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광고의 아버지'가 그린 포스터 속 '스파클링 와인'
이철형 / 와인소풍 대표
포스터의 대가 레오네토 카피엘로
기왕 포스터에 등장하는 샴페인 이야기를 하는 김이니 이번에는 ’현대 광고의 아버지’라 불리는 레오네토 카피엘로 작가의 작품에 대해 알아보자.
이 작품은 1867년 피에몬테 몬페라토 지역에서 설립된 콘트라토(Contratto)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스푸만테인 콘트라토 홍보 캠페인에 사용된 포스터다.
이 캠페인은 1922년부터 1925년까지 3년간 진행됐다.
이 스푸만테는 이탈리에서 샴페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스파클링 와인 중의 하나다.
콘트라토는 1910년 무렵부터 이 스푸만테를 해외로 수출했는데 그 품질을 인정받아 바티칸과 벨기에 황실, 사보이 황실에 공식 납품업체로 등록되기도 했다.
이 와이너리는 1919년부터는 품질이 뛰어난 빈티지 스푸만테를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이 스파클링 와인을 홍보하기 위해 캠페인을 벌인 것이었다.
레오네토 카피엘로의 작품을 알폰스 무하의 포스터(위)와 비교해보자. 무하의 작품이 1896년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확연히 대비된다.
사람마다의 호불호는 있겠지만 확연히 포스터의 진화가 이뤄진 것으로 느껴진다.
그럼 그의 초기 작품은 어떨까?
레오네토 카피엘로의 '샴페인 델베크'라는 작품은 앞의 먼저 소개한 작품보다 20년 전 작품으로 이 작가가 본격적으로 포스터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초기작이다.
이 작품은 샹파뉴 랭스에 소재한, 1832년 설립된 델베크(Delbeck) 샴페인 포스터로 역동성과 색감의 대비가 느껴진다.
이 와이너리의 설립자인 델베크(Félix-Désiré Delbeck)는 포도원에 투자한 플랑드르(당시는 프랑스령 지금은 벨기에 북부지역)의 은행가이자 뵈브 클리코의 조카인 발사미 퐁사르댕 남작(baronne Balsamie Ponsardin)의 남편이었다. 그는 프랑스 루이 필리프 (Louis Philippe 1830~1848년까지 프랑스 왕으로 재위) 왕실의 호감을 얻었고, 그가 생산한 삼페인은 1838년 프랑스 군주제의 공식 샴페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이 샴페인은 왕실 엠블럼과 프랑스 舊법원 공급업체(Fournisseurs de l'Ancienne Cour de France)라는 모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샴페인의 명성은 1870년부터 1912년까지 높아졌고 1884년에는 미국과 캐나다로 수입되는 샴페인 중 3위의 샴페인으로 랭크되기도 했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을 그린 작가는 이탈리아의 레오네토 카피엘로(Leonetto Cappiello (Italian, 1875-1942))다.
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태생이지만 주로 프랑스 파리에서 포스터 디자이너와 화가로 활동했다. 그는 23살이 되던 1898년에 프랑스 파리로 와서 활동하다가 프랑스 칸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특이한 것은 그는 그림에 대한 교육을 별도로 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첫 작품이 17살이 되던 1892년 피렌체 시립 미술관에 한 점 전시된 것을 보면 타고난 재능의 소유자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프랑스의 르 리르(Le Rire) 등과 같은 저널(Le Cri de Paris, Le Sourire, L'Assiette au Beurre, La Baionnette, Femina 등)에 그림을 그려 제공하는 캐리커처 작가로 첫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첫 캐리커쳐 앨범은 21살이었던 1896년에 만들어졌다. 1898년에는 파리로 이주했고 르 리르(Le Rire)라는 잡지에서 활동했다.
그리고는 1902년과 1903년에 24페이지와 38페이지짜리 캐리커처북을 출간하고, 1905년에는 스텐실을 바탕으로 직접 이미지에 색을 입히는 작업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이들 작품은 ‘카피엘로의 70개 데상들’이라는 책에 포함돼 있다.
그의 본격적인 포스터 작가로서의 경력은 1900년대 초반에 인쇄 사업가(Pierre Vercasson)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파리 거리를 생동감과 칼라가 넘치는 포스터로 장식하는 것이 꿈이었던 인쇄 사업가가 이 작가를 눈여겨보다가 계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당시 카피엘로는 인쇄 준비가 완료된 석판에 디자인을 성공적으로 전사하는 일도 담당했는데 이 작업 역시 그가 이미 해보았던 작업이었다.
그가 인쇄사업가의 이목을 끈 것은 기존 포스터 작가들과 다르게 흑백 대조에 볼드 글씨체를 크게 도드라지게 그리는 방식으로 포스터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는 1901년에서 1914년 사이에 포스터 디자인 기술에 혁명을 일으킨 스타일로 수백 장의 포스터를 만들었다.제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탈리아에서 통역사로 일하기도 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그는 포스터 제작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유명 대기업들의 유명한 포스터를 디자인한 출판사업가(Devambez)와 만나 독점 계약을 체결했다.
에이전시 역할을 한 출판사업가는 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고객을 찾는 데 집중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유명한 작품을 대륙 전역에 전파하는데 성공했다.
카피엘로는 살아 생전 530개 이상의 광고 포스터를 제작했는데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경매 및 전 세계 딜러를 통해 판매될 정도로 인기다.
같은 시기에 그린 그의 또 다른 작품을 감상하는 것으로 오늘의 칼럼을 마무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