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생 동안 가장 많이 마신 위스키이자 가장 많은 사람이 즐겨 마시는 위스키인 조니워커.
조니워커의 심장부를 보겠다는 부푼 희망을 안고 조니워커 라인업 전체에 핵심으로 사용되는 싱글 몰트 원액을 생산하는 카듀 증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해보면 내가 일생 동안 가장 많이 마신 위스키는 아마도 조니워커일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인들도 그리 다를 바는 없을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조니워커 블루 라벨은 한때 거의 화폐 단위처럼 사용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쓰여왔다.
선물받은 조니워커 블루를 잘 보관하고 있다가 또 다른 이에게 선물로 주다 보니 돌고 돌아 내가 다시 받게 되는 웃지 못할 경우도 왕왕 있을 정도였다. 무엇이든 정답이 있어야만 마음이 편했던 우리의 우스운 자화상이기도 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마시는지보다는, 남들이 무엇을 좋아하며 마시는지가 더 중요했던 그 시절 우리에게 조니워커, 특히 블루 라벨은 발렌타인 30년과 더불어 검증된 안전한 선택이었다.
물론 내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블루 라벨 같은 최고급 라인보다는 캐주얼한 바나 식당, 아니면 집에서 블랙이나 레드 라벨로 마신 조니워커가 대부분이겠지만 말이다.
마치 대한민국 건국 초기 문맹률이 높아 제헌의원 선거 때부터 기호 몇 번 하는 식으로 후보들을 유권자에게 각인했던 방식과 조니워커 위스키의 명명법은 비슷하다. 바로 색깔로 제품을 구분하게 하는 것이니, 명확한 각인 효과와 손쉬운 선택으로 초기의 성공을 담보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제품군 확장에서도 큰 이점을 갖게 된 셈이다.
그런데 레드 라벨, 블랙 라벨, 골드 라벨, 플래티넘 라벨을 거쳐 최상위 라인인 블루 라벨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싱글 몰트위스키 원액이 하나 있다. 바로 스페이사이드의 심장에 자리한 카듀(Cardhu) 증류소에서 만드는 카듀 원액이다. 그래서 카듀를 제외하고는 조니워커를 논할 수 없다.
하지만 의외로 카듀 위스키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 아니다. 카듀는 늘 조니워커의 일부였기에 오랫동안 카듀라는 이름의 싱글 몰트위스키가 있음에도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물론 카듀 싱글 몰트를 한 잔 마셔보면 왜 조니워커 라인업 전체에 카듀가 핵심 원액으로 사용되는지를 자연히 알게 되겠지만 말이다.

스페이사이드의 심장
몇 해 전 스페이사이드를 처음 방문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가고 싶었던 곳은 맥켈란이나 글렌피딕 같은 유명한 위스키 증류소가 아니라 바로 카듀 증류소였다. 가장 많은 사람이 즐겨 마시지만 정작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는 곳, 그래서 발길조차 뜸한 이곳으로 첫 번째 발걸음을 옮겼다.
중심가인 아벨라워에서 한참이나 택시를 타고 달려간 증류소 초입에서 나를 반겨준 것은 하일랜드 황소들이었다. 얼굴의 털이 길어 일명 ‘헤어리 카우’라고도 불리는 순박하고 귀엽게 생긴 황소들이 침을 흘리며 가볍게 미소 짓는 듯 보였다. ‘너 이제야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반기는 하일랜드 황소들을 뒤로하고 카듀 증류소로 들어섰다.
왠지 모르게 약간 썰렁한 듯했지만 단정해 보이는 첫인상이 내가 상상하던 카듀의 이미지, 바로 그 자체였다.
역사가 200년이 넘은 증류소라고 하기에는 비교적 온전한 건물과 시설들이 눈에 띄었다. 이는 물론 거대 자본인 디아지오의 힘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방문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카듀에는 제대로 된 방문자 예약 센터 같은 것이 없어서, 어렵사리 가기는 했지만 방문 예약도 미리 할 수 없었다.

‘뭐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무작정 내 첫 번째 스페이사이드 위스키 증류소를 찾았다.
도착해서 증류소 경내를 돌아보았는데 별다른 안내 간판도 없었다. 잠시 후 한 직원이 나와서 이곳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지 않는 증류소라고 미안한 듯 말해준다. 그 직원의 눈에서도 이역만리 먼 곳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듯 보이는 내게 일말의 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스페이사이드와 조니워커의 심장부를 보겠다는 부푼 희망을 안고 왔지만, 나는 결국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한 채 증류소의 외관만 살피곤 그대로 나오고 말았다.
그 시절에도 다른 많은 증류소에는 방문자 센터가 있었고, 증류소 투어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었는데 꽤 큰 규모인 카듀 증류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은 그저 묵묵히 그들만의 장인정신으로 위스키를 만드는 스코틀랜드 북부의 어느 시골 마을일 뿐이었다. 그들의 삶과 노력을 지켜보는 이는 하일랜드 황소뿐,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헛걸음을 해서 억울하긴 했지만 사실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나를 탓하며 다시 아벨라워 다운타운으로 돌아왔다. 최근에는 카듀 증류소 개관 20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방문자 센터를 만들고 제대로 된 투어와 테이스팅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하니, 카듀 증류소는 내 다음 스페이사이드 방문의 1순위가 될 것이다.

