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톱인 이유도 알겠고 지금까지 커리어만으로도 예능 전설인데 영화로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나 열정이 진심으로 다가와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음
“그래, 이분은 역대 대통령들을 전부 인터뷰한 사람이었지.” 인터뷰를 앞두고 자료 조사를 하다 새삼스럽게 떠오른 생각이다. 이경규는 툭하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녹화 시간이 길어지면 짜증을 내는 이미지와, 그럼에도 남녀노소 모두에게 호감을 얻는 코미디언으로서, 대선을 앞둔 정치인을 인터뷰할 수 있는 신뢰감까지 갖춘 드문 방송인이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이경규가 간다’를 통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났고, 김 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방송인으로 꼽혀 따로 식사 자리도 가졌다는 일화가 유명하며(1997년 김 전 대통령이 냈던 문화·역사 에세이 제목도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이다), ‘이경규가 간다’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난 데 이어 <느낌표>에서도 VCR로 질문을 던졌고, <힐링캠프-좋지 아니한가>(이하 <힐링캠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을 인터뷰했다. 아이디어 회의에 직접 참여하는 성실한 기획자로서 한국 예능사의 굵직한 분기점을 직접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1980년대의 콩트를 지나 90년대의 토크 및 버라이어티 시대가 열렸을 때 이경규는 주병진 옆에서 토크 보조를 하다가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몰래카메라’로 신드롬을 일으켰고, 21세기 들어 <일요일 일요일 밤에> ‘대단한 도전’을 통해 한국 예능 최초로 ‘캐릭터’를 잡는 트렌드를 선도했다. ‘양심 냉장고’로 공중도덕과 준법정신의 중요성을 일깨웠을 땐 돌연 일본 유학을 떠났다. 현지에서 일본 예능 프로그램을 공부하며 그곳에서 봤던 세트에서 영감을 얻어 한국에 돌아와 아이디어를 낸 <야!한밤에>의 ‘보고 싶다 친구야’의 포맷은 이후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변주됐다.
지난해 9월 카카오TV에서 론칭한 <찐경규>는 ‘예능 대부’ 이경규가 디지털 세대의 신문물을 배우는 등 매회 새로운 도전을 하는 숏폼 콘텐츠다. 누적 조회수 5500만뷰, 단일 에피소드 조회 수 350만뷰를 돌파하며 예능계 패러다임의 전환에 완벽히 적응한 40년 경력 방송인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런 그가 ‘영화’ 이야기만 나오면 다른 사람이 된다. 무려 30년 가까이 감독·주연·각본·기획을 맡은 <복수혈전>이 예능의 웃음 소재가 되는 것을 막지 않으면서, “영화는 남지만 코미디는 남지 않는다”라며 눈을 반짝인다. 강우석 감독 역시 동갑내기 이경규를 “영화에 대한 마음이 지쳐 있을 때 이경규가 내 멘토”였다며 “영화 얘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는 감독”이라고 묘사했다(<힐링캠프>). 어쩌면 그는 자신을 혹독히 채찍질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실패를 한껏 놀리는 분위기를 기꺼이 끌어안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예능 대부’의 후광도 섣불리 누리지 않으려 한다. 이경규는 의외로 그가 쉽게 갈 수 있는 길, 가령 자신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자금을 보다 수월히 유치한다거나 예능인으로서 받은 부당한 편견을 널리 토로한다거나 자신의 열정을 내세워 왠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의 작품을 봐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형성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제작을 맡은 영화 <복면달호>의 홍보 기간 <황금어장-무릎팍도사>의 녹화를 고사했다가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나서야 출연한 일화를 보아도 그렇다. 자기 작품에도 냉정하다. 개인적인 만족도를 별점으로 매기면 <복수혈전> 별 1개, <복면달호> 별 2개 반, <전국노래자랑> 별 3개란다. 이경규의 제작사 인앤인픽쳐스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함께 준비했던 권지원 현 리틀빅픽처스 대표는 그와 몇편의 시나리오 개발을 하며 영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눠온 동료다. 권지원 대표는 이경규에 대해 “영화만큼은 굉장히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임한다. 영화도 많이 보고 취재도 자료 조사를 무척 성실하게 한다”고 전했다. “일주일 중 3~4일이 예능 프로그램 스케줄이라면 나머지는 주말까지 풀로 동원해 책을 읽거나 회의를 하며 작업하는 스타일이다.”
