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루의 시대, '100도루 진기록' 탄생할까

뛰는 야구 부활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지난해 메이저리그는 다분히 의도적인 규정들을 신설했다.

주자가 있을 때 투구 시간을 정해두는 피치 클락 도입(20초)과 주자 견제 제한(2회) 베이스 크기 확대(18인치)는 '뛰는 야구'를 위한 장치들이었다. 역동적인 야구를 추구하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사무국의 의도를 파악한 팀들은 열심히 뛰었다. 스프링캠프 때부터 뛰는 야구에 대비했다. 대부분 팀들이 도루 수가 늘었다. 포수들은 투수 리드 못지않게 주자 견제에 신경을 썼다. 발 빠른 선수들과 기동력이 뛰어난 팀들이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메이저리그는 공의 반발력이 달라진 1920년을 라이브볼 시대의 출발로 본다. 공 내부에 코르크심을 넣으면서 더 뻗어나가는 공을 제작했다. 덕분에 베이브 루스로 대표되는 홈런 타자들이 나올 수 있었다.

반발력이 떨어졌던 1920년 이전은 데드볼 시대였다. 당시에는 힘으로 장타를 만들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스피드로 장타를 만들었다. 루상에 나간 주자들은 더 많은 도루를 감행했다. 단일 시즌 리그 최다 도루 기록을 봐도, 상위 10시즌 중 7시즌이 데드볼 시대다.

단일 시즌 최다 도루 기록

1890 - 6,854도루
1887 - 6,345도루
1888 - 5,260도루
1889 - 4,816도루
1914 - 4,573도루
1891 - 4,172도루
1915 - 4,106도루
1987 - 3,585도루 <라이브볼>
2023 - 3,503도루 <라이브볼>
1999 - 3,421도루 <라이브볼>


즉 지난해 메이저리그는 라이브볼 시대에 데드볼 시대 야구가 곁들여졌다. 바뀐 규정에 힘입어 전체 도루 수도 3,503개에 달했다. 전년 대비 약 41% 증가한 수치였다(2022년 2,486도루). 도루 성공률도 2022년 75.4%에서 2023년 80.2%까지 높아졌다. 100도루 팀도 2022년은 8팀에 불과했는데, 2023년은 무려 21팀이 100도루를 넘어섰다.

2023시즌 팀 최다 도루

190 - 신시내티
166 - 애리조나
163 - 캔자스시티
160 - 탬파베이
151 - 클리블랜드

뛰는 야구로 성공을 거둔 팀도 나왔다. 팀 도루 전체 2위 애리조나였다. 애리조나는 가공할 만한 스피드를 앞세워 전력 그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빠른 발이 더 위협적인 무기가 되는 포스트시즌에서 다저스와 필라델피아를 꺾고 월드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애리조나는 단일 포스트시즌 2위에 해당하는 23도루를 기록했다(2008년 탬파베이 24도루).

포스트시즌 도루 1위 크리스찬 워커와 2위 코빈 캐롤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실 한동안 도루는 외면 받았다. 2023년 경기 당 평균 도루 수가 0.72개로 증가하기 직전, 2022년 0.51개, 2021년 0.46개였다. 선수들 연봉이 올라감에 따라 부상 우려가 있는 도루는 기피대상이었다. 특히, 세이버 지표가 대두되면서 도루의 가치가 재평가됐다.

각 상황별 기대 득점 변화가 결정적이었다. '세이버 매트릭스 대부' 톰 탱고는 아웃카운트와 주자 유무에 따른 기대 득점을 계산해서 발표했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무사 1루에서 기대 득점은 0.94점이다. 만약 1루 주자가 2루 도루에 성공한다면 기대 득점은 1.17점으로 상승한다. 그러나 1루 주자가 2루 도루에 실패할 시 기대 득점은 0.29점으로 하락한다. 도루 성패로 인한 이익(+0.23)보다 손해(-0.65)가 통계적으로 더 크다고 밝혀졌다. 도루의 실효성에 의문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사무국이 뛰는 야구를 부추기면서 도루를 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심지어 올해는 주자가 있을 때 피치 클락이 18초로 단축돼 한층 더 편하게 뛸 수 있는 환경이다. 실제로 경기 당 평균 도루 수도 0.74개로 작년보다 많아졌다.

엘리 델 라 크루스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메이저리그는 도루의 시대에 걸맞은 도루의 제왕도 등장했다. 신시내티 유격수 엘리 델 라 크루스(22)다. 델 라 크루스는 지난 17일 다저스전에서 시즌 30도루를 점령했다.

2024시즌 도루 순위

31 - 엘리 델 라 크루스
18 - 브라이스 투랑
18 - 호세 카바예로
16 - 바비 위트 주니어
15 -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


델 라 크루스는 압도적인 1위다. 2위 그룹과 차이가 대단히 크다. 델 라 크루스는 선수 개인과 경쟁하는 수준이 아니다. 델 라 크루스보다 도루를 적게 한 '팀'이 14팀이나 된다. 지난해 98경기 35도루였던 델 라 크루스는 현재 100도루 페이스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에서 100도루 시즌이 탄생한 건 13번뿐이다. 이 가운데 5번은 1800년대였다. 라이브볼 시대 들어서는 네 선수가 8번의 100도루 시즌을 합작했다. '전설적인 대도' 리키 헨더슨이 3회(1980, 1982-83년) 빈스 콜먼이 3회(1985-87년) 두 선수에 앞서 1962년 모리 윌스와 1974년 루 브록이 100도루 시즌을 만들었다.

