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만 남녀노소 빠진 스포츠클라이밍 “자전거로 제주도에서 목포까지 왔어요.” 김현준(8)군의 이 말을 아버지 김주운(49)씨가 이어받았다. “스포츠클라이밍 대회에 나가려고요.” 이들 부자는 차박도 하며 전국 대회 투어 중이다. 지난 8월 25일 열린 목포 대회에는 현준군의 할아버지 나이쯤 되는 60대 중반 남성들도 출전했다.
“설 연휴 때보다 어깨가 넓어졌네. 어휴, 저 팔뚝 봐라.” 이모 이현민(54)씨가 추석 밥상머리에서 말을 꺼내자 조카 김태훈(23)씨가 답했다. “스포츠클라이밍 덕분이죠.”
지난 추석 당일 포함, 연휴 닷새 내내 전국 곳곳의 스포츠클라이밍센터는 문을 열었다. 공휴일에 열어도 '남는 장사'라는 얘기다. 태훈씨 같은 2030세대가 넘쳤다. 4050세대도 뒤섞였다. “사람이 하도 많아 대기할 정도였다”고 김모(48)씨가 전했다. 가수 설현이 ‘나 혼자 산다’에서 보여준 클라이밍 모습은 SNS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체 스포츠클라이밍이 뭐라고.
스포츠클라이밍은 인공암벽을 오른다. 자연암벽이라도 추락 대비용 고정 확보물이 있는 짧고 강한 루트를 등반하면 스포츠클라이밍이라고 부른다. 일부에서 이를 '하드 프리'로 일컫기도 하는데, 이는 한국만의 독특한 용어다. '콩글리시'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스포츠클라이밍은 난데없이 등장한 게 아니다. 우리나라 첫 인공암벽 대회가 1990년에 생겼으니, 그전 슬금슬금 군불 지핀 시기까지 어림잡아 40년 역사다. 그런데 “통계로 잡히지 않지만, 요즘 무서울 정도로 인구가 늘고 있다”는 조규복(60) 전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팀 감독의 말처럼 뜨겁다. 그는 “2021년 첫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도쿄올림픽 때만 해도 국내 스포츠클라이밍 인구는 50만 명 정도였는데, 바닥을 탄탄히 받치던 중장년층이 꾸준히 늘고 청년층도 급증하면서 3년 새 3배인 150만 명 정도로 늘었다"고 전했다. 모임 커뮤니티인 문토가 지난해 조사한 2030 관심사도 1위가 등산, 2위가 클라이밍이었다. 지난 파리올림픽이 거기에 불을 키웠다.
2030 위주 급증… 서채현 시청률, 신유빈보다 높아 파리올림픽이 막바지로 치닫던 지난 8월 10일. 서채현(21) 선수가 출전한 스포츠클라이밍 리드 결승 중계방송 시청률은 7.93%(닐슨코리아·전국 기준), 분당 기준으론 10.02%에 달했다. 같은 날 신유빈의 여자탁구 단체전과 여자 태권도가 모두 동메달을 땄지만 스포츠클라이밍이 이날의 모든 중계를 압도했다. 그 시청률에 기여했다는 곽미정(55)씨는 “별 기대하지 않고 보다가 손에 땀이 흥건해질 정도로 긴장됐다. 어쩐지 우리 딸이 추석 연휴 하루걸러 운동장(스포츠클라이밍센터를 말함)에 가더라”고 했다.
“와!”
추석 당일이었던 지난달 18일 오후. 서울 종로의 한 ‘운동장’에서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김모(27)씨가 한 코스를 추락 없이 끝내자 친구들이 더 기뻐했다. 부러움도 섞여 있는 듯했다. 센터에서 매긴 해당 코스의 등급은 총 8단계 중 2단계에 불과했다. 조 감독은 “다른 사람이 보기엔 쉬운 문제라도 그들에게는 어려움을 이겨낸 대단한 성취"라며 "아주 잠깐이지만 완등 홀드를 ‘터치‘하는 순간,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 든다. 재미는 덤”이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그러잖아도 파리올림픽 이후 궁금해하던 차에 친구가 ‘전도’해줘서 처음 접했다. 계속 올 것 같다”며 땀을 닦았다. “꺅!” 다른 곳에서 완등한 김씨의 ‘전도사’ 이윤희(29)씨는 “봤지! 봤지!”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씨도 1년 전 다른 친구로부터 ‘전도’를 받았단다. 유경험자가 무경험자를 재빠르게 영입하는 ‘다단계 방식’이다. 이런 선순환 구조가 하루 전국 600여 곳의 운동장에서 수십, 수백 건씩 이뤄지고 있다.
이들은 스포츠클라이밍 세 분야 중 하나인 ‘볼더링’을 하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더 많이 갈수록 점수를 많이 얻는 분야다. 서채현 선수의 주종목인 ‘리드’는 더 높이 올라갈수록 점수가 높다. ‘스피드’는 더 빨리 올라가야 한다. 2030은 접근하기 쉬운 볼더링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후 먼저 리드를 경험하는 또래가 '전도사'가 되면서 점차 발을 넓히는 흐름이 이어진다.
