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마한 백’이 드러낸 조그마한 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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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기막힌 타이밍에 무릎을 치며 감탄했고, 기사를 읽은 뒤에는 가슴이 뻐근해지는 감동을 받았다.
작품에 대한 이해가 녹아든 기자의 질문과 품격 높고 깊이 있는 작가의 답변이 지면을 빼곡히 채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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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10일 저녁 한강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발표가 나온 이튿날 아침 매일경제 1면과 3면에는 한강 단독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9월부터 서면 인터뷰를 진행해 발표 10시간 전에 마지막 답변 메일을 받은 것이었다.
독자들은 기막힌 타이밍에 무릎을 치며 감탄했고, 기사를 읽은 뒤에는 가슴이 뻐근해지는 감동을 받았다. 작품에 대한 이해가 녹아든 기자의 질문과 품격 높고 깊이 있는 작가의 답변이 지면을 빼곡히 채웠기 때문이다.
김유태 기자는 페이스북에서 “그분에게서 뭔가를 끌어내려면 그와 비슷한 수준의 질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느껴 그분의 단편과 장편, 작가의 말까지 전권을 모두 다시 읽었고 주말 이틀 동안 질문지를 써내려갔다”면서 “나는 그분의 문을 열어야만 했고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어떤 책인가요 같은 수준의 저급한 질문을 던졌다간 그분이 그나마 여신 문을 꽁꽁 닫으리라고 판단했다”고 털어놓았다.
에스엔에스(SNS)에서는 기자의 투철한 직업의식과 철저한 준비성을 찬탄하는 반응이 넘쳐났다. 기자 커뮤니티에서도 부러움과 존경심을 나타내는 댓글이 속속 올라왔다.
#2. 지난 2월7일 한국방송(KBS)을 통해 방송된 윤석열 대통령 신년 대담에서 박장범 ‘뉴스9’ 앵커는 김건희 여사가 디올백을 받은 일에 관해 이렇게 물었다. “최근에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그 조그마한 백이죠. … 이거는 의전과 경호 문제가 심각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가장 먼저 사람들이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죠?”
윤 대통령은 “매정하게 좀 끊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고 좀 아쉽지 않나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이어지는 박 앵커의 질문은 “정치공작의 희생자라는 얘기에 동의하느냐”와 “그 이슈 갖고 부부싸움 했냐” 등이었다.
언론계 안팎에서는 거센 비판이 일었다. “기자 망신 다 시킨다”거나 “기자인지 대통령실 견학생인지 모르겠다”는 탄식도 터져 나왔다. 한국방송은 ‘충성을 다하는 박민의 방송’, ‘용산방송’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3. 지난 23일 한국방송 이사회의 사장 후보 면접에서 박장범 앵커는 “대통령이라고 해서 용어를 따로 선택한 건 아니다. 제조사가 붙인 이름을 쓰는 게 원칙이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디올 파우치다. 파우치는 영어여서 한국말로 설명하기 위해 크기가 작은 가방이라고 한 것이다. 수입 사치품을 명품이라 쓰는 건 부적절하다”고 해명했다. ‘명품백 수뢰 사건’의 파장을 어떻게든 줄여보려는 마음이 뚝뚝 묻어나는 질문을 해놓고도 아무런 반성이나 사과 표시 없이 “원칙대로 했을 뿐”이라고 강변한 것이다.
그런 그가 차기 사장으로 내정됐다. 여권 이사들의 수준이나 이들을 거수기로 활용한 대통령실 판단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한국방송 후배 기자들도 잇따라 성명을 내어 “질문은 기자의 역량을 드러낸다고 배웠는데 박장범 앵커가 던진 질문은 함량 미달이었다”, “국민이 궁금해할 질문은 나오지 않았고 대통령 입장을 대변했다”며 사퇴를 촉구했다.
박 후보가 사장은커녕 공영방송 종사자로서 부적합하고 이사회 결정이 부당하다는 말은 굳이 더 보태고 싶지 않다. 다만 질문도 제대로 못 하는 기자가 구성원 존경을 받고 시청자 신뢰를 얻을 수 있을지는 따져 묻고 싶다. 좋은 질문이 좋은 답변을 낳는다. 기자들이 못할 질문은 없다. 나쁜 질문이 있을 뿐이다. 공직자에게 무례한 질문도 없다. 제대로 묻지 못하는 것이 독자와 시청자에게 무례한 일이다.
이희용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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