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베이션, 배터리 덜고 AI로 '자본 이동' 시그널

/사진=블로터DB·SK이노베이션, 그래픽=이채연 기자

SK이노베이션이 지난해 배터리 자산에서 5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손상차손을 인식했다. 전기차 시장 성장 둔화로 배터리 투자 부담이 커지는 가운데 최근에는 그룹 반도체 계열사에 대한 출자에 나서며 투자 방향 변화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이를 두고 재계 안팎에서는 SK그룹 내부에서 배터리에서 인공지능(AI) 반도체로 자본 배분의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13일 SK이노베이션의 2025년 연결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회사는 지난해 총 4조9033억원 규모의 유형자산 손상차손을 인식했다. 2024년(716억원) 대비 약 68배 늘어난 규모로 국내 주요 제조업 상장사 가운데 단일 연도 손상차손으로는 이례적으로 큰 손상이다.

손상차손은 자산의 회수 가능액이 장부가액을 밑돌 때 그 차액을 비용으로 반영하는 회계 처리다. 실제 현금이 빠져나가는 지출은 아니지만 해당 자산이 기대했던 만큼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반영된 것이다.

이번 손상의 대부분은 배터리 사업에서 발생했다.

전체 손상차손 중 70%에 해당하는 3조4917억원이 포드와의 배터리 합작법인 블루오벌SK에서 인식됐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12월 포드와 합작운영 종료계약을 체결하고 블루오벌SK가 보유한 미국 켄터키 1·2공장 관련 자산과 부채를 포드 측에 이전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건물(2조7894억원), 기계장치(6766억원), 건설중인자산(257억원) 등 3조4917억원의 자산이 매각예정 분류 전 손상으로 반영됐다.

나머지 손상차손도 배터리 거점에 집중됐다. SK온 헝가리 법인에서 4123억원, 국내 서산 1·2공장에서 2893억원, 분리막 자회사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와 그 종속기업에서 983억원이 각각 현금창출단위 손상검사를 거쳐 인식됐다. 특히 서산 공장 손상 산정에는 영구성장률 0%가 적용됐다. 서산 공장의 장기 성장성을 사실상 없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배터리 자산에서 발생한 대규모 손상차손이 반영되면서 최종 연간 손익은 5조4364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연간 영업이익이 4487억원으로 전년 대비 26% 증가했지만 대규모 손상차손이 이를 압도한 결과다.

주목되는 것은 배터리 자산 정리가 정점에 이른 직후 나타난 투자 방향 변화다.

SK이노베이션은 올해 2월 27일 SK하이닉스 산하 미국 법인에 3억8000만달러(약 5500억원)를 출자하고 보통주를 취득하는 약정계약을 체결했다. 출자는 2026년 3월1일부터 4년간 캐피털 콜 방식으로 단계적으로 이뤄질 예정이다.

캐피털 콜 방식 특성상 자금은 필요할 때마다 순차적으로 투입되며 연평균 약 1375억원 규모가 집행될 전망이다. 에너지·배터리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SK이노베이션이 그룹 내 반도체 계열사 산하 법인에 직접 출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SK그룹 차원의 투자 방향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SK이노베이션은 2022년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한 이후 배터리 사업 투자를 본격화했다. 2023년에는 배터리 부문 투자 계획으로 약 7조5000억원 규모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투자 확대 선언 이후 불과 2년 만에 해당 자산 상당 부분에 대해 대규모 손상이 인식된 셈이다.

전기차 시장 성장이 둔화되는 사이 AI 인프라 투자 수요가 급증하면서 그룹 내부에서도 자본 배분의 우선순위가 재조정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SK이노베이션의 이번 출자 대상도 SK하이닉스가 AI 사업 거점으로 개편 중인 법인이다.

이 같은 흐름은 그룹 인사에서도 분명히 감지된다. 올해 초 최재원 SK 수석부회장은 SK온 공동대표와 SK이노베이션 에너지전략 총괄을 거쳐 SK하이닉스의 최대 주주(지분율 20.07%)인 SK스퀘어로 자리를 옮겼다. 최 수석부회장은 최태원 회장의 동생이자 SK 배터리 사업의 실질적인 기획자로 꼽힌다. 배터리 사업의 재무 부담이 SK이노베이션에 집중된 상황에서 그 사업을 이끌던 인물은 반도체 초호황의 중심으로 이동한 셈이다.

최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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