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만두겠습니다” 김경문 감독 자진사퇴와 '달감독' 시대와의 이별

[이재국의 베팬알백] ㉜ 김경문 감독 시대 8년의 세월이 남긴 유산

두산 김경문 감독(왼쪽)이 경기 후 복도를 빠져나가고 있다. 오른쪽은 고영민. ⓒ두산베어스
“아니, 사퇴라뇨.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는 제가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냥 있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제 뜻을 받아주세요.”

2011년 6월 13일. 경기가 없는 월요일이었다. 두산 김승영 단장은 김경문 감독 집 앞까지 찾아가 설득하기 시작했다. 김 감독이 이날 구단 홍보팀을 통해 자진사퇴의 뜻을 전한 터였다.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김 단장은 화들짝 놀랐다. 전화로 얘기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김 감독의 자진사퇴 의사를 철회시키기 위해 직접 김 감독 집까지 찾아간 것이었다.

간밤에 잠을 못 잤는지 김 감독의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김 감독의 자진사퇴 의사는 완고했다.

김 감독과 김 단장은 1958년생 개띠로 동갑. 학교나 일반 직장에서 만났다면 친구로 지냈을 사이였다. 그러나 프로야구단 감독(field manager)과 단장(general manager)이라는 특수한 위치였기에 둘은 평소에도 서로를 존중하며 존댓말을 썼다. 그 이전에 코치와 구단 직원으로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난 당신하고 계속 하고 싶어요. 그냥 계속 감독 맡아주세요.”

“임태훈 건도 그렇고, 일이 이렇게 커졌기 때문에 제가 다 안고 그만두겠습니다. 이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번 시즌 최악의 부진을 겪고 있는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의 사령탑 김경문(53) 감독이 자진해서 사퇴했다. 두산은 13일 “김경문 감독이 성적 부진을 이유로 사퇴의사를 표명해 김광수 수석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임명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두산은 올해 남은 시즌 경기를 김광수 감독대행 체제로 치르게 됐다.』 <연합뉴스 2011년 6월 13일자>

[베팬알백_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시즌2-두산 베어스 시대’ 32번째 주제는 김경문 감독 시대와 이별 이야기다.

두산 김승영 단장(오른쪽)이 2009년 감독 통산 400승을 달성한 김경문 감독에게 꽃다발을 전하며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2년 후 이별 현장에서 마주하게 된다. ⓒ두산베어스

◆ 5월에 먼저 자진사퇴 의사 피력

전격적인 자진사퇴였다. 두산 구단이 이날 오후 보도자료를 통해 언론에 이 같은 사실을 알렸고, 뉴스가 터지자 두산 선수단뿐만 아니라 다른 구단, 언론, 팬들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김 감독이 마지막 인사를 할 때는 매우 미안해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저도 더 이상 설득을 할 수 없었죠. 그렇게 헤어지면서 돌아섰는데 저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김 감독하고 우승 한번 하고 싶었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아쉽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훗날 구단 사장 자리까지 오른 김승영 전 단장은 2011년 김 감독과 이별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김 감독은 한 달 전인 5월 초에도 구단에 자진사퇴 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어요.”

수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김 감독이 자진사퇴 의사를 처음 밝힌 것은 5월초였다. 5월 3일부터 5일까지 이어진 어린이날 시리즈에서 LG에 1승2패로 밀리고, 이어 벌어진 롯데와 잠실 주말 3연전(5월 6~8일)에서도 2연패 후에 가까스로 1승을 챙긴 뒤였다.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 싸움에서 이기거나 지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라는 뜻이다. 프로야구에서 일주일간 2승4패를 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당시 두산은 15승1무12패(승률 0.556)로 선전하고 있었다. SK(20승8패, 승률 0.714)와 LG(17승13패, 승률 0.567)에 이어 3위를 달리고 있었다.

문제는 경기 내용과 과정. 개막 이후 좋았던 흐름이 4월말부터 흐트러지면서 팀 분위기와 사기가 많이 저하된 시점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김 단장이 “아직 시즌 초반”이라며 극구 만류하면서 김 감독의 자진사퇴 의사는 물밑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2011년 에이스로 영입한 현역 메이저리거 출신의 더스틴 니퍼트 ⓒ두산베어스

◆ 이혜천 니퍼트 영입…‘우승에 올인’ 야심 찬 출발

두산은 2011년 어느 해보다 야심 차게 출발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김경문 감독 체제 하에서 7년 중 2006년을 제외하고 6년 동안 모든 해에 포스트시즌에 나갔다. 2006년에도 승률은 5할 이상(0.512)이었다. 운이 없었을 뿐이었다. OB 베어스 시절을 포함해 종전까지 두산 베어스 역사상 이런 황금기가 없었다. 그러나 우승이라는 마지막 방점을 찍지 못했다.

