 23~24일자에는 논설을 통해 이 밀서를 부정하는 일본과 친일내각의 주장을 비판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인들의 협박으로 이 밀서가 가짜로 규정될 경우 고종의 진심이 허사가 될 것을 우려해 ‘스토리 밀서’의 진상을 낱낱이 밝혔습니다. 이어 1907년 2월부터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해 관련 논설과 미담, 의연 인원 명단을 대대적으로 실었답니다.

경천사탑 강탈사건을 끝까지 추적 보도 그즈음(1907년 2월 초) 경기 풍덕군 부소산 절터에서 천인공노할 사건이 일어납니다.

1348년(고려 충목왕4) 제작된 높이 13m의 대형 대리석탑이 사라진 겁니다. 범인은 황태자(순종·재위 1907~1910)의 혼례식에 참석한 일본 궁내부 장관인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1843~1939)였습니다. 평소 학술자료를 통해 경천사탑에 눈독을 들였던 다나카가 대한제국 방문길에 무뢰배들을 동원해 탑을 무단 해체한 뒤 일본으로 반출한 것입니다. 다나카는 “고종이 탑을 기증했다”고 강변했지만 새빨간 거짓이었습니다. 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하며 탑을 140조각으로 뜯어 실어 날랐습니다.

베델은 그 꼴을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3월 7일 이 천인공노할 뉴스를 특종 보도합니다.

“일본의 특사 다나카 궁내대신의 흉계로 무기를 가진 일본인들이 경천사탑을 급습해 탑을 해체한 뒤 실어갔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당시 무려 1만3000부를 발행했는데, 이것은 당시 모든 신문 총발행 부수보다 많았답니다. 그런 대한매일신보가 나섰으니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고종 황제의 허락을 얻었다는 것은 꾸며낸 말이다”(4월 13일), “석탑을 빨리 되돌려보내 잘못을 사죄하라…. 일본으로선 역사의 무한한 수치가 될 것…”(6월 5일)이라고 끈질기게 파고들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한글판과 국한문 혼용판, 영문판(코리아 데일리 뉴스) 등 3개 매체를 발행했다. / 국립중앙도서관·연세대중앙도서관 소장



베델과 함께 당대의 교육자·언론인·사학자이자 독립투사인 호머 헐버트(1863~1949)는 이 문제를 국제 여론에 호소했습니다.

결국 경천사탑은 1918년 11월 15일 약탈한 그대로,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반환됐습니다. 거센 비판 여론에 서슬 퍼런 일제도 두 손을 들었던 겁니다.

대한매일신보는 또 친일외교관 더럼 스티븐스(1851~1908)를 처단한 장인환(1876~1930)·전명운(1884~1947) 의거의 상세한 소식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양씨(장인환·전명운)의 피(血)가 아니면 우리의 원통한 것을 세계만국에 공표했을까. 오호라. 한국 독립은 곧 오늘이요. 한국 자유는 곧 오늘이니 우리의 큰 뜻을 이룰 날이오….”(1908년 4월 17일)

일제의 핍박에 서른일곱 살에 서거 이 정도였으니 일제가 얼마나 눈엣가시처럼 생각했겠습니까.

“일제는 베델의 우편물까지 하나도 거르지 않고 검열했고… 그의 집 주변에는 첩자가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매켄지 기자)

결국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대한매일신보 탄압에 나섭니다.

일본에 우호적인 영국 정부에 “대한매일신보에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외교문제로 부각시킨 거죠.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에 게개된 몇 가지 논설을 번역해 영국 정부에 보냈습니다.

일본과 밀월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은 베델을 법정(영사재판)에 두 번(1907·1908)이나 세웠습니다.

이 재판을 지켜본 매켄지 기자는 “이 재판은 영국의 언론자유에 관한 금세대 최악의 타격이었다”고 개탄했습니다.

매켄지는 “의병의 영롱한 눈초리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고 그들의 애국심을 보았다”고 했다. 의병들은 매켄지에게 “어차피 우리는 죽게 되겠지만 일본의 노예가 돼 사느니보다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좋다”고 했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결국 베델은 ‘의병 및 스티븐스 처단 기사 등으로 소요를 일으키거나 조장시켜 공안을 해쳤다’는 죄목으로 3개월 금고 등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베델은 중국 상하이(上海)의 영국영사관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는데요.

출소한 베델은 1908년 7월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강건했던 베델도 급격하게 쇠약해졌습니다.

