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갈등 불똥 튄 의료·바이오 벤처…임상 지연에 비용만 '줄줄'
의정 갈등이 병원 운영의 어려움을 넘어 의료·바이오 스타트업·벤처들의 생존까지 뒤흔들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임상시험이 지연되면서 관련 산업계가 폭격을 맞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이나 신의료기기 임상시험은 주로 대학병원에서 진행한다. 전공의들이 피험자 동의서를 받는 작업부터 임상 진행까지 상당 부분 참여한다. 현재 병원에 남은 전공의가 소수에 불과해 병원들은 임상시험을 진행하기 어려운 상태다. 임상을 의뢰한 기업들은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 임상시험 중단돼도 CRO 비용 지출...매출 계획 불투명해져
“임상시험을 진행할 수 있는 책임연구자(PI)가 부족해 일부 병원에서 임상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어요. 제한된 상황 속에서 소수의 의사 선생님들이 임상을 진행하고는 있지만 기존 계획 대비 크게 지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임상시험수탁기관(CRO)과 임상시험 코디네이터(CRC) 관리 비용 등 고정적으로 발생하는 비용은 계속 부담해야 하는 상황인데 의정 갈등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예측하기 어려워 더욱 불안해요"
한 의료기기 스타트업 관계자는 의정 갈등으로 임상시험이 부분 중단되면서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임상시험이 지연돼도 CRO와 CRC 관리 비용을 계속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 부담만 커진 상황이다.
임상 비용은 적게는 수억원, 많게는 수백억원이 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현재 의료갈등 사태가 언제 마무리될지 알 수 없어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한정된 자원으로 연구개발을 해야 하는 스타트업은 특히 회사의 존속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다.
또 다른 바이오 벤처기업 관계자는 “1명이라도 일단 환자가 피험자로 들어오면 그 순간 임상이 시작되고 임상을 진행하는 교수와 직원 대상 매뉴얼을 만들고 교육해야 한다”며 “CRO는 주기적으로 병원에 방문해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는지 체크하게 되는데 이런 체계가 갖춰진 상태에서 임상을 완전히 포기할 게 아니라면 그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임상시험을 일단 시작했다면 중간에 지연되더라도 고정 비용과 추가 비용을 내면서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정 갈등으로 인한 임상 지연은 CRO에게 귀책 사유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업이 약속한 돈은 지연 여부와 상관없이 지불돼야 한다. 그렇다고 CRO 업체들이 비용만 챙기며 사정이 낫다는 의미는 아니다. 새로운 임상을 시작할 수 없으니 CRO 또한 매출에 타격을 입고 있다.
임상시험뿐 아니라 기존 의료기기 또한 시험 인증 평가 건수가 크게 줄었다. 배민철 한국디지털헬스산업협회 사무국장은 ”한국산업기술시험원에 따르면 의정 갈등 전후로 신의료기기 허가를 위한 임상시험뿐 아니라 기존 의료기기에 대한 시험 인증 평가 건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기존에 병원에서 주사기를 100개 썼다면 지금은 환자가 줄어 그 만큼의 주사기가 필요하지 않고 검사 건수가 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의료기기 인허가 컨설팅 전문기업들도 컨설팅 의뢰가 줄어 마찬가지로 의정 갈등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비대면 임상 도입 필요...대면 고수하는 ‘인식 허들’ 넘어야
의정 갈등과 같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비해 ‘비대면 임상’으로 불리는 분산형 임상시험(DCT)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DCT는 환자들이 의료기관에 직접 방문하지 않고 원격으로 임상시험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이다.
디지털 치료제 기업 ‘웰트’의 강성지 대표는 ”임상시험이 복잡해 보여도 사실 간단하다“며 ”환자에게 동의서를 받고 진단한 뒤 환자 절반은 약, 절반은 위약을 주고 일정 시간이 지난 다음 치료 효과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DCT는 비대면 기술을 활용한 임상시험으로 전자 동의, 약 우편 배송, 환자들의 주관적 호소에 대한 설문조사 등 여러 프로세스를 잘 관리하면 체열, MRI 촬영 등 병원 방문을 통해 해야 할 부분을 제외하고 비대면으로 진행 가능하다”고 말했다.
미국처럼 넓은 곳은 임상 진행 시 환자 교통비만으로도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원격으로 진행 가능한 부분은 DCT를 적용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방에 사는 피험자가 서울을 오가며 임상에 참여하기는 쉽지 않다. 강 대표는 “병원에 와서 설명을 듣고 임상을 진행하는 대신 지하철 등의 임상 광고 QR코드를 찍고 임상시험을 등록하고 스마트폰 등을 이용해 문진하면서 DCT를 진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DCT는 환자의 편의성을 높이기 때문에 임상시험 피험자 모집을 보다 수월하게 만든다. 지금처럼 의정 갈등으로 병원 일손이 부족할 때는 의사들이 임상시험에 할애하는 시간을 줄여줄 수 있다. DCT를 통한 자동화 시스템은 의사들이 환자를 직접 대면해 진행하는 임상시험보다 임상에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한다.
다만 DCT를 도입하기 위해선 ‘인식 허들’을 넘어야 하는 상황이다. 강 대표는 ”은행 계좌도 비대면으로 개설하는 시대인데 임상시험 시 적어도 한번은 병원에 나와야 한다는 보수적인 인식이 존재한다“며 ”장거리를 한번이라도 이동해야 한다면 비대면 임상의 장점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에 대한 인식 개선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세영 기자 moon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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