두산은 주력 선수들이 FA(프리에이전트)와 트레이드를 통해 빠져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특유의 ‘화수분 야구’와 김경문 감독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으로 항상 상위권에 포진했다. 매년 전문가들이 두산의 전력 약화를 걱정하며 “꼴찌 아니면 다행”이라고 혹평했지만, 두산은 늘 세간의 그런 평가를 우습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딘가 2%가 부족했던 것도 사실. 가을야구에서 매번 정상 일보 직전에서 미끄러져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서 2011시즌을 앞두고는 두산 프런트도 “김경문 감독 재임기에 우승 한 번 하자”며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면서 전력을 업그레이드했다. 특히 마운드 강화가 눈에 띄었다.

2010년 히어로즈와 트레이드를 통해 좌완 이현승을 영입한 데 이어 2011시즌을 앞두고는 일본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계약 만료된 좌완 이혜천을 데려왔다. 여기에 전년도 월드시리즈 로스터에 포함된 현역 메이저리거 저스틴 니퍼트까지 영입했다. 약점으로 평가되던 선발진이 좌우 구색까지 갖췄다. 시즌 개막에 앞서 항상 평가절하되던 두산이었지만, 2011시즌을 앞두고는 강력한 우승 후보로 평가받았다.

두산 김경문 감독이 2011년 개막에 앞서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목표를 밝히고 있다. ⓒ두산베어스
“올해는 말이 아닌 결과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강도 높은 마무리캠프와 스프링캠프를 소화한 두산 김경문 감독은 시즌 개막에 앞서 진행된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당찬 출사표를 던졌다. 굳이 ‘우승’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김 감독이 말한 ‘결과’가 무슨 뜻인지는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2011시즌. 두산은 4월 2일 개막전에서 새로운 외국인 에이스 니퍼트의 호투 속에 잠실 라이벌 LG를 4-0으로 누르고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 4월 24일까지 12승1무5패로 무려 7할대의 압도적 승률(0.706)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다만 그해 SK가 개막전부터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13승5패(승률 0.722)로 단독 선두를 질주하는 바람에 두산은 반 게임차로 2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두산 양의지가 2011년 5월 27일 잠실 한화전에서 7회초 홈으로 달리던 오선진과 충돌해 쓰러져 있다. 양의지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됐다. ⓒ두산베어스

◆부상자 속출…4월 말부터 삐그덕, 5월 최악의 성적표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 4월말부터 부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외야수 이종욱(왼손 엄지손가락)과 임재철(오른 발목)에 이어 유격수 손시헌(왼쪽 옆구리 골절)까지 줄줄이 다쳤다. 이종욱은 손가락 통증을 참고 뛰는 투혼을 발휘했지만, 손시헌과 임재철은 장기간 이탈할 수밖에 없는 중상이었다.

두산은 4월 27일과 28일 잠실 삼성전에서 시즌 첫 2연패를 당하더니 5월 5일 잠실 LG전부터 7일 잠실 롯데전까지 시즌 첫 3연패를 기록했다. 이 기간 9경기에서 2승7패의 부진에 빠졌다. 그러면서 롯데와 3연전이 끝난 뒤 앞서 설명한 대로 김 감독이 구단에 “자진사퇴” 의사를 전했던 것이었다.

어느 해보다 우승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던 해였기에 1패, 1패에 대한 김 감독의 스트레스는 커져만 갔다. 뜻대로 레이스가 풀리지 않자 지휘봉을 내려놓겠다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구단의 적극적인 만류 속에 김 감독이 다시 지휘봉을 잡았지만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더 많아졌다. 5월에 한 번도 연승을 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월말에는 2010년 신인왕 양의지가 홈 블로킹을 하다 왼쪽 골반 부위에 심한 타박상을 입어 열흘 이상 1군 엔트리에 빠지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팀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는 일이 발생했다. 마무리로 보직 이동해 4월에만 1승7세이브, 평균자책점 1.54의 호성적을 거두며 맹활약하던 투수 임태훈이 여성 아나운서와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연루된 것. 그런데 이 여성 아나운서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임태훈은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불펜은 과부하에 걸리기 시작했다.

