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실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벌써 30년도 훨씬 넘었다. 20세기 때 얘기다. 그러니까 1990년대쯤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설 같은 목격담이 전해진다.
원정 팀의 공격 차례다. 4번 타자가 타석에 섰다. 초구가 몸 쪽에 바짝 붙는다. 누구도 치기 힘든 코스다.
그런데 타자가 반응한다. 그것도 완벽한 타이밍을 만들어 낸다. 간결한 스윙에 걸린 타구는 라인드라이브다. 좌중간을 향해 빨랫줄이 널린다.
그 순간이다. 유격수가 펄쩍 뛴다. 공을 잡으려고 점프한 것이다.
하지만 어림없다. 타구는 내야를 벗어난다. 외야로 훨훨 비행한다. 그리고는 어느새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홈런이 된 것이다.
한 야구인의 회상이다.
“처음 맞을 때는 낮게 깔리는 직선 타구였다. 그래서 유격수도 잡아 보려고 뛴 것이다. 그런데 공이 죽~ 죽~ 계속 살아가더라. 결국 펜스 밖으로 넘어가더라. 사실 말이 안 된다. 좌중간이면 잠실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다. 그때까지 그런 타구는 본 적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상대 팀은 분명치 않다. 투수나, 유격수의 이름도 가물가물하다.
분명한 것은 있다. 홈런의 주인공이다. 이글스의 35번이다. 20대 초반, 한창 힘을 쓰던 장종훈(현재 나이 57세)이었다.

일본에 세워진 기념비
유격수가 점프했는데, 홈런이라니. 왠지 ‘구라’ 같다.
그런데 한 가지 역사가 더 있다. 이 목격담에 신빙성 더해 주는 ‘사건’이다.
1991년 11월의 일이다. 한일 슈퍼게임 1회 대회가 열렸다. 6번의 게임 중 5차전 때 일이다. 경기장은 기후현의 나가라가와 구장이라는 곳이다.
1승 3패로 뒤지던 한국 타선이 모처럼 활발하게 터졌다. 그러다가 6회에 엄청난 홈런이 터졌다. 역시 젊은 거포의 한방이었다.
타구는 끝없이 날아간다. 결국 관중석까지 완전히 넘겼다. 나가라가와 구장이 생긴 이래 첫 장외홈런이 됐다. (경기는 8-0 한국 승리)
당시는 지금과 달랐다. 비거리를 놓고 갑론을박이 펼쳐진다. 160m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다, 145m 정도일 것이다. 그런 말도 나온다. 실제는 120~130m 아니냐. 그런 반박도 있다.
아무튼. 현지 관계자들이 모두 깜짝 놀란다. 오죽하면 기후현이 이듬해(1992년) 3월 비석을 세웠다. 이른바 ‘홈런 기념비’다.
공이 떨어진 자리에는 이렇게 새겨졌다. 한글과 일본어로 쓰인 문구다. ‘호쾌한 타구를 칭송하고, 영원히 기록하기 위해.’
당사자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타구는 포물선이 아니라 라인드라이브로 날아갔다. 공이 한 번, 두 번, 살아서 치솟는 느낌이었다. 몇 년 뒤에 가보니 기념비가 있어서,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 번의 3피트 라인 아웃
주자는 주루 라인 안으로 달려야 한다. 베이스 간 직선의 3피트(약 91cm) 안팎이다. 이걸 벗어날 때가 있다. 주로 수비의 태그를 피하려는 동작 때문이다. 그럴 때는 아웃이 선언된다.
흔히 나오는 장면은 아니다. 그런데 그걸 두 번이나 범한 선수가 있다. 그것도 일반적인 경우와 전혀 다른 이유로 위반이 선언됐다.
첫 번째는 1995년이다. 태평양 돌핀스를 상대할 때다. 타구가 투수를 직격 했다. 그것도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다. 프로 2년 차 최상덕이다.
그대로 마운드에서 쓰러졌다. 앞니 4개가 부러지고, 잇몸 12바늘을 꿰매는 끔찍한 부상을 당했다. (시즌 아웃)
이럴 때 보통 타자는 1루까지 달린다. 그리고 경기가 멈추면 피해자를 찾아가 미안함을 전한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타석에서 곧바로 마운드로 뛰어간다. 그리고 미안함과 걱정에 몸 둘 바를 모른다.
어쨌든. 그에게는 내야 안타 대신 (3피트) 아웃 1개가 기록됐다.
비극은 또 일어났다. 4년 뒤(1999년)였다. 이번에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김원형이다.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코뼈와 광대뼈가 골절됐다.
이때도 타자는 1루가 아닌 마운드로 달려갔다. 역시 3피트 아웃이 선언됐다. 훗날의 회고다.
“(김) 원형이가 그대로 쓰러지더라. 쫓아 올라가 보니, 코는 물론 귀에서도 피가 나고 있었다. 심지어 핏덩이 같은 것도 보여서 얼마나 놀라고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나마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아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안타, 아웃 같은 것은 따질 겨를도 없었다.”

