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사랑한 화가’ 기리는 미술관서… 200살 은행나무 독살 논란

전하영 기자 2026. 5. 2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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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미술관, 인근 은행나무에 제초제 주입
제거 민원 기각 뒤 훼손…구청 대응도 도마
시에 보호수 지정 요구…제도 공백 지적도
서울 종로구 부암동 환기미술관 앞에서 부암동 주민들과 서울환경연합 활동가들이 모여 은행나무 무단 훼손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환경연합 인스타그램 갈무리

서울 부암동의 한 유명 미술관이 담장 옆 은행나무에 제초제를 주입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커지고 있다. 자연을 주요 화두로 삼았던 화가를 기리는 미술관이 수령 200년 가까운 나무를 훼손하려 했다는 점에서 비판이 이어지는 중이다.

서울환경연합은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환기미술관 앞에서 은행나무 독살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미술관 측의 공식 사과와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했다.

단체와 주민들에 따르면 논란은 최근 한 지역 주민이 은행나무 잎이 비정상적으로 누렇게 마른 것을 발견하며 시작됐다. 이후 경찰과 함께 인근 CCTV를 확인한 결과, 지난달 22일 녹색 작업복을 입은 남성들이 나무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제초제를 주입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나무 뿌리 주변에서는 수간주사 캡 여러 개도 발견됐다.

조사 결과 제초제 주입을 의뢰한 인물은 환기미술관 관계자인 것으로 확인됐다. 미술관 측은 경찰과 주민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업체를 통해 나무 밑동에 11개 구멍을 뚫고 제초제를 투입한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은행나무는 미술관 담장 옆에 위치해 있었으며, 지난해 말 환기미술관은 종로구청에 "은행나무가 커져 외벽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며 제거 민원을 제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구청 점검 결과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내려지며 별도의 제거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미술관 측이 제초제를 주입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실상 고의 훼손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환기미술관 인근 수령 200년이 넘은 은행나무의 상태. 서울환경연합 인스타그램 갈무리

"자연담은작품전시하면서나무독살했다니위선적"
논란이 더욱 커진 것은 환기미술관이 한국 현대미술 거장 김환기 화백을 기리는 공간이라는 점 때문이다. 김환기 화백은 '나무와 이야기하는 예술가'라는 의미의 '수화(樹話)'를 호로 사용했을 만큼 자연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온라인에서는 "김환기 화백이 살아 있었다면 담장을 없애고 나무를 지켰을 것", "자연을 담은 작품을 전시하면서 실제 나무는 독살했다니 위선적" 등의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해당 은행나무가 미술관 소유 부지에 위치한 나무가 아니라는 사실까지 알려지며 비판 여론은 더욱 거세지는 분위기다.

종로구청의 대응을 둘러싼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주민들이 구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사유지 도로라 관여하기 어렵다"는 답변만 들었다는 것이다. 서울환경연합에 따르면 종로구는 지난 2014년부터 보호수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보존 가치가 있는 나무를 관리하기 위한 '아름다운 나무 지정 관리 제도'를 운영 중이다. 사유지에 위치한 나무도 보호 대상으로 삼겠다고 밝혀온 만큼, 이번 대응이 무책임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민들과 활동가들이 은행나무를 향한 응원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미술관 측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유지라어렵다"… 종로구대응에도비판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나무의사' 우종영 국가유산청 수목 수리기술자는 "은행나무는 제초제에 특히 취약한 수종"이라며 "제초제 피해를 입은 경우 즉시 대량의 물을 주입해 독성을 희석해야 하는데 초기 대응이 늦어져 안타깝다"고 밝혔다.

최진우 서울환경연합 전문위원은 "100년, 200년을 살아온 나무를 독살했는데 '사유지라 어렵다'는 말만 반복하는 것이 지금 도시 나무가 처한 현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서울환경연합은 환기미술관 측에 공식 사과와 함께 나무 응급조치 비용 부담을 요구하는 한편, 종로구에는 해당 은행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해 보존할 것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