충격파는 컸다. 김경문 감독은 물론 다른 선수들도 야구장에 나와 도저히 즐겁게 야구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런 악화일로의 상황을 타개하고 팀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5월 31일 1, 2군 일부 코칭스태프에 대한 보직 변경을 단행하기도 했다. 김진욱 2군 투수코치를 1군으로 올리고, 1군의 송재박과 윤석환 코치를 2군으로 내렸다. 김진욱 코치는 1군 불펜코치를 맡게 됐고, 불펜코치로 있던 조계현 코치가 메인 투수코치로 이동했다.

김 감독은 당시 “다 같이 고생하는데 코치한테만 책임을 묻는 형식이 되니…”라고 말끝을 흐리더니 “같이 고생하다가 보내는 게 짠하다”며 2군에 내려보낸 코치들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

두산은 이날 문학 SK전에서 5-1 승리를 거뒀지만, 5월 한 달 동안 7승1무17패(승률 0.292)로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쥐었다. 시즌 순위 또한 6위로 급전직하했다.

SK 김성근 감독(위)과 두산 김경문 감독이 같은 상황을 놓고 번갈아 다리를 들어 올리며 심판에게 항의를 하고 있다. 2000년대 후반 김경문 감독이 이끄는 두산과 김성근 감독이 지휘하는 SK는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 팬들에게 흥미를 선사했다. ⓒ두산베어스

◆ 6월에도 반전 실패…김경문 감독 충격의 자진사퇴

6월 들어서도 분위기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산 특유의 끈끈함과 뚝심은 사라지고 모두가 우왕좌왕했다. 6월 4일 잠실 삼성전부터 9일 광주 KIA전까지 시즌 첫 5연패에 빠졌다. 순위는 다시 한 단계 더 내려갔다. 8개 구단 중 7위로 내려앉았다. 아래에는 넥센 히어로즈 한 팀밖에 없었다.

두산은 10일 잠실 SK전에서 경기 초반 0-4로 끌려가다 부상에서 돌아온 양의지가 2회말 동점 만루홈런을 치고, 3회말 김동주가 결승 솔로홈런을 때리면서 9-5 역전승을 거두고 일단 연패 사슬을 끊었다.

하지만 11일과 12일 SK전에서 각각 1-7, 0-6으로 또다시 완패하며 2연패를 당했다. 특히 12일 패배는 더욱 뼈아팠다. 연패 스토퍼로 기대한 에이스 니퍼트가 4.2이닝 6실점(5자책점)으로 속절없이 무너졌다. 두산 타선은 김광현(6.1이닝)~정우람(1.2이닝)~전병두(1이닝)를 상대로 무득점에 그쳤다.

더군다나 상대 팀은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SK. 2000년대 후반부터 라이벌로 자리 잡은 팀으로 가을야구에서 한을 안겨줬던 상대였다.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SK를 넘어야 했다. 그런데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이틀 연속 무기력하게 패하자 김경문 감독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6월 들어서도 3승8패. 시즌 성적은 57경기에서 23승2무32패(승률 0.418)로 승패 마진 –9를 기록했다. 팀 순위도 7위에 고착됐다.

따지고 보면 시즌 경기수의 42.9%밖에 소화하지 않은 시점. 쉽지는 않지만 향후 행보에 따라서는 충분히 반전을 할 수 있는 경기수가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두산은 그동안 그런 미러클 신화를 많이 만들어온 팀이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결국 경기가 없는 13일 월요일에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구단에 자진사퇴 의사를 밝혔다. 두산 구단 직원들은 휴식일인 월요일에 비상이 걸렸다.