아벨라워 다운타운, 매시툰 바
증류소에 근무하는 지인의 소개로 이 지역에서는 가장 큰 다운타운인 아벨라워에 왔다. 카듀 증류소에서 바람맞고 돌아온 터라 아쉬움을 달랠 곳이 필요했는데,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아벨라워 위스키 증류소도 이 마을 끝 묘지 옆에 있다. 그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광장에 중화요리 식당과 슈퍼마켓, 작은 서점 겸 식료품점이 있는, 나름대로는 아주 번화한 곳이다.
재미있는 것은 큰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멋진 지팡이 가게가 하나 있다. 영국산 자작나무를 깎아 만든 지팡이인데, 무척 단단하고 만듦새가 훌륭했다.
이 지팡이의 포인트는 손잡이인데 새 부리 모양으로 뾰족하게 혹은 뭉툭하게 나무의 질감을 잘 살려 깎아냈다. 진짜 새 부리인 것처럼 만들었기에 묘한 매력이 있었다. 나도 후일 걸음이 불편해져 지팡이가 필요할 때 쓰도록 미리 하나 사둘까 하는 견물생심마저 들 정도였다. 비행기 반입이 안 될까 봐 결국 망설이다 돌아서고 말았는데, 에든버러 시내에서 그 3배 되는 가격의 지팡이를 다시 만나고는 그 결정을 후회했다.
큰 길가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어가니 마치 증류소의 당화조, 즉 매시툰처럼 생긴 뚱뚱한 건물이 하나 있다. 바로 이 지역의 명소인 매시툰 바이다. 증류소에서는 당화와 발효를 순서대로 하는데, 당화조는 매시툰(Mash Tun), 발효조는 워시백(Washback)이다. 모양은 비슷하나 당화조는 주로 스테인리스, 발효조는 미국 오레곤산 참나무로 만든다. 수제 위스키로 유명한 스프링뱅크 증류소에 가면 워시백이란 멋진 바가 경내에 있다.
아무튼 이 매시툰 바는 아벨라워뿐 아니라 스페이사이드 전체에서도 가장 크고 유명한 바일 것이다.

이곳에 오면 인근에서 생산되는 모든 스페이사이드 위스키의 정수를 맛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이곳을 더욱 훌륭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스페이사이드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이라 들어서면서부터 편한 마음으로 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우선 테넌트 맥주 한 잔을 주문해 갈증을 날린 다음, 적당한 위스키를 고르려 메뉴를 펼쳤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내 입에선 ‘카듀 한 잔!’이란 주문이 먼저 새어 나왔다. 이날 아침부터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내 손에 들어온 카듀 12년 한 잔은 무척이나 달콤했다.
카듀 한 잔을 마시며 찬찬히 바를 둘러보았다. 한쪽 벽면에 밴드를 그린 벽화가 하나 있다. 자세히 보니 그냥 밴드가 아니라 이 지역의 증류소 하나하나를 의인화해 벽화를 그린 것이다. 쟁쟁한 다른 위스키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카듀의 모습이 대견했다.
“그래, 내가 헛걸음을 한 것이 아니야, 카듀의 공기를 한번 들이마실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해. 내가 마신 것은 단순한 알코올이 아니라 정화된 순수한 스피릿이니까.”
이렇게 혼잣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나는 그저 알코홀릭(Alcohilic)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Spiritual) 사람이 된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남은 카듀 12년 한 잔을 다 비웠다

