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고의 재벌가 삼성. 그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유교적 전통이 강하게 지배하던 1960년대 대한민국에서 장남이 가업을 승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자 불문율이었습니다. 따라서 장남 이맹희 씨는 어린 시절부터 삼성의 황태자로 불리며 자연스럽게 후계자 수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삼성의 주인이 아닌 비운의 황태자로 기억합니다. 그가 동생인 3남 이건희 회장에게 왕좌를 내어주고 쓸쓸히 밀려난 데에는 결정적인 사건과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66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카린 밀수 사건, 즉 한비 사건이었습니다. 삼성의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가 사카린을 건축 자재로 위장해 밀수하려다 적발된 이 사건으로 인해, 이병철 회장은 책임을 지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는 장남 이맹희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삼성의 총수 대행 자리에 오른 그는 삼성전자, 중앙일보, 삼성물산 등 주력 계열사의 경영을 도맡으며 실질적인 회장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이 짧은 천하는 6개월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의욕이 앞섰던 이맹희는 아버지와 함께 삼성의 기틀을 닦았던 원로 경영진들과 사사건건 부딪쳤습니다. 자신의 경영 스타일을 고집하며 조직을 장악하려 했지만, 이는 오히려 내부의 반발을 샀고 실적 부진과 경영 혼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버지 이병철이 보기에 장남의 경영 능력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고, 그룹을 이끌어가기에는 그릇이 부족하다는 의구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완전히 몰락시킨 결정타는 경영 능력 부족이 아닌, 바로 아버지의 역린을 건드린 투서 사건이었습니다. 1969년, 청와대에 이병철 회장의 비리와 해외 도피 자금 등을 고발하는 투서가 날아듭니다. 이 충격적인 투서의 주동자는 바로 차남 이창희였습니다.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려는 아들의 패륜적인 행동에 이병철 회장은 격노했습니다.

문제는 이병철 회장이 이 투서 사건의 배후에 장남 이맹희가 있다고 의심했다는 점입니다. 설령 직접 주도하지 않았더라도, 차남의 돌발 행동을 장남으로서 막지 못했거나 혹은 묵인하며 은근히 즐겼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평소 아버지와 경영권 문제로 갈등을 빚던 장남이었기에 그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에서 맹희는 주위의 권고로 그룹 일부를 맡겼으나 6개월도 못 돼 그룹이 혼란에 빠졌다며 그를 경영에서 배제한 이유를 명확히 했습니다.
결국 이병철 회장은 장남 이맹희를 모든 직책에서 해임하고 사실상 가문에서 파문시켰습니다. 반면 당시 묵묵히 경영 수업을 받으며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던 3남 이건희는 형들의 몰락을 통해 자연스럽게 후계자로 부상했습니다. 이건희는 형들이 아버지와 대립할 때 철저하게 몸을 낮추고 경청하는 태도로 아버지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이맹희 씨는 이후 야인으로 전락해 몽골과 중국 등을 떠돌며 은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2012년, 동생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상속 소송을 제기하며 다시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았지만 패소했고, 끝내 삼성이라는 거대한 성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2015년 중국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밀려난 것은 단순히 경영 능력의 차이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창업주인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에 도전한 괘씸죄,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아버지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신뢰의 상실이 빚어낸 비극이었습니다. 삼성의 승계 전쟁은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창업주와의 교감과 신뢰라는 냉혹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권력의 법칙은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과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들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냉철하게 분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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