두산 김경문 감독은 행운(7)과 불행(4)이 공존한다는 의미로 74번을 달았다. ⓒ두산베어스
“올 시즌 어느 때보다 구단의 지원도 좋았고 나름대로 준비도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처음 구상한 대로 풀리지 않아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사퇴하는 것이 선수들이 서로 뭉치는 계기를 만들 것입니다. 새로운 분위기에 빨리 적응해 올 시즌 포기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노력으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게 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7시즌 동안 두산에 있으면서 하루하루 유니폼을 입고 덕아웃에 앉아 있는 것, 그리고 선수들과 같이 그라운드에서 생활하는 것이 저에게는 커다란 행운이며 축복이었습니다. 제가 어디에서 다시 야구를 하든 처음 두산에서 프로에 몸을 담았던 만큼 두산은 언제나 저에게 진정한 고향일 것입니다. 특히 두산 팬의 사랑은 과분할 정도로 대단했고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두산 베어스와 팬 여러분에 대한 저의 관심과 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김경문 감독은 6월 13일 구단 보도자료를 통해 이와 같은 별도의 사퇴의 변을 밝혔다.

김경문 감독의 자진사퇴 소식이 전해지자 두산 팬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두산 인터넷 홈페이지는 접속자수 폭증으로 한때 다운되기도 했다. 홈페이지 팬 커뮤니티 게시판인 ‘곰들의 대화’에는 “팬을 위한 야구를 하는 김경문 감독 때문에 두산을 응원하게 됐다”, “꼴찌를 해도 좋으니 돌아와 달라”는 등의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글과 “전쟁 중에 장수가 먼저 배에서 내렸다”며 김경문 감독을 성토하는 글들로 도배가 됐다.

두산 팬들이 자진사퇴한 김경문 감독을 그리워하며 관중석에 응원 문구를 써붙여 놓았다. ⓒ두산베어스
두산 팬들이 자진사퇴한 김경문 감독을 그리워하며 관중석에 응원 문구를 써붙여 놓았다. ⓒ두산베어스

◆ 김광수 수석코치 ‘감독대행’ 승격…5할 승률로 시즌 마무리

두산 구단은 김경문 감독이 사퇴하자 김광수 수석코치를 감독대행으로 내정했다. 6월 14일 곧바로 잠실구장에서 넥센과 경기를 펼쳐야 했기 때문에 빠른 결정을 내렸다.

김광수 감독대행은 누구보다 두산 팀 사정을 잘 아는 인물. 1982년 OB 베어스 창단 멤버로 시작해 1992년까지 2루수로 활약했다. ‘날다람쥐’라는 별명처럼 빠른 발과 탁월한 주루 감각, 견고한 수비를 자랑했으며 통산 타율 0.248에 27홈런, 189도루의 성적을 남겼다.

1993년부터 OB에서 수비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뒤 김인식 감독 시절 수비·주루 코치를 맡았고, 2005년부터는 김경문 감독 체제에서 수석코치로 보좌해왔다.

김광수 감독대행(가운데)이 강인권 코치(왼쪽), 김민호 코치와 함게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두산베어스

김 감독대행은 6월 14일 잠실구장에서 경기 전 선수단 미팅을 통해 “주저하지 말고 자신 있게 스윙하고 공을 던져라”고 주문하면서 뒤숭숭한 팀 분위기의 전환을 꾀했다.

사령탑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충격을 받은 선수단은 침묵했다. 그러나 이심전심으로 다시 하나로 뭉쳤다.

김광수 감독대행 첫 경기에서 외국인 선발투수 페르난도 니에베의 호투(5.2이닝 3실점)와 1회말 김현수의 결승 3점홈런이 터지며 넥센을 5-3으로 꺾었다. 특히 실망만을 안기던 ‘계륵’ 페르난도는 7경기(선발 6경기) 만에 KBO리그 데뷔 첫 승을 올렸다.

이어 15일 넥센전에서는 타선이 대폭발하며 13-4 승리를 거두고 2연승을 올렸다. 6월 21일부터 7월 2일까지 장마를 사이에 두고 4월(19~24일) 이후 첫 5연승을 올리기도 했다. 한바탕 태풍이 크게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고요와 안정이 찾아왔다.

김 감독대행은 후반기에 팀 재정비에 나섰다. 선발 요원으로 활약하던 이혜천과 이현승을 불펜으로 옮기고, 불펜의 김승회와 김상현을 선발로 전환했다. 기존 니퍼트, 이용찬, 김선우 등과 함께 선발 로테이션을 새롭게 구성했다. 7월부터 간간이 마무리로 기용하던 노경은을 마무리로 돌리기도 했다.