현재 권지원 대표와 준비 중인 작품 외에도 세편의 시나리오를 개발 중이라는 이경규를 만났다. 이날 인터뷰는 6월 9일 방영 예정인 <찐경규>의 에피소드 녹화를 위해 <복수혈전> 당시 신사동 제작사를 시작으로 그간 엎어진 프로젝트를 준비했던 제작사를 찾아가고, 현 이경규의 회사 앵그리독스가 위치한 리틀빅픽처스 내 사무실 공간에서 회의하는 모습을 촬영한 이후 진행됐다. <씨네21> 화보 촬영 및 인터뷰에 관한 에피소드 또한 <찐경규>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지금이야 많은 예능인들이 유튜브나 카카오TV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예능 프로그램을 하지만 카카오TV가 막 론칭했을 때 톱 방송인이 디지털 시장에 뛰어든다는 건 굉장히 도전적인 사건이었다. 돌이켜보면 tvN 초창기에도 <화성인 바이러스> <러브 스위치>를 진행했는데.
=1990년대에도 케이블TV가 처음 생겼을 때 현대방송으로 후다닥 달려가 <이경규 쇼>를 했다. tvN이 생기고 얼마 안됐을 때 <화성인 바이러스>를 했고, 종편이 개국하니까 JTBC에서 <한끼줍쇼>를 하고, 채널A에서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를 하자고 해서 또 뛰어갔다. 새로운 플랫폼이 생길 때마다 그냥 달려간다. 왜냐하면 새로운 곳으로 옮긴 사람들은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계속 한쪽에만 있다 보면 날 보는 시선이 어떤 면에서 획일화될 수 있는데, 방송국을 옮기면 그쪽 PD들은 또 다르게 생각한다. 그래서 MBC에 오래 있다가 KBS로 갔을 때 <남자의 자격> 같은 방송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잘 옮겨 다녀서 유재석, 강호동과 함께 지상파 3사에서 연예대상을 다 받아본 방송인이 된 거 아닌가.
=그렇지. 여기서 상 하나 받았다 싶으면 저기로 가보고, KBS에서 <남자의 자격> 하고 SBS로 가서 <힐링캠프> 하고.
-그 <힐링캠프>로 SBS 연예대상을 받았다. (웃음) 만약 카카오TV에 연예대상이 생긴다면 단연 이경규가 유력 후보 아닌가.
=강력 후보지, 강력! (웃음)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걸쳐 모두 대상을 수상한 유일한 예능인인데, 2020년대에도 탈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뭐, 지난해에도 KBS 연예대상 후보였는데, 김숙한테 뺏겼다~! (웃음) 올해 상을 돌려받을 거다. 하하하.
‘요즘’의 느낌을 유지하는 법
-‘예능 대부’로서 그간 거쳐온 궤적이 어마어마하다. 80년대 콩트의 시대를 지나 90년대 버라이어티의 시대가 시작됐고, 90년대 초 <일요일 일요일 밤에> ‘몰래카메라’로 전성기를 누렸다. ‘이경규가 간다-양심 냉장고’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코너가 하나 더 있다. ‘시네마천국’은 고전 명작을 재미있게 패러디하면서 영화적 기법을 동원한 특수촬영을 보여준 코너였다. 영화를 사랑하는 당신에겐 정말 신나는 작업이었겠다.