데이비드 베컴과 그레인위스키
재미있는 조니워커 시리즈를 하나 꼽으라면 바로 그린 라벨이다. 조니워커 중 유일하게 블렌디드 위스키가 아니라, 싱글 몰트 몇 가지로만 구성된 블렌디드 몰트위스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조니워커 그린에는 카듀가 들어가지 않는다. 그린 라벨에는 탈리스커, 링크우드, 크라간모어, 쿠일라가 주로 쓰이지만 시기에 따라 구성은 조금씩 바뀌기도 한다. 아일라섬의 쿠일라와 스카이섬의 탈리스커 덕분에 스모키함도 있지만 스페이사이드 지역의 링크우드와 크라간모어의 섬세함과 꽃향기까지 겸비한 균형 잡힌 맛이라 그린 라벨은 조니워커 시리즈 중에서도 인기 좋은 위스키로 꼽힌다.
하지만 때로는 인위적인 꽃향기나 균형 잡힌 맛에 질릴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 같은 그린 라벨이지만 좀 더 독특한 조니워커의 아일랜드 그린을 찾기도 한다. 말 그대로 섬에서 나는 위스키로만 구성된 또 다른 그린 라벨이다. 아일랜드 그린은 시중에서는 볼 수 없어 나는 주로 면세점에서 구입하곤 했다. 주로 아일라섬의 쿠일라를 사용하여 스모키함을 강조하지만, 중성적이고 부드러운 그레인위스키인 카메론브리지를 사용하여 강도를 조절한다.
생소하지만 카메론브리지의 그레인위스키는 아일랜드 그린 외에도 조니워커의 전 제품, 디아지오의 전 제품에 모두 사용되는 그레인위스키로, 부드럽고 중성적이라 그 자체로도 훌륭한 맛을 낸다. 그래서 이 그레인위스키는 마치 향수병 같은 파란색 병에 담겨 ‘헤이그 클럽’이란 브랜드로 판매되고 있다. 유명한 축구선수인 데이비드 베컴이 모델이다.
보통의 블렌디드 위스키에서 그레인위스키는 싱글 몰트위스키라는 아름다운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을 받아들이는 캔버스 역할을 한다. 즉, 싱글 몰트가 더욱 돋보이도록 묵묵히 뒤에서 받쳐주는 역할이다. 이쯤 되면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인 데이비드 베컴을 그레인위스키의 모델로 기용한 이유를 짐작할 법하지 않은가? 베컴은 결코 화려한 드리블과 빠른 속도로 상대 수비를 흔드는 타입의 선수가 아니다. 그는 중원과 측면에서 절묘한 위치 선정으로 볼을 확보한다. 그리고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경로를 설계하고 정확하게 볼을 배급하여 공격수가 골을 만들어내도록 하는 정적인 플레이메이커이다. 바로 그레인위스키의 역할과 동일하다. 싱글 몰트들이 제 역할을 다하도록 뒤에서 모든 것을 지휘하고 판을 짜주는 베컴은 헤이그 클럽에 딱 맞는 모델이고 이런 모델을 선정한 디아지오의 혜안이 놀랍다.
그렇다고 베컴의 공격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는 프리킥의 마스터로서 프리킥만으로도 역대 최다골을 기록하여 팀을 여러 차례 위기에서 구해냈다. 하지만 베컴 본연의 역할은 바로 그레인위스키의 역할이니, 골은 그저 프리킥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의 겸손하고 배려 깊은 성격 덕분에 이 모든 역할이 유기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나는 누구에게 그레인위스키가 될 것인가? 나의 데이비드 베컴은 과연 누구이며, 어디에서 나를 묵묵히 도와주고 있을까?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다시 한번 돌아보자. 그 사람이 ‘나의 베컴’일 것이다.

카듀와 퓨어 몰트
그린 라벨에 카듀가 들어가지 않게 된 데는 사실 꽤 슬픈 사연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카듀 싱글 몰트는 영국과 해외에서 인기가 좋다. 그래서 조니워커의 원액 공급만으로도 벅찬 카듀 증류소에서는 2003년에 카듀 싱글 몰트 대신 다른 싱글 몰트를 같이 넣은 카듀 퓨어 몰트를 출시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맥켈란, 글렌피딕 등 다른 싱글 몰트 회사들이 반발했고, 최종적으로는 소비자에게 혼란을 줄 수 있는 퓨어 몰트나 베티드 몰트라는 말은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신 싱글 몰트들을 섞은 위스키는 반드시 블렌디드 몰트로만 표현하도록 용어를 통일했다. 이 과정에서 원죄가 있는 카듀는 조니워커의 유일한 블렌디드 몰트인 그린 라벨에는 명함을 내밀 수 없었고, 그저 나머지 다른 조니워커 시리즈의 기주 역할과 싱글 몰트 카듀 위스키로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강요된 선택으로 카듀는 조니워커 기주로서의 완성도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카듀 싱글 몰트의 신뢰도를 다시 높여주었으니, 새옹지마의 고사가 여기서도 확인된 셈이다.
카듀는 비록 한 차례 역경을 겪었지만 200년의 카듀 역사는 이를 극복할 역량이 충분했고 베컴이 지휘하는 든든한 그레인위스키의 지원을 받아 지금도 조니워커 시리즈 전체를 잘 이끌어가고 있다. 그래서 현재는 싱글 몰트로서도, 조니워커의 기주로서도 두 마리의 호랑이를 모두 잡아내는 훌륭한 독수리가 되었다. 카듀의 다음 200년을 더욱 기대하며 늦게나마 카듀의 200주년을 축하한다.
박병진
30여 년간 IBM, SAP, SK 등 국내 및 외국계 기업,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망라하여 임원 및 CEO로서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위스키, 스틸 영』의 저자로 포브스와 동아일보에 ‘박병진의 위스키 기행’, ‘박병진의 광화문살롱’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동아일보사의 최고위과정인 ‘광화문 살롱’의 주임교수를 맡고 있다. 현재 요리, 여행 사람들의 이야기를 펴내는 출판사 ‘북스 레브쿠헨’ 대표와 어린이 창의력 플랫폼인 ‘테일트리 코리아’의 대표이사로서 유쾌한 N잡러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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