야수 쪽에서도 부상으로 이탈했던 손시헌 이종욱 김동주 등이 가세하면서 점점 두산다운 야구를 펼치기 시작했다. 8월을 10승13패, 9월을 12승13패로 장식한 두산은 10월의 잔여 5경기를 5연승으로 마무리했다. 10월 1~3일 잠실 라이벌 LG와 3연전을 스윕하고, 5~6일 목동 넥센 2연전을 싹쓸이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

김광수 감독대행은 76경기를 지휘하며 38승38패로 정확히 5할 승률을 맞췄다. 김경문 감독 자진사퇴의 후폭풍을 수습하며 팀을 빠르게 안정시켰다. 두산의 2011시즌 전체 성적은 61승2무70패(승률 0.466). LG와 한화를 2게임차로 밀어내고 5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난파선 일보 직전까지 갔던 두산으로선 최소한의 자존심을 세운 셈이다.

그러나 당시엔 8개 구단 체제여서 4위까지 포스트시즌 진출 자격이 주어졌다. 그동안 가을야구를 하는 것이 당연했던 두산으로선 2006년 이후 5년 만에 포스트시즌의 방관자가 됐다.

김경문 감독은 1982년 OB 베어스 창단 멤버로 입단해 포수로 활약했다. ⓒ두산베어스
1982년 원년 우승을 이끈 배터리 박철순 투수와 김경문 포수가 포옹하고 있다. 선수 시절 박철순은 21번, 김경문은 22번을 달았다. ⓒ두산베어스

◆ 김경문 감독 시대 8년이 남긴 것들

김경문은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베어스의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포수로서는 원년 한국시리즈 최종 6차전 선발 포수로 나가 박철순의 완투승을 이끌며 우승의 감격을 맛봤고, 1988년 개막전에서는 장호연의 노히트노런을 리드하기도 했다.

1991년을 끝으로 선수 유니폼을 벗은 그는 미국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연수를 한 뒤 1994년부터 3년간 삼성 코치로 지도자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1997년 친정팀 OB(현 두산)에 복귀해 코치 생활을 이어갔다.

2003년 말 김인식 감독이 사퇴하면서 2004년부터 두산 지휘봉을 잡은 뒤 감독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감독 첫해 팀을 플레이오프까지 끌어올렸고, 2006년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포스트시즌으로 이끌면서 지도자로서 성공 시대를 만들어갔다.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만 3차례 그쳐 우승의 한을 풀지 못했지만,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대표팀 감독을 맡아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수확해 명장 반열에 올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대표팀 김경문 감독이 덕아웃에서 취재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뒤쪽에 당시 취재를 하던 기자의 모습도 보인다. 김 감독은 사상 최초 올림픽 금메달을 이끌면서 야구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두산베어스

2011년 중도 퇴진하기까지 8시즌 동안 두산 베어스를 지휘한 그는 통산 960경기 512승432패16무(승률 0.542)의 성적을 베어스 역사에 남겼다. 자진사퇴한 2011시즌을 제외하면 매년 5할 이상의 승률을 올렸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김경문 감독은 베어스 야구의 토대를 만든 인물로 평가할 만하다.

우선 ‘화수분 야구’를 꽃피운 지도자다. 주력 선수들이 FA나 트레이드를 통해 유출되는 상황이었지만 끊임없이 신상품을 발굴해냈다. 손시헌, 이종욱, 김현수 등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진흙 속의 진주를 캐내 뚝심으로 밀어붙이면서 스타플레이어로 만들었고, 임태훈 이용찬 양의지 등을 신인왕으로 배출하면서 항상 신진 세력이 샘솟는 구단으로 발화시켰다.

두산의 전통인 ‘뚝심’에 ‘허슬플레이’를 입힌 것도 김경문 감독이다. 이종욱, 고영민, 민병헌, 오재원, 정수빈 등으로 짜여진 ‘육상부’와 김동주, 최준석, 홍성흔, 이성열 등으로 구성된 ‘씨름부’의 조화 속에 두산 야구는 늘 박진감과 에너지, 매력이 넘치는 야구를 선보였다.