=그때 우리나라 배우 중 주인공급 되는 분들과 함께 ‘시네마천국’을 많이 꾸몄다. <남과 여>는 김희애씨하고 엉터리 가짜 불어로 연기했다. 고두심 선생님과 <장미의 전쟁>, 최민수씨와 <람보>, 박중훈씨와 <대부>…. 그 시절에 유행한 영화들은 거의 다 패러디했을 거다. 거의 1년6개월 했으니까.
-지금 보면 어떻게 이 섭외가 가능했나 싶을 정도인데.
=그때는 방송국이 힘이 셌다. 방송국에서 부르면 배우들이 무조건 다 나왔다. (웃음)
-아이디어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걸로 유명한데, ‘시네마천국’ 아이디어도 직접 냈나.
=그렇지. 작가, PD들하고 모여서 같이 회의하면서 매주 영화를 골랐다. 그때는 다른 프로그램을 안 하고 이거밖에 안 하니까 시간이 많이 남았다. 매일 회의하고, 매일 촬영하고. ‘시네마천국’은 지금 다시 해도 재밌을 거다.
-사실 <찐경규>에 브레이브걸스가 출연했을 때 <브레이브하트>를 패러디한 것을 보고, ‘시네마천국’의 영향인가 생각했다.
=워낙 그런 패러디를 많이 하다 보니 “브레이브걸스는 <브레이브하트>다, 이건 멜 깁슨이다”라며 하게 된 거다. <편스토랑>에서 요리 주제가 만두 요리였을 때는 <올드보이>를 패러디했다. ‘만두보이’라고. (웃음)
-그럼 지금까지 이경규의 예능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시네마천국’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는 뭐였나.
=김혜자 선생님과 했던 <미워도 다시 한번>. “혜자! 혜자!! 혜자~!!!!!!” 내쪽에서는 비가 오고, 김혜자 선생님쪽은 비가 안 온다. 한강물을 퍼올려서 내쪽에만 비를 퍼부었는데, 물이 많이 오염돼 있더라고. 그래서 촬영 끝나고 피부병에 걸렸다. 알고 보니 김혜자 선생님이 역으로 날 속이는 ‘몰래카메라’였더라고. 참나~.
-예능 프로그램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하면 누구보다 먼저 진출하고, <전파견문록>이나 <스타주니어쇼 붕어빵>을 하면서 어린이들의 생각을 듣고, 나이를 먹으면서 어떻게든 젊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감각을 유지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찐경규>에서 “나는 트로트 안 듣고 방탄소년단이나 이달의 소녀 듣는다”고도 하지 않았나.
=트렌드를 맞추려고 하는 건 아니고, 그냥 걔들이 뭘 하고 있나 보는 거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저런 것도 하는구나. 우리 때는 저런 걸 할 수 있었을까?” 자칫 잘못하면 꼰대가 된다. 웬만하면 나보다 좀 어린 친구들을 자꾸 만나면서 (멋쩍은 듯 웃음을 터뜨리며) 느낌을 잘 유지하려고 한다.
-최근에 96년생 김우석, 99년생 김요한을 ‘규라인’으로 영입했는데. 방탄소년단의 진이나 차은우도 좋아하지 않나.
=그게 이윤석이나 윤형빈 같은 애들이 나이를 먹어서, 신세대들을 만나려고~. 아무래도 세대교체가 필요하다.
-단지 그 이유는 아닌 거 같은데. 혹시 제작할 영화에 캐스팅하려고…. (웃음) 이 친구들 하나같이 마스크가 좋다.
=헤헤헤헤헤. 아니야, 아니야~. 사실 그런 것도 좀 있다. 없다고는 안 한다. 젊은 애들 중에 배우할 만한 애가 누가 있나 살펴보는 거다. 사실 뜨고 난 뒤에는 섭외하기가 어렵다. 뜨기 전에 친해져가지고 빼도 박도 못하게 해야 한다. (웃음)
-그러고 보니 좋은 배우를 많이 발굴했다. 제작을 맡은 <전국노래자랑>에는 <응답하라 1994>를 하기 전의 유연석이 나오고, 이번에 다시 보면서 놀란 게 이정은 배우도 나오더라.
