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의 승부수] ③ 메모리 한계 넘는다…AI 인프라 기업으로

/챗GPT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그래픽입니다.

SK하이닉스의 미국 증시 주식예탁증서(ADR) 발행은 자금조달이나 기업가치 제고를 넘어 사업체질 변화를 시장에서 인정받는 과정이다. 그간 SK하이닉스는 범용메모리 제조사로서 글로벌 반도체 수급 사이클에 실적이 종속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뉴욕 자본시장은 이미 엔비디아나 브로드컴 등을 '제조업'이 아닌 '인공지능(AI) 인프라' 영역으로 재정의해 독자적인 밸류에이션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AI 시대 본격화…메모리 성격도 변화

이달 25일 ADR 상장 추진이 공개된 후 블룸버그와 배런스 등 주요 외신은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업황 지속성에 대한 신중한 시각을 제시했다. 특히 고대역폭메모리(HBM) 매출과 엔비디아 등 특정 고객사의 비중이 높은 구조를 언급하며 AI 설비투자 사이클에 따라 실적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해 기준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로 추정되는 단일 외부고객으로부터 낸 매출은 23조2601억원으로 전체의 24%를 차지했다.

다만 AI 산업구조가 변화하는 가운데 HBM의 역할은 기존 메모리와 다른 성격으로 바뀌고 있다. HBM은 데이터 처리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서 저장장치를 넘어 AI 연산구조의 일부로 작동한다. 차세대 HBM은 고객사의 AI 가속기 구조에 맞춰 핵심 부품을 함께 설계하는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에 표준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주문형으로 만드는 ‘메모리의 파운드리화’가 진행되고 있다.

SK하이닉스도 6세대 HBM4부터 고객의 비즈니스에 맞춘 설계 최적화에 본격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제품이 시스템에 적용되면 다른 업체의 제품으로 교체하기 어렵다. 설계 단계에서 결합되는 특성 때문이다. 특정 고객의 비중이 확대될 경우 단순한 매출 집중이 아닌 장기간의 공급 관계로 이어진다. 이에 기존처럼 수요 변화에 따라 가격이 급등락하는 범용메모리와는 수익구조의 성격이 달라진다.

SK하이닉스의 HBM4 /사진 제공=SK하이닉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국내 증시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자본시장은 SK하이닉스를 삼성전자와 함께 메모리제조업으로 분류하며 업황 둔화 시 주가가 동반 하락하는 흐름이 반복됐다. 반면 뉴욕 자본시장은 산업에서 맡는 역할에 따라 기업을 다시 구분하고 평가기준을 달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팹리스(반도체설계회사)인 브로드컴과 전력·냉각 솔루션 기업인 버티브가 대표적이다. 브로드컴의 경우 과거 스마트폰용 통신칩 설계 중심의 사업구조에서는 주가수익비율(PER)이 10~15배에 머물렀다. 그러나 최근 구글과 메타 등 빅테크의 맞춤형(ASIC) AI 칩 설계로 사업의 무게중심을 옮기면서 현재는 PER 50배를 넘는 수준으로 평가된다.

버티브 역시 과거에는 데이터센터용 전력·냉각장비를 공급하는 전통 설비제조 업체로 분류됐지만 AI 데이터센터 확산과 함께 고밀도 전력, 액체냉각 등 핵심 솔루션 공급사로 부각되면서 2023년 이후 약 2~3년간 주가가 누적으로 300%가량 상승했다. 뉴욕 시장에서는 버티브를 단순 제조업이 아니라 엔비디아와 함께 ‘AI 인프라 기업’으로 분류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제조사 아닌 AI 시대 핵심 공급사로

AI 시대가 정의되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기업은 기존 제조업과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다. 동시에 수익 규모보다 수익의 지속성과 예측 가능성이 중요한 평가요소로 작용한다.

SK하이닉스의 ADR 상장은 이러한 평가체계로 이동하기 위한 전략이다. 메모리 가격에 따라 실적이 등락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AI 시스템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부품 공급 기업으로 인식되기 위한 시도다.

(앞줄 왼쪽부터)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 제공=SK하이닉스

이 경우 HBM 매출과 엔비디아 의존도도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고객사와 설계단계부터 결합될 경우 특정 고객의 비중 확대가 공급 관계의 안정성을 의미하게 된다. 향후 투자 또한 단순한 생산능력 확대가 아니라 AI 인프라 기업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강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말 조직개편에서 미국 내 커스텀 HBM 전담조직을 꾸려 주요 빅테크와 워크로드별 맞춤형 HBM 개발·공급에 나서는가 하면 올해 초 미국에 AI솔루션법인(AI Co)을 설립하는 등 수주형·솔루션형 AI 인프라 기업으로의 사업구조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ADR 상장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경우 SK하이닉스는 단순 메모리 제조 업체가 아니라 AI 시스템 구축에 참여하는 핵심 공급사로 재분류될 가능성이 높다. 일각에서는 브로드컴이나 엔비디아와 유사한 기업군으로 인식되며 비슷한 평가기준이 적용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나온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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