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 자택을 찾은 한 예능인이 있었다.
바로 ‘이경규가 간다’의 이경규였다.

유명인을 사전 예고 없이 찾아가 인터뷰를 시도하는 파격적인 콘셉트로 진행됐는데, 그날 이경규는 이른 아침부터 김 전 대통령의 자택 앞 골목을 맴돌며 조심스레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다.

마침 산책을 나온 김대중 부부를 발견한 이경규가 급하게 달려가자,
김 전 대통령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밝은 표정으로 맞아주며 “들어오시죠”라고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첫 인연이 시작됐다.

이경규 曰
“총재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코미디언은 누굽니까?”
김대중 曰
“이경규씨죠. 허허!”

이경규는 이 말이 사실인지 방송용인지 궁금했다.
촬영이 끝난 후 김대중에게 진짜 자기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김대중은 천연덕스럽게 “이경규라고 말하지 않으면 편집될 것이라 생각이 들었어요.” 말했다.
김대중 특유의 유머 감각과 미디어에 대한 이해, 그리고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능력을 그대로 보여줬다.

놀랍게도 이 인연은 단발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바로 그 날, 수많은 내외신 기자들 틈을 뚫고 가장 먼저 김대중 대통령과 마주한 이는 이경규였다.

이후 이경규는 "사람들이 내가 김대통령에게 뭐라도 받은 줄로 알았지만, 당시 나는 MBC에서 짤린 상태였다"며 억울한 웃픈 비화를 밝히기도 했다.

김대중은 정치인 중에서도 코미디언과 가장 많이 교류한 인물이었다.
최양락·팽현숙 부부, 이봉원·박미선 부부와도 따로 식사를 했고, 유머를 통해 국민과 소통하려는 태도가 뚜렷했다.


대통령 선거 당시 이회창 후보가 날카롭고 냉철한 이미지를 고수했다면, 김대중은 부드럽고 위트 있는 화법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심지어 그의 자서전 제목이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였을 정도로, 문화와 코미디, 대중예술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이경규는 그런 김대중의 팬이었고, 김대중 역시 이경규를 특별히 아꼈다.

“정치인 김대중”과 “예능인 이경규”가 서로의 세상을 존중하며 친구가 된다는 것.
당시로선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그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독특하고 인상 깊었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이경규는 언론 인터뷰에서 짧지만 깊은 말을 남겼다.
“영화, 문화까지 모르시는 게 없던 박학다식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말끝을 흐리며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바친 훌륭한 분이셨는데…”라며 고개를 숙였다.
말 한마디가 길고 깊었던 인연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날, 청와대에 조용히 조문을 다녀온 이경규는 어떤 카메라 앞에서도 개인적인 감정을 함부로 내비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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