=그분은 우리가 발견한 배우다. 몇 장면 안 나오는데도 빵빵 터뜨렸다. ‘아, 정말 연기 잘한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차기 영화는 무조건 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준비하던 영화를 못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우우우~ 어느새 떠서 <기생충>에 가 있고, <전국노래자랑>에서 김환희도 잘 키워놨는데, 어느 날 보니 어?! ‘뭣이 중헌디’로(<곡성>) 가 있더라고? 이초희씨도 정말 잘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뜰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말 연속극 <한 번 다녀왔습니다>에서 맹활약을 했지. 우리 영화에 나왔던 친구들은 대부분 다 자리를 잡았다.
-배우뿐만 아니라 얼마 전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부문 작품상을 받은 이종필 감독이 있다.
=누구?
-<전국노래자랑>의 이종필 감독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으로 작품상을….
=(한참 침묵이 흐르다가) 이 감독이…? 참나. …아니. 이종…. 이종필이…? (웃음) 종필이가 그랬단 말이야? 그랬어요? 종필이가 장안동 사무실에 3년 동안 처박혀 있었다. 개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했는데, 시나리오를 한 1년 동안 적어도 책이 잘 안 나오더라고. 이게 종필이 거가 아니구나. 그사이에 <전국노래자랑>을 하게 됐다. 종필아, 이거 시나리오도 이미 다 되어 있는 거니까 이걸 해라. 감독 데뷔는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하는 거지 무조건 좋은 작품, 너한테 맞는 거만 기다리면 언제 하겠니? 해! 그랬다. 그런데 백상을 탔다고? 자식이, 연락이 없어. (옆에서 <찐경규>의 권해봄 PD가 “선배님 거쳐간 배우, 감독님들 다 대박나더라. 그러면 저도 <찐경규> 다음 작품이 대박나고….”)
-차태현 배우는 <복면달호> 바로 다음해에 <과속스캔들>을….
=참나, 아니 말이야! 차태현 배우도 그래. <복면달호>에서 대박을 내줘야지 왜 <과속스캔들>로 800만을 하냐고. <복면달호>로 떠서 <과속스캔들>로 간 거 아냐?
-제작자로서 안목이 좋아서 남들보다 너무 일찍 알아본 거다. 원래 배우였던 이종필 감독이 연출을 잘할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아봤나.
=그 친구가 연출했던 독립영화들을 봤다. 영화가 괜찮더라고. 그래서 내가 감독 데뷔를 시켰는데…. 그런데 이번 영화가 백상 작품상….
<복수혈전>의 이경규, 그 이후의 이경규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가장 정상에 있을 때 늘 새로운 걸 도전했더라. 자주 자랑하셨듯이(웃음) 오랜 무명 끝에 90년대 초 어떤 설문조사에서 ‘결혼하고 싶은 남자 1위’도 하지 않았나. 그리고 바로 <복수혈전>의 제작과 연출과 주연을 맡았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이경규가 간다-양심 냉장고’ 편으로 또 다른 정점에 올랐을 땐 김밥전문점 체인 사업을 시작했다. <복수혈전>을 만들 때는 어떤 마음이었나.
=(한참 허탈한 듯이 웃더니) 내가 미쳤었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 미치지 않고서는…. 그때 들어간 돈이 한 4억원 됐다. 당시 강남에 빌딩을 살 수 있는 돈이다. 그게 다 내가 광고하고 방송해서 번 출연료였다. 홀라당 다 부어넣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그게 성공했다면 난 코믹 배우, 희극 배우의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매주 해야 하는 TV 코미디가 너무 힘들었다. 조금씩 자기 관리도 해가면서 가끔씩 작품 들어가는 배우의 길을 생각했는데, <복수혈전>이 망하면서 바로 돌아왔다.
