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억 인구 시장, 두 브랜드가 나눠 가진 무대
인도는 인구 14억 명, 세계 5위 경제 규모지만 가전·TV 보급률은 아직도 성장 초입 단계에 있다. 이 거대한 공백을 사실상 양분하고 있는 브랜드가 한국의 삼성전자와 LG전자다. 인도 TV 시장 출하량 기준으로 삼성은 20%대 중반, LG는 10%대 중반을 꾸준히 유지하며 1·2위를 다투고 있고, 두 회사 점유율을 합치면 40%를 넘는다는 분석이 나온다. 단일 국가의 TV 시장에서 두 한국 브랜드가 이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 사례는 다른 신흥국에서도 찾기 어렵다.

미국·중국이 막힌 사이 파고든 전략
인도는 전통적으로 고율 관세와 복잡한 규제로 해외 가전의 진입 장벽이 높은 시장이다. 미국계 브랜드는 고가·프리미엄 이미지와 관세 장벽 탓에 주류가 되지 못했고, 중국 브랜드는 한때 저가 공세로 점유율을 키웠지만 국경 분쟁과 보안 문제로 강력한 규제에 직면했다. 2020년 이후 인도 정부가 중국산 앱과 일부 전자제품을 겨냥한 조치를 잇달아 내놓으면서, 중국산 가전의 성장세는 눈에 띄게 꺾였다. 이 공백을 파고든 것이 바로 한국 기업들의 ‘현지화+프리미엄’ 이중 전략이다.

R&D센터와 공장부터 먼저 세운 한국식 공략
삼성과 LG는 인도 시장을 단순한 수출 대상이 아니라 생산·개발 거점으로 보는 전략을 택했다. 삼성은 노이다 등에 대형 TV·스마트폰 공장을 두고 인도·중동·아프리카로 이어지는 복합 생산 허브로 키웠다. LG 역시 현지 공장 증설과 라인업 확대를 통해 중저가부터 프리미엄까지 폭넓은 제품군을 현지 생산으로 소화하고 있다. 여기에 인도만을 위한 R&D센터를 가동해 전력 사정, 기후, 주거 구조, 소비 취향을 반영한 기능을 꾸준히 추가했다. ‘인도에서 만든 인도용 제품’이라는 인식이 쌓이면서, 수입 완제품 브랜드와의 심리적 거리가 크게 줄었다.

수백 개 언어를 화면 속으로 넣은 기술
인도를 사로잡은 진짜 기술은 화질이나 디자인만이 아니다. 인도는 헌법상 공용어만 22개, 지역 언어까지 합치면 수백 개에 달한다. 삼성과 LG는 이 점에 주목해 TV 운영체제와 콘텐츠 플랫폼에 영어·힌디어는 기본, 타밀어·펀자브어·말라얄람어·벵갈어 등 주요 지역 언어 UI와 콘텐츠를 깊이 심었다. 리모컨·메뉴·음성 인식, 무료 스트리밍 채널, 뉴스·드라마·스포츠·영화까지 ‘내 언어’로 바로 보는 경험을 만든 것이다. 인도 소비자 입장에선 한국산 TV가 외국 브랜드가 아니라 “우리 동네 채널을 제일 많이 담은 TV”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국산처럼’ 받아들여진 K-가전
현지 맞춤형 언어·콘텐츠에 저소음·저전력·견고한 내구성, 에너지 효율 등 실질 기능이 더해지자 인도 가정의 거실 한가운데를 한국 브랜드가 채우는 속도가 빨라졌다. 일부 지역에선 결혼 혼수 목록, 새집 입주 필수품 리스트에 ‘삼성 TV’나 ‘LG TV’가 그대로 적힐 정도로 브랜드가 생활 속 고유명사가 됐다. 가격대로는 중국 브랜드보다 비싸면서도, “고장 적고 서비스가 빠르다”는 입소문과 ‘국제 브랜드+현지화’ 이미지가 결합해 인도의 중산층·상승층 수요를 흡수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산 TV는 인도에서 ‘사실상 국산처럼 느껴지는 외국 제품’이라는 독특한 위상을 얻게 됐다.

인도에서 만든 성공 공식을 더 넓혀가자
인도 TV·가전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다. 생산기지 선점, R&D·콘텐츠·언어를 아우르는 극단적 현지화, 글로벌 품질과 합리적 가격의 조합이 만들어낸 결과다. 무엇보다 시장을 ‘인구 14억명의 시험장’이 아니라 ‘장기 파트너’로 보는 관점 전환이 핵심이었다. 인도에서 검증된 이 공식은 동남아·중동·아프리카 등 다른 대형 신흥시장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
지역의 언어와 생활을 기술 안으로 깊이 끌어안아, K-가전이 더 많은 나라의 ‘국민 브랜드’로 자리 잡게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