헨더슨은 도루의 역사다. 통산 1,406도루는 역대 1위다. 1982년 130도루 역시 단일 시즌 최고 기록이다. 야구에서 도루가 가진 지배력을 가장 잘 보여준 선수다. "둘로 나눠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것"이라는 찬사를 들은 선수가 바로 헨더슨이다.

헨더슨과 함께 100도루 시즌을 세 번이나 달성한 선수가 콜먼이다. 콜먼은 헨더슨도 하지 못한 100도루 시즌을 3년 연속 이어갔다. 그리고 1987년 109도루가 메이저리그 마지막 100도루 시즌이었다. 여기서 끊긴 100도루의 명맥을 델 라 크루스가 노리고 있다.

키가 196cm인 델 라 크루스는 엄청난 보폭으로 다음 베이스에 도달한다. 큰 키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스피드가 델 라 크루스의 강점이다. 선수 주력을 측정하는 지표 '스프린트 스피드'에서도 델 라 크루스의 스피드는 돋보인다. 초 당 최대 이동 거리를 의미하는 스프린트 스피드는 27피트가 리그 평균이다. 그런데 델 라 크루스는 30피트를 찍고 있다.

2024시즌 스프린트 스피드 순위 (피트)

30.4 - 바비 위트 주니어
30.0 - 엘리 델 라 크루스
29.9 - 요한 로하스
29.8 - 훌리오 로드리게스
29.7 - 트레이 터너
29.7 - 에반 카터


도루는 스피드만 내세우면 한계가 있다. 흔히 "도루를 위해서는 4가지 S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스타트(Start)와 스피드(Speed) 센스(Sence) 슬라이딩(Sliding)이다. 델 라 크루스는 이 4가지 능력을 골고루 갖췄다. 적극적인 도루 시도 속에서 도루 성공률이 86.1%를 보이는 것도 단순히 빠르기만 한 선수가 아님을 알려준다(리그 평균 79.0%).

델 라 크루스는 목표물을 한정하지도 않는다. 올해 3루 도루도 13번이나 했다. 이 부문 2위 투랑과 3위 카바예로의 3루 도루를 합친 것보다 많다(투랑 6도루, 카바예로 5도루).

또한 델 라 크루스는 올해 홈스틸을 추가한 11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상대가 잠시 빈틈을 보이면 델 라 크루스는 이미 다음 베이스를 향해 달리고 있다. 전체 도루에서 3루 도루 비중도 높다는 점이 100도루 희망을 키우는 부분이다.

주자 델 라 크루스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관건은 부상 방지와 체력이다. 항상 오버 페이스를 경계해야 한다. 시즌이 깊어질수록 발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발이 무거워지면 부상 위험도 높아진다.

도루를 하려면 먼저 출루가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심한 타격 부진에 빠지는 구간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해 델 라 크루스는 첫 30경기 타율 0.325, 출루율 0.363이었는데, 이후 68경기에서 타율 0.191, 출루율 0.272로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올해도 타석에서의 접근법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타석 당 볼넷률이 지난해 8.2%에서 올해 10.7%로 조금 높아졌지만, 타석 당 삼진율이 32.5%로 여전히 높은 편이다(지난해 33.7%). 그만큼 나쁜 공에 방망이가 자주 따라나온다. 타격감이 떨어지면 이 약점은 더 부각되는데, 그래서 올해도 구간을 나눴을 때 성적 편차가 극명하다.

첫 24경기 성적
타율 .313 출루율 .412 장타율 .651

이후 26경기 성적
타율 .204 출루율 .284 장타율 .316


타석에서의 온도 차만 줄이면 델 라 크루스의 100도루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 델 라 크루스가 100도루를 달성할 경우, 지금까지는 없었던 유형의 100도루 달성자가 될 것이다. 앞선 100도루 선수들 중 가장 많은 홈런을 친 선수는 1982년 리키 헨더슨이었다. 그 해 헨더슨은 딱 홈런 10개를 때려냈다. 다들 홈런하고 거리가 멀었다.

파워와 스피드가 균형 잡힌 델 라 크루스는 30홈런까지 칠 수 있다. 현재 9홈런, 시즌 29홈런 페이스다. 위에서 언급한 타석에서의 좋고 나쁜 간극만 좁히면 충분히 30홈런 100도루 시즌도 기대해 볼 만하다. 이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기록이다. 참고로 지난해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는 최초의 40홈런 70도루 시즌으로 리그 MVP를 수상한 바 있다.

델 라 크루스는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큰 관심을 드러내지만, "그저 매일 경기에 나와서 즐겁고, 열심히 할 따름이다"고 말하며, "기록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기록을 지나치게 의식하다가 부담감에 무너지는 선수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도루는 분명 시대를 역행하는 플레이로 여겨졌다. 하지만 유행이 돌고 도는 것처럼, 도루에 열광하는 시대도 되돌아왔다. 이에 발맞춰 델 라 크루스도 100도루라는 위대한 도전에 나서고 있다. 계륵으로 전락했던 '뛰는 야구'가 다시 리그를 주름잡을지 주목된다.

-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