-그런데 당시 자료를 좀 찾아보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망하지는 않았던데. 적어도 수십년 동안 예능 프로그램에서 후배들이 공격하고 놀리고, 쫄딱 망했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에는 관객수가 얼마로 찍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2만~3만명은 들어온 걸로 안다. 그때는 관객수 10만명 넘으면 대박이었으니까 사실 관객만 보면 그렇게까지 망하진 않았는데, 지방에 영화를 팔았을 때 받은 어음이 부도가 많이 났다. 그쪽에 있는 분들은 내가 또 영화를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영화 만들고 비디오판권 말고는 번 돈이 한푼도 없다. 그래도 비디오 판권은 좀 많이 받았는데….
-4억원 들여 2억원 수익 올린 걸로 아는데, 예능에서 그렇게 우려먹을 정도로 망한 건 아니지 않나.
=어음을 못 받아서 망했다는 게 아니라! 아니, 망했어. 망했다니까? (웃음) 일일이 다 설명하기가 힘들어서 그냥 망했다고 결론내린 거다. 후배들이 놀릴 때 ‘어음이 부도가 났네’ 이런 사정을 어떻게 다 얘기하나. 그냥 망한 거야. 절반은 성공했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작품성? 망했다. 그냥 쫄딱 망한 거다. 그때 당시에는 영화 촬영 기법의 수준이 낮았다. 지금은 촬영 분량을 다시 볼 수 있지만 당시엔 필름으로 찍었기 때문에 연기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촬영감독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잘 찍을 수가 없었다.
-<복수혈전>은 당시 서울 지역에서는 스카라극장이랑 씨네하우스에서 개봉했다.
=그때 비디오 판권을 파는 조건이 국내 7대관에서 개봉하는 거였다. 개봉관에서 개봉하지 않으면 그 비디오 판권은 부도가 날 수 있다고 계약이 돼 있었다. 7대관 중 하나인 스카라극장 사장 아들이 대학교 후배다. 흥행에 상관없이 제발 일주일이라도 걸어달라고, 아니면 비디오 판권이 날아간다고 막 부탁을 했다. 씨네하우스는 원래 영화를 잘 안 걸어준다. 아시아영화제 할 때 홍콩 배우들이 참석한 회식 자리에 갔다. 거기서 씨네하우스 사장님과 술을 먹으면서 제발 개봉해달라고 물밑작업을 했다. 몸으로 뛰어서 부도를 막았다.
-<복면달호> 캐스팅 과정이 험난하지 않았나. 시나리오만 3년 돌린 걸로 아는데, <복수혈전>이 잘 안됐다고 그간 예능 소재로 쓰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를 한 적은 없나.
=지나서 보니 <복면달호>는 차태현이 하게 될 운명이었다. 정말 많은 배우들에게 책을 줬지만 다 임자가 있었다. <복면달호>는 차태현이 제일 잘 소화할 영화였다. 그리고 내가 <복수혈전>이 안됐다고 예능에서 말을 했든 말든 책만 좋다면 상관이 없다. 다만 그때 당시에 <복수혈전>하고 <복면달호>, ‘복’ 자가 똑같다고 <복수혈전> 비슷하게 이 영화도 망하겠다고 한 건 있었지.
-<복면달호> 무대 인사를 120번 넘게, 거제도까지 갔다는 얘기를 듣고 개인적으론 감동적이기까지 하더라. 그렇게까지 홍보 활동에 열심히 뛰어든 영화인은 처음 봤다.