연봉 300만 원 연습생으로 출발
그의 출발은 초라했다. 고교 때는 주목받지 못했다. 프로 입단은 감히 엄두도 낼 처지가 아니다. 드래프트는 ‘당연히’ 외면했다.
남다른 열정을 은사(세광고 이한구 감독)가 모를 리 없다. 마침 연고지에 창단 팀이 있었다. 빙그레 이글스에 추천장을 써줬다. 덕분에 기회를 받았다. 출근할 곳이 생긴 것이다. (1986년)
물론 정식 선수는 아니다. 연습생 신분이다. 요즘의 육성선수와 비슷하다. 아니, 훈련 보조요원에 가까울 것 같다. 장비 챙기고, 청소하고, 배팅볼 던져주고, 불펜 포수도 하고…. 그런 게 주된 업무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이듬해(1987년) 데뷔가 이뤄진다. 주전 유격수가 부상으로 빠졌다. 이광길 자리에 장종훈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럭저럭 유망주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이다. 한 스포츠신문에 이런 제목이 실린다. <장종훈을 아시나요?>. ‘연습생 신화’라는 뭉클한 스토리가 소개된다.
그리고 1990년대로 접어든다. 그의 20대 초반이다. 전성기가 열리는 시기다.
1990년 홈런 28개를 기록했다. 유격수 최초의 홈런왕으로 등극했다.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28개를 대충 보면 안 된다. 일단 게임수가 다르다. 당시는 120게임 체제였다. 지금(144G)으로 치면 33, 34개 정도다.
장비도 감안해야 한다. 공의 반발력, 배트의 제작 기술이 지금보다는 떨어졌다. 20개 넘기는 타자가 손에 꼽혔다.
게다가 두드러진 투고타저의 시대였다. 선동열, 송진우, 김용수가 한창일 때다. ERA 0~1점 대를 다투는 투수들이다.
그 속에서도 압도적인 이후 3년간은 그의 시대다.
1990년 = 3관왕(홈런 28개, 타점, 장타율) 최다타점 신기록(91개), 골든글러브(유격수)
1991년 = 5관왕(홈런 35개, 타점, 장타율, 최다안타, 득점) 최초 100타점/득점 돌파, 골든글러브(지명타자)
1992년 = 4관왕(홈런, 타점, 장타율, 득점) 홈런 40개 첫 돌파, 타점, 득점 신기록, 골든글러브(1루수)

5관왕인데, 인상액은 2050만 원
그래서 결국은 돈 얘기다.
아시다시피 연습생 출신이다. 첫 연봉은 300만 원이 전부였다. 타격 3관왕, 5관왕을 했다. MVP에도 두 번이나 뽑혔다. 얼마나 고소득자가 됐을까.
8개월 전 영상이다. 유튜브 채널 <스톡킹>에 출연했을 때 얘기다.
김구라 “그때 연봉이 국내에서 톱이었나요?”
장종훈 “해태의 김성한 선배가 7800(만원)인가 그랬어요.”
구라 “해태라서 조금 그런 것도 있어.”
종훈 “투수도 그때 선동열 선배가 그 정도예요.”
구라 “아, 1억이 안 됐었구나.”
종훈 “91년도에 5관왕을 했어요. 그리고 계약하러 (구단에) 들어갔는데, 고과 하시는 분이 ‘야, 너 고과 점수대로는 연봉을 못 주겠다’ 그래요.”
구라 “???”
종훈 “최고 고과 점수가 2000점인데, 그걸 넘어선 거였죠. 그런데 (연봉 인상률) 상한선 25%라는 것이 있어서, 아무리 잘해봐야,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그리고 다음 결말이 참 안쓰럽다.
종훈 “그래서 제가 7850만 원이 된다는 거예요.”
구라 “아, 50만 원 올려준 거야? 꼴랑?”
종훈 “재작년에 노시환이 2관왕(홈런, 타점)을 했는데 1억 3100만 원에서 3억 5000만 원으로 (2억 원 이상) 올랐어요. 저는 그때 2050만 원 올랐구요.”

백넘버 35번의 사연
그러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린다. MC(구라)가 애써 수습한다. “그때는 그것도 큰돈이죠.”
당사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죠. 그 당시는 2050만 원이라는 것도 굉장한 거였죠.”
김구라 “그래요. 처음에는 원망하다가, ‘맞아. 2050도 대단한 거지’ 하면서 합리화로 하루를 끝낼 수밖에 없는….”
무엇보다 본인이 정답을 안다. “주변 사람들이 다 그러죠. 몇 년 만 늦게 태어나지….”
이 영상을 요즘 다시 본다. 11년, 307억 원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어른거린다.
뭐, 어쩔 수 없다. 옛날 얘기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고, 물가도 변했다. 1000만 관중도 쉽게 넘기는 시절이다. 그런 말 해봐야 꼰대 소리만 듣는다.
그래도 참 많은 생각이 든다.
과연 노시환이 장종훈 보다 괜찮은 타자인가. 앞으로 그럴 것 같은 기대감이 생기는가. 여러 얼굴도 떠오른다. 문보경, 원태인, 김도영, 손아섭, 하주석…. 등등.
이글스 파크에는 4개의 번호가 걸렸다. 21번(송진우), 23번(정민철), 52번(김태균), 그리고 35번(장종훈)이다. (영구결번들)
이 번호는 입단 때부터 달았다. 홈런 35개를 넘기겠다는 의미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적은 숫자는 주전들, 정식 선수들의 몫이다. 연습생은 저 뒤에 있는 번호를 달아야 한다. 그나마 가장 앞에 남을 것을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게 정설이다.
그리고 이제 35번은 대전의 전설이 됐다. 아무도 달 수 없는 번호가 됐다. 비록 금전적 보상에 대한 상실감은 갈수록 커지겠지만.
(그도 FA라는 걸 해봤다. 35세 때인 2002년이다. 연봉 1억 2000만 원에 특별 상여금 3000만 원, 합계 1억 5000만 원 계약서에 사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