영국 정부에 의해 자행된 옥살이와 일제의 끊임없는 박해가 그의 심신을 갉아먹었던 겁니다. 결국 1909년 5월 1일 서른일곱 살의 젊은 나이에 서거했습니다. 베델은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해 대한의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미스터 션샤인>의 의병 사진을 남긴 영국인 저는 일제가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를 문제삼아 영국 정부에 제시한 논설·기사 중 ‘의병’ 기사가 눈에 밟혔습니다.

“내륙지방에서 전해진 믿을 만한 소식이다…. 의병들이 50명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서 8명을 죽이고… 일본군은 아낙네와 아이들 죽이고….”(9월 12일) “한국의 내륙을 목격한 사람의 목격담인데… ‘어느 날 저녁 의병 10명을 만났다…. 의병들은 민족을 구하지 않으면 중도에 죽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일본인들이 약탈하고 능욕하고 살인하고 있었다.”(9월 24일)

이 기사에 등장하는 ‘한국의 내륙 상황을 전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1904년 영국 데일리메일 극동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입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의병을 취재하고 사진을 찍은 외국기자의 모델이 바로 매켄지 기자입니다. 유일하게 남은 ‘항일의병’ 사진입니다.

당시 서울에 머물던 매켄지에게 들려온 지방 소식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고종의 폐위와 군대해산 후 곳곳에서 항일의병이 궐기했다는 소문이 속속 들려왔습니다.

매켄지는 현장취재를 통해 확인하려고 길을 떠납니다. 경기 이천~충북 제천~강원 원주를 거쳐 의병이 자주 출몰한다는 경기 양평으로 발길을 돌렸는데요. 취재길에 잿더미가 된 고을과 주민들의 일관된 ‘일본군 만행’ 증언을 보고 들으며 충격에 빠집니다.

1906년 1월 고종 황제는 영국 트리뷴의 더글러스 스토리 기자에게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는 밀서를 전달했다. 밀서의 내용은 “(을사늑약에) 한국 황제가 동의하지도, 서명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스토리 기자는 고종의 밀서를 1년 이상 끈질기게 다뤘다.



“일본군은 집을 불태우지 말라고 애원하는 노인을 쏘아 죽였다. 한 임산부는 해산이 가까워 집에 누워 있다가 참변을 당했고….” 일본군이 여인들을 능욕했고, 심지어 열 살짜리 여자아이까지 총을 쏴 죽였답니다. 특히 일본군은 의병과 격전을 벌인 제천 시내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이 와중에 미처 피하지 못한 남녀와 아이들이 불에 타 죽었답니다.

의병의 눈초리에서 애국심을 보았다 매켄지 일행이 양평에서 숙소를 잡았을 때 드디어 의병 5~6명이 나타났습니다.

“준수하고 훤칠한 청년은 구식 군대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군복 바지, 두 사람은 초라한 누더기 한복 차림…. 여섯 명의 총이 제각기 달랐는데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매켄지는 “희망 없는 전쟁에서 이미 죽음이 확실해진 이 사람들이 매우 측은하게만 보였다”고 했습니다.

매켄지는 그러나 “의병의 영롱한 눈초리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고 그들의 애국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의병들은 매켄지에게 확고한 의지를 밝혔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일본의 노예가 돼 사느니보다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매켄지 기자는 의병들과 하룻밤을 지내면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누더기가 된 그들의 옷을 빨아주었습니다. 음식도 먹였습니다.

다음날 의병들은 만날 때의 그 ‘보잘것없는 장비와 열악한 차림으로’ 열 지어 떠났습니다.

매켄지는 혹시 자신이 가지고 간 호신용 무기들이 없어졌나 하고 살폈지만 그대로였습니다. 의병들이 아무리 처지가 궁하다 해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등의 무례한 짓은 자행하지 않았다는 뜻이죠.

숙소를 떠난 매켄지 일행은 자갈과 모래가 깔린 강변에서 20여 명의 의병과 맞닥뜨렸습니다.

신식 군대의 제복을 입은 청년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몇 명은 14~16세가 채 안 되는 소년들이었답니다.

매켄지는 이 의병들의 사진을 찍었는데요. 이 사진이 역사에 길이 남을,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모델로 삼은 유일한 의병 사진입니다. 매켄지는 이 의병들의 활동상과 일제의 잔학상을 담은 책 <대한제국의 비극>(Tragedy of Korea)을 발간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매켄지와 베델이 없었다면 우리는 1907년 고종 폐위와 군대해산 후 들불처럼 일어났던 항일의병의 생생한 장면을 증거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제까지 진정한 영국 신사의 삶을 살펴보았는데요. 베델 선생이 서거한 뒤 박은식·양기탁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답니다. “구주(유럽)의 열혈남아가 조선의 어둠을 씻어냈네.”(박은식) “대영(영국) 남자가 대한에 와서 캄캄한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양기탁)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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