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책 없어요?" 오픈런도 빈손…"난생 처음" 인쇄소 감격한 진풍경 [르포]
"공학을 전공한 개발자라 문학은 잘 모르지만 너무 자랑스러워요. (작품을 보면) 작가와 같은 한국인으로 동질감도 느껴요." - 20대 직장인 B씨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인 지난 11일 오전 9시20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 시민 수십명이 매장 안으로 달려갈 이른바 '오픈런'을 준비하고 있었다. 디지털 세대인 이른바 MZ(밀레니얼+Z 세대) 시민도 상당수였다.
10분 뒤 교보문고 문이 열리자 시민들은 '2024 노벨문학상' 푯말이 있는 가판대로 향했다. 한강 작가의 책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경기도 광주에서 광화문까지 책을 사러 왔다는 이모씨(20)는 "수능에서도 한국사가 중요한 과목이 아니지 않냐"며 "'소년이 온다'만 읽어서 이번에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구매했다"고 밝혔다.
종로에 사는 유모씨는 오픈런으로 매장에 들어갔지만 책을 사지 못했다. 유씨는 "일어나자마자 왔는데 책을 못 샀다"며 "여기가 제일 큰 서점인데 이렇게 빨리 없어질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어 "(한강 작가를) 맨부커상 수상 때부터 알았다"며 "난해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노벨상을 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밝혔다.
같은날 오전 10시에 개점하는 광화문 영풍문고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시민들이 개점 전부터 서점 앞에 진을 지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 완전히 열리기 전에 허리를 숙여 매장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매장에선 알랭 드 보통, 무라카미 하루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대표작과 함께 비치됐던 한강 작가의 책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점 직원 30대 A씨는 "노벨상이 발표되고 오늘 새벽부터 인터넷 예약이 밀려들었다"며 "서점 재고 때문에 예약을 급히 막았는데 방금 문을 연 지 8분만에 재고가 동났다"고 말했다.
◆ '한강 세대' 젊은 독자들 "노벨문학상 장면 생중계로 봤다"
한강 작가가 국제적으로 주목받던 시기 학창 시절을 보낸 MZ 독자들은 "뿌듯하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출판업계에서 종사하는 한모씨(23)는 "한강의 소설을 이해하지 못하던 2016년부터 이해하게 된 2024년까지 내가 점차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한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전 세계에서 모두가 한강의 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직장인 박모씨(25)도 "나 같은 90년대생은 한강의 글을 통해 1980년과 1947년의 경험과 감정을 느낀다"며 "10~20대 독서 기록에 그의 책들이 담겨있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또 다른 박모씨(23)도 "노벨문학상을 받는 장면을 생중계로 봤다"며 "한강 작가 자서전도 읽을 생각"이라고 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1970년 11월 광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고 다음해 단편소설 '붉은 닻'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2016년엔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았다.
"한강 작가가 상 타고 30분만에 '책 더 찍어야 한다'고 전화를 받았어요. 주말에도 공장 풀로 가동할 겁니다.(웃음)"
지난 11일 오전 10시 경기 고양시 '한영문화사' 인쇄 공장. 문틈으로 쉴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음이 새어 나왔다. 컬러 인쇄기 5대에 종이가 1장씩 빨려 들어가면서 굉음을 냈다. 종이를 말리는 알코올, 인쇄에 쓰는 잉크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곧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할 종이 더미가 공장 곳곳에 쌓였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인쇄소가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한영문화사는 한강 작가가 2021년 펼쳐낸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초판 1쇄부터 단독으로 찍어낸 곳이다.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강 작가가 수상 후 '가장 먼저 읽었으면 하는 작품'으로 꼽은 책이다. 그는 지난 10일 노벨위원회와 한 인터뷰에서 "최신 작품인 '작별하지 않는다'가 시작이 됐으면 한다"며 "모든 작가는 자신의 최신 작품을 가장 좋아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꺼이 주말 반납…35년 인쇄 베테랑도 '난생처음'
인쇄소는 지난 10일 노벨문학상 선정이 발표되고 30분 후인 저녁 8시30분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발주 전화를 받았다. 출판사 직원 목소리는 다급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만 35년을 일하며 200여개 출판사를 관리하는 이명원 상무(62)도 처음 겪는 일에 초조해졌다.
첫 물량은 돌아오는 월요일인 오는 14일에 보내기로 했다. 물량을 맞추기 위해 공장이 보유한 인쇄기 5대를 모두 24시간 가동한다. 특수한 상황에 직원들도 주말을 반납했다. 책에 쓰는 종이는 430연, 모두 21만5000장을 주문했다. 하룻밤새 이 많은 종이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지난 11일 오전 10시30분이 돼도 종이가 도착하지 않자 직원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직원들은 가지고 있던 종이 더미의 포장지를 빠른 손놀림으로 벗겼다. 쌀쌀한 날씨에도 풀 가동된 공장 열기에 통풍이 잘 되는 반소매 티셔츠를 입었다.
사무실 직원들은 수화기를 들고 통화에 열중했다. 직원들은 거래처 직원에게 "사장님 저희 '작별하지 않는다' 먼저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 용지는 내일 언제쯤 들어올 수 있어요? 오전 8~9시에는 들어왔으면 해요"라며 애를 태웠다.
같은날 오전 11시가 지나자 종이를 실은 4.5톤 트럭, 18톤 트럭이 연이어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직원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종이를 운반했다. 임원들까지 나서 지게차를 타고 종이를 날랐다.
◆바쁘지만…인쇄업계 그야말로 '감격'
인쇄소 직원들에게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은 그야말로 감격이다. 수상 당일 저녁 8시30분 출판사 직원 전화를 직접 받은 이원희 과장은 "당장은 물량을 처리해야 하니 긴장되고 직원들 신경이 날카롭다"면서도 "수상 자체가 앞으로 출판업이 발전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책이 향할 서점가에선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책 주문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대형 서점 온라인 사이트는 한때 마비됐다. 오프라인 서점은 책을 사려고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장사진이다. 시민들 수십명이 문이 열리자마자 매장 내로 달려가는 이른바 '오픈런'도 벌어졌다.
또 다른 직원은 "인쇄업계에서 일하며 출판업계 사람들이랑 가까이 지내니까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더욱 신기하게 느껴진다"며 "한국인으로 감격스럽고 뿌듯한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김미루 기자 miroo@mt.co.kr 오석진 기자 5stone@mt.co.kr 고양(경기)=김선아 기자 seona@mt.co.kr 김호빈 기자 hobin@mt.co.kr 이현수 기자 lhs17@mt.co.kr 이혜수 기자 esc@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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