=극장에서도 나한테 얘기했다. 그만 좀 오라고. (폭소) 내가 가면 한명이라도 더 볼 수 있겠다는 마음, 스코어가 중요한 것도 있었지만, 내가 제작자니까 할 수 있는 건 끝까지 다 해야 하지 않겠냐는 마음이 컸다. 극장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다 갔다. 내가 이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차태현씨도 합류해서 80번 정도 무대 인사를 다녔다. 내가 무대 인사를 하면서 말을 너무 많이 하니까 극장에서 그랬다. “이제 영화 상영하니까 그만하세요.” (웃음)
-이렇게 영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는데, 고등학생 때는 시인이 꿈이었다고 어디서 본 것 같다.
=내 친구가 문예창작전에 당선돼서 그 친구랑 시화전 같은 데를 많이 다니면서 생각한 거다. 원래는 동물을 좋아해서 수의사가 되려고 했는데, 그 꿈은 접었다. 영화를 어렸을 때부터 좋아해서 내 손으로 영화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다. 그러다 배우가 뭔지도 모르면서 대학교에 가게 됐다.
-그렇게 입학한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고 유현목 감독을 만났다.
=교수님이 만든 <사람의 아들>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문열 소설을 영화화한 건데 소설도 참 좋다. 기술 시사회 할 때 학생들을 데리고 영화진흥소에 가서 영화를 보여줬다. 영화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그때 당시 <십계> <쿼바디스> 같은 종교영화들이 많았다. 그 영화들보다 2배, 3배 뛰어넘는 영화라고, <십계>는 게임도 안된다고 교수님 앞에서 말씀드렸더니 굉장히 좋아하셨다.
-유현목 감독에게서는 어떤 걸 배웠나
=자기 일에 정말 몰입하는 분이다. 하루는 강의 중에 담배를 피우셨다. 음, 옛날에는 그랬다. (웃음) 그런데 분필을 피우고 계시더라고. 담배인 줄 알고 뻐금뻐금. 그런 것들이 기억에 난다.
-교수님에게 뭘 배웠냐고 여쭤봤는데 왜 그런 일화를…. (웃음)
=그만큼 몰입을 했다는 거지! 강의 도중에 몽타주는 뭐다 하시면서 얼마나 집중하셨으면 분필을 뻐금뻐금 하셨을까.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열정적인 영화 정신을 교수님에게 많이 배웠다. 학교 다니면서 연극도 많이 했고, 선배들이 영화 찍을 때 현장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그런 경험이 내가 나중에 영화를 하게 되는 밑바탕이 됐다.
-원래 연기 전공이라서 그럴까, 연기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간간이 밝혔다. <한끼줍쇼>에서 인생 마지막 영화에서는 조폭 두목 역할을 맡아 욕이나 실컷 해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는데 진담이었나.
=그렇지. 대단한 악역을 한번 해보고 싶다. 사람들이 내가 악역을 한다고 먼저 웃지 않도록, 나를 잘 모르는 외국 사람들이 있는 해외에서 먼저 개봉하고 싶다. 아니면 독립영화에서 악역을 연기하고 싶다.
-진짜 자기 얘기 하는 사람은 못 이긴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은 이경규의 예능 인생을 다 안다. 굴곡이 있었다는 것도, 40년 동안 이 업계에서 버텨왔다는 것도. 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자리에 있다가, ‘이경규 위기론’이 대두될 만큼 미끄러진 적이 있었다. <해피선데이- 남자의 자격>이 재미있었던 것은 자신의 위기와 과거에 대한 반성을 직접 캐릭터화시켰다는 거였다. 방송에서도 직접 말한 적 있지 않나. “내가 참는 걸 못하니까, PD도 떠나가고 여자 작가들은 내가 걸어가면 마치 모세가 홍해 가르듯 피하고, 사람들이 나를 무서워하기 시작했고, 프로그램이 하나둘씩 없어지기 시작했다”고. 이 프로그램엔 우리가 아는 이경규의 절박함과 성장이 드라마처럼 녹아 있어서 큰 울림을 줬다. 이런 면이 직접 연기하는, 혹은 연출하는 캐릭터에 녹아 있다면 어떨까 싶은데.