대회 나선 기자, 점심 때 나온 한식 뷔페 참았지만…
‘후~ 후~.’
지난달 7일. 기자는 ‘리드’로 치르는 남원대회에 참가해 12m 높이쯤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선수와 응원단 40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현준이와 같은 그룹에 속했다. 남원대회는 나이·성별 관계없이 등급에 따라 출전한다. 5.9, 5.10, 5.11, 5.12 네 분야인데 5(경사가 심한 상태를 뜻함) 뒤에 붙는 숫자가 높을수록 어렵다.
5.10에 출전했다. 예선 두 문제를 톱(완등) 찍었다. 감이 좋았다. 비가 쏟아지면서 경기가 지연됐다. 점심시간에 맞춰 한식 뷔페가 나왔다. 몸이 가벼워야 했기에 침만 흘리고 있었다. 실제로 대회를 앞두고 2㎏을 뺐다. 지난해에는 즉석 자장면을 뽑아줬단다. 대회 방식도, 음식도 특이한 대회다. 드디어 결선. 다른 선수들 동작을 보면 ‘커닝’이기에 30분 가까이 격리됐다.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핸드폰 소지도 금지.
다시 후~. 손에 묻은 초크(땀을 제거하는 가루)를 입으로 불고 올랐다. 루트 세터가 만든 문제를 힘겹게 풀며 산 넘고 물 건너 24번째 홀드(손으로 잡거나 발로 딛는 부분). 갑자기 손이 빠졌다. 휙! 안전벨트에 묵었던 로프가 길게 늘어지면서 추락했다. 7m. 아찔했다. 추락하면서도 떨어진 지점을 쳐다봤다. “괜찮아요?”라고 대회 관계자가 말했던 것 같다. ‘다시’는 없다. 끝이다. 7위로 마감했다. 차라리 한식 뷔페를 먹을걸. 생각지 않게 라이벌이 된 현준이의 성적이 궁금했다.
조 감독은 “요즘 추세는 리드도 볼더링 같은 동작이 나오는데, 집중력과 이해력·판단력 등 머리를 쓰면서 과감하게 몸으로 구현해야 한다”며 “그래서 서채현 같은 선수들이 올림픽 무대에서 벽을 바라보며 문제를 어떻게 풀까 고민(루트 파인딩)하는 것”이라고 알려줬다. 서채현 선수가 경기에 앞서 망원경까지 동원해 루트를 관찰하고 마임하듯 손짓과 발짓으로 동작을 시연해 보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함께 참가한 5060들도 “덕분에 다이어트로 5㎏ 빼고, 건강검진 전날만 안 마시던 술도 열흘이나 끊으니 살 것 같다. 장년들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했다.
우울증 치료, 미생물 오염 … 관련 연구도 쏟아져
스포츠클라이밍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강레아 사진작가는 “김자인 선수 등반 모습을 찍은 적이 있는데, 초집중 상태에서는 오히려 눈의 초점이 사라지더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 스포츠클라이밍 연구도 쏟아지고 있다. 생명과학·생물의학 분야의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된 ‘펍메드’에는 최근 한 해 평균 50편 안팎의 관련 논문이 등록되고 있다. 근력 향상뿐 아니라 우울증,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치료 등 정신적 측면 연구도 많다. 심지어 클라이밍에 빠진 2030 서울대 대학원생들은 ‘실내 클라이밍 짐 홀드의 관리 방법에 따른 미생물 오염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내기도 했다.
한국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는 일본의 스포츠클라이밍센터에 원정을 가는 이들도 있다. 오사카에서 만났던 송민근(33)씨는 “확실히 한국보다는 짭짤(어렵다는 뜻)하지만 문제를 푸는 재미도 크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재미가 붙으면서 실력 향상을 위해 트레이닝에 집중하다 보면 부상 위험도 따른다”며 “차근차근, 다치지 않고 오래 하는 게 정답”이라고 조언했다.
스포츠클라이밍 인기는 더 뜨거워질 전망이다. 지난달 22일 파리올림픽 이후 처음 열린 프라하 스포츠클라이밍 월드컵 대회 볼더링 부문에서 이도현(22) 선수가 금메달을 딴 데 이어 지난 2일부터 6일까진 서울 강남에서 월드컵 대회가 열리고 있다. 김자인·천종원·이도현·서채현 선수 등이 출전했다. 이도현 선수는 지난 3일 이 대회 볼더링 부문 1위에 오르면서 월드컵에서 2연속 우승했다. 내년 9월엔 세계선수권대회도 국내에서 처음 개최된다. 내년 전국 대회에선 키가 부쩍 커진 현준이를 만나게 될 것 같다. 현준이 같은 친구들이 바로 미래의 천종원·이도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