두산 '육상부' 이종욱은 김경문 감독 시절 '화수분 야구'와 '허슬두'의 선두주자였다. ⓒ두산베어스

지고 있더라도 강판된 투수가 라커룸에 들어가지 않고 덕아웃에서 동료들과 하나가 돼 소리를 지르고, 마지막까지 승부를 포기하지 않고 붙어 싸우는 '미러클 베어스'의 야구는 팬들을 매료시켰다. 김 감독의 이런 카리스마와 승부사로서 스타일이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두산의 빠르고, 힘있고, 과감한 야구는 2000년대 후반 SK 와이번스의 치밀한 야구와 충돌하며 리그의 트렌드와 흥행을 선도했다.

김경문 감독 시대 이후 두산은 팬층의 스펙트럼이 가장 확장된 팀으로 평가받는다. OB 시절부터 누적된 충성스런 팬이 탄탄한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여기에 더해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이후 신규 팬, 특히 여성 팬이 가장 많이 증가한 팀으로 꼽혔다. 그러면서 2009년부터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최초로 10년 연속 100만 관중을 기록하는 밑거름을 만들었다.

김경문 감독이 구축한 그런 전통 위에 2010년대 마침내 베어스 왕조의 전성기가 펼쳐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경문은 남자답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다. 한번 결심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인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승부사지만 알고 보면 잔정도 많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기도 하다. 가끔씩 홀로 미사리 라이브 카페에 들러 음악을 듣고, 독서를 즐기는 낭만과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OB 베어스 선수 시절의 김경문 그는 노래와 독서를 즐기는 낭만파였다. ⓒ두산베어스

두산은 김경문 감독 시대에 참 많은 것을 얻었다. 김 감독 역시 두산 베어스에서 참 많은 것을 이뤘다. 야구인생의 절반을 보낸 곳이기에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지금도 두산 구단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을 많이 갖고 있어요. 제가 프로 선수로 시작한 구단도 베어스였고, 감독을 시작한 구단도 베어스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대학 시절에 몸이 좋지 않아 은퇴도 생각했는데 OB 베어스가 저를 지명해 주면서 프로 선수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몸이 허락할 때까지 후회 없이 해보자고 했는데 10년 동안 프로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구단에서 저를 믿어주셨기 때문에 감독도 할 수 있었고요.”

김경문 전 감독은 두산 베어스와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원년부터 베어스라는 팀 분위기 자체가 다른 팀과 달랐어요. 뚝심이 있었고 선수들 캐릭터가 정말 좋았어요. 그런 전통이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베어스 팬들도 그런 부분을 좋아했고요. 제가 두산 감독을 하면서 약속 한 것 중에 한 70% 정도는 이뤘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사실 아쉬운 부분은 있죠. 특히 팬들을 가을잔치에 자주 모시기는 했는데 우승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두산 김경문 감독을 비롯한 선수단이 2010년 정규시즌 홈 최종전을 마친 뒤 관중석에 올라가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김경문 감독은 팬을 위한 야구를 중요시하는 감독이었다. ⓒ두산베어스

◆ 김경문 감독의 NC 사령탑 내정설에 대한 오해와 진실

그런데 김경문 감독이 8월 말 신생팀 NC 다이노스 감독으로 선임되자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NC 감독으로 가기로 미리 얘기가 다 된 상황에서 일부러 자진사퇴한 게 아니냐”는 얘기였다. 이에 대해 김 감독은 단호했다.

“저도 나중에 그런 얘기를 다른 경로를 통해 들었는데 그건 전혀 아니었습니다. 당시 제가 사퇴하지 않으면 팀 분위기를 수습할 수 없다고 보고 제가 책임을 지기 위해 자진사퇴 결정을 내렸거든요. 그런 오해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소문을 듣고는 솔직히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섭섭하기도 했고요. 이 말씀만은 꼭 드리고 싶어요. 이 부분만큼은 두산 팬들에게도, 제 자신에게도 절대 부끄럽지 않습니다.”

당시 단장이었던 김승영 전 사장도 이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건 잘못된 소문”이라고 일축했다.

“김경문 감독이 사퇴하고 미국에 가 있었는데, 몇 달 후에 NC 대표가 된 이태일 사장이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김경문 감독에 대해 이것저것 묻더라고요. 감독으로 영입하려나 보다 싶었죠. 그래서 그때 제가 ‘좋은 사람이니 모시고 가라’고 적극적으로 추천을 해줬어요. NC 감독으로 가기로 해놓고 두산 감독을 자진사퇴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시간적으로도 안 맞고, 김경문 감독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OBS라디오 프로야구 해설위원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