=원래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다. 자신을 제일 불쌍하게 만드는 게 또 자기 자신이다. 자신을 제일 괴롭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자기 이야기가 많은 다른 사람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거다. 나이를 먹으면 얼굴이 좀 바뀐다. 일부러 보톡스 같은 걸 안 맞는다. 자연스럽게 주름살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내가 내면에 갖고 있는 악이 영화에 잘 표현됐으면 좋겠다. 언젠가 <씨네21>과 영화 주인공으로 인터뷰를 했으면 좋겠다. 최민식이랑 한석규가 내 후배다. 그러니까 나도 연기를 잘하지 않겠나? (웃음)
=그렇지. 동국대 출신 배우들이 참 연기를 잘한다. 그러니까 나도…. (웃음)
-그럼 배우로서 꿈꾸는 캐릭터가 있나.
=<그랜 토리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맡은 역할? (웃음) 남을 위해 크게 희생하는 노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면 영화에서 늘 아프기만 하다. 그런 거 말고 쓸쓸하지만 뭔가 해내는 노인을 연기하고 싶다. 내가 방송계에서는 롤모델이 송해 선생님(1927년생), 외국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1930년생)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전기도 사서 쭉 읽어봤고, 어렸을 때부터 그의 영화는 거의 다 봤다. 어쩌면 연출을 그렇게 잘하는지 부럽더라. 소재 선택도 잘하는 것 같고. 평범한 이야기를 위대하게 만드는 감독이다.
-언젠가 다시 연출을 하고 싶다는 말도 꾸준히 해왔는데 언제쯤 감독 이경규를 만날 수 있을까.
=10년 안쪽으로는 할 거다, 감독과 주연을(이경규는 현재 62살이다.-편집자).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가 70대다. 윤여정 선생님이 이번에 아카데미에서 상 받았다. 그렇게 나이 먹고도 이 일을 꾸준히 하는 분들이 있다. 지금 오락 프로그램을 몇개 하고 있어서 이걸 다 하고 나면 꼭 해야지. 부지런히 연출 공부도 해야 한다.
다음 작품에서도 인간의 ‘꿈’을
-영화계는 지금 OTT 때문에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최근의 흐름을 어떻게 보나.
=코로나19가 진정되면 사람들은 다시 극장에 가게 될 거다. 왜냐하면 극장은 그냥 영화만 보러 가는 곳이 아니다. 극장 근처 가서 밥 먹고 데이트하고 하는 모든 코스가 포함되는 문화생활이다. 뮤지컬이나 연극처럼.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주는 정서적인 면이 있다. 그리고 “야, 나 IPTV로 <복면달호> 봤어!” 하는 거랑 “야, 나 극장 가서 <복면달호> 봤어!” 하는 거는 느낌이 다르지 않나? (웃음) 원래 영화는 3~4명이 같이 봐야 재밌다. 그러고 극장 나와서 막 씹고 이래야 재밌지. “야! 이 영화 돈 아까워 죽겠어!” (갑자기 특유의 버럭 하는 목소리로) “야, 임마, 니가 왜 이걸 보자고 해가지고!” 이런 재미가 있지. 아니면 소주 한잔하면서 이 영화는 감독이 어떠하고, 연출이 어땠고 뭐가 좋지 않았니? 그 배우는 어쩜 연기를 그렇게 잘하냐며 커피숍 가서 할 얘기들이 있다. 방바닥에 앉아 혼자 보면 어디 씹을 데도 없다. 누구한테 전화 걸어서 갑자기 막 씹을 거야? (웃음) IPTV나 OTT에서 혼자 맥주 먹으면서 영화 보면 헬렐레 취해서 그 영화 봤는지 안 봤는지 어디 가서 얘기하기도 그렇다. 돼지갈비, 삼겹살 구워가면서 극장에서 봤던 영화 얘기를 하는 낭만이 없어진다면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
-<씨네21>을 위해서라도 극장 영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웃음)
=당연하지! <씨네21>이 살아야 한다! 영화 잡지도 사람들이 많이 봐야 한다. 사람들이 영화를 알고 보는 거랑 모르고 보는 거랑 천지 차이다. <씨네21>을 통해 이 감독이나 제작자가 어떤 생각을 갖고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고 봐야 더 재미있다. 미술관에 큐레이터가 왜 있을까? 큐레이터 빼고 보면 재미 하나도 없다. 이야~ 내가 고갱 전시를 보러 갔는데 큐레이터가 이런 설명을 해줬는데 이런 의미가 있더라고! 이래야 있어 보이지 않나? 인스타그램에도 올리고, 그런 것들이 다 문화생활이다. 전염병은 21세기에만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존재했다. 우리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분명 다시 극장에 와서 영화를 볼 것이다. 그리고 한국만큼 스토리가 풍부한 나라도 없다.
=전세계에서 분단국가가 우리밖에 없지 않나? <공동경비구역 JSA>나 <국제시장>은 한국에서만 만들 수 있는 영화다. 여기엔 너무 많은 소재들이 있다. 내가 <조선시대 호랑이>라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영조 때 호랑이가 너무 많아서 1년에 한 500명씩 물려 죽었단다. 그래서 호랑이를 잡아오면 나라에서 상을 줬다. 호랑이가 부모를 잡아먹어서, 호랑이를 잡기 위해 활을 연습하고, 결국 그 호랑이의 배를 갈라서 어머니의 뼈를 꺼내 제사를 지내는 이야기다. ‘효’까지 담았다. 그래서 (최)민식이한테, 민식이가 내 후배거든, 술자리에서 얘기해줬다. 민식아, 영조 때 호랑이가 말이야~. “형, 술이나 먹어.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말고. 호랑이를 어디서 구해서 찍어?” 그리고 그 기획은 날아갔다. 근데 한 3년 후에 <대호>를 했더라. 내 스토리가 훨씬 좋은데! (웃음)
-지금까지 작품을 보면 누군가를 향한 편견, 지지 않는 꿈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복면달호>는 트로트에 대한 편견이 주된 소재였고, <전국노래자랑>에는 노래에 대한 꿈을 놓지 않는 주인공이 나온다. “코미디는 내 직업이고, 영화는 내 꿈이다. 꿈을 안고 살아가야 인생이 행복하고 즐거워지지 않을까”라고 했던 영화인 이경규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아마 다음 작품도 인간의 ‘꿈’을 다루게 될 것 같다. 이 영화가 내 세 번째 영화가 될 것이다.
-…. 그게 왜 세 번째인가.
=네 번째, 네 번째 영화! (주변 폭소) 나는 그 영화는! 정말…. 정말 잘 만들 거다. 인간의 불멸의 의지를 보여주는 그런 영화. 소재를 잘 선택했다는 말을 듣고 싶다. 실화 바탕인데 그 인물에 대해 굉장히 많은 공부를 했다. 시나리오는 거의 다 썼고 지금 대사를 정리하고 있다. 내년 초에 100% 들어갈 거다. 진짜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나저나 이종필 감독이 아주 충격적이네. 흠…. 작품상을 받아…? (주변 스탭에게) 나 핸드폰 좀 줘봐. 이종필 감독이랑 통화 좀 해보게. 그사이에도 자주 만났다. 애가 참 괜찮아. (진짜로 전화를 건다.) 이 감독! 축하해! 너 백상 받았더라? 작품상! 축하해. 기자님하고 인터뷰하는 도중에 네 얘기가 나왔어. 내가 바다낚시하고 있어서 백상을 못 봤어. 축하해~. 내 영화도 한번 해야지. 내가 준비하는 게 많아~ 권(지원) 대표랑 한번 만나서 소주 한잔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