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자동차가 전기 중형 SUV 'EV5'의 가격을 대폭 낮추며 본격적인 시장 공략에 나섰다. 출시 당시 중국 시장 대비 높은 가격 책정으로 소비자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던 EV5가 파격적인 할인 정책을 내놓으면서 테슬라 모델Y와의 정면 대결 구도를 형성하게 됐다.

업계에 따르면 EV5 스탠다드 모델의 가격은 환경친화적 자동차 세제혜택 반영 전 기준으로 에어 트림 4310만원, 어스 트림 4699만원, GT라인 4813만원이다. 롱레인지 모델은 세제혜택 반영 후 에어 4575만원, 어스 4950만원, GT라인 5060만원으로 책정됐다. 환경친화적 자동차 세제혜택과 정부·지자체 보조금, 전기차 전환지원금까지 모두 적용할 경우 소비자 실구매가는 3400만원대부터 시작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테슬라 모델3의 시작가 4199만원과 비교했을 때 상당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모델3가 LFP 배터리를 탑재해 보조금 혜택이 크지 않아 실구매가가 3000만원대 후반에 형성되는 점을 고려하면, EV5는 비슷한 가격대에서 한 체급 높은 중형 SUV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

EV5를 둘러싼 논란은 지난해 하반기 국내 출시 당시부터 시작됐다. 중국 시장에서 2년 전 먼저 출시된 EV5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여러 편의 옵션이 삭제되고 가격은 오히려 높게 책정됐기 때문이다. 중국판 EV5에는 BYD의 LFP 배터리가 탑재되고 트렁크 테이블, 냉온장고, 1열 레그서포트, 벤치시트 등이 기본 제공되지만, 한국판은 CATL의 NCM 배터리를 사용하며 이러한 편의 사양들이 모두 빠졌다. 시작가는 약 2000만원 차이가 났다.

다만 한국 시장에 출시된 EV5에는 중국판에 없는 첨단 안전 사양들이 대거 추가됐다. 아이페달 3.0, HDA2(고속도로 주행 보조 2), 페달 오조작 방지 시스템 등이 그것이다. 특히 페달 오조작 방지 시스템은 최근 빈발하는 급발진 논란 속에서 주목받는 기능으로, 운전자가 실수로 가속 페달을 밟았을 때 차량이 스스로 감지해 제동하는 안전장치다. 테슬라 모델Y 주니퍼에도 탑재되지 않은 사양이다.

기자가 EV5 롱레인지 모델을 직접 시승하고 6000km 이상 장기 운행한 차주를 취재한 결과, 모델Y와 비교했을 때 실용성 측면에서 여러 강점이 확인됐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트렁크 공간 활용성이다. 박스형 디자인을 채택한 EV5는 트렁크 개구부 높이가 80cm에 달해 모델Y의 70cm보다 10cm 높다. 돔형 디자인의 모델Y는 유려한 외관을 자랑하지만 트렁크 입구가 상대적으로 좁아 큰 짐을 싣고 내릴 때 불편함이 있다.

차박(차량 캠핑) 활용도도 EV5가 우위를 보인다. 실내 V2L(Vehicle to Load) 콘센트가 트렁크에 기본 탑재돼 있어 전자제품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모델Y는 실외용 V2L 어댑터를 별도로 구매해야 하며, 가격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넓은 트렁크 개구부 덕분에 차박 시 실내에서 바라보는 시야도 훨씬 개방적이다.

승차감 측면에서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EV5에 적용된 아이페달 3.0 시스템은 가속과 감속을 부드럽게 제어해 급격한 쏠림 현상을 최소화한다. 시승 과정에서 급가속이나 급제동 시에도 탑승자가 불편함을 느낄 정도의 쏠림은 발생하지 않았다. 반면 모델Y는 급격한 가감속 시 일부 탑승자가 멀미를 느낄 수 있다는 평가가 있다.
실내 수납공간도 넉넉하다. 센터 콘솔 하단 공간이 EV3보다 훨씬 넓고, 컵홀더 주변에도 소지품을 놓을 공간이 충분히 마련돼 있다. 무선충전 패드 외에도 지갑이나 핸드폰 등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여러 곳에 배치돼 있어 실용성이 높다.

주행 성능도 기대 이상이다. 공인 주행거리는 460km이지만, 실제 주행에서는 이를 상회하는 성능을 보였다. 영상 10도의 겨울 날씨에도 480km 이상 주행이 가능했으며, 주행 조건에 따라서는 520km까지도 주파할 수 있었다. 전기차의 최대 약점으로 꼽히는 겨울철 주행거리 감소 문제가 EV5에서는 크게 나타나지 않은 셈이다.
아쉬운 점도 있다. 400V 급속충전 시스템이 탑재돼 충전 속도가 78~80kW 수준에 그친다. 배터리 잔량 20%에서 100%까지 완충하는 데 1시간 30분에서 40분이 소요된다. 800V 시스템을 탑재한 현대·기아의 다른 전기차 모델들과 비교하면 분명히 느린 편이다. 장거리 운행 시 충전 대기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또한 중국판에 있던 트렁크 테이블과 냉온장고가 삭제된 점은 차박 애호가들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들 옵션은 야외 활동 시 활용도가 높은 아이템들이다. 선루프 역시 일부 트림에서만 선택 가능한데, 고무 패킹의 노화로 인한 풍절음 문제를 우려해 선루프를 제외하는 소비자들도 적지 않다.

기아가 이번에 단행한 파격적인 가격 인하는 테슬라의 공세와 중국 전기차 브랜드들의 시장 진입에 대응하기 위한 출혈 전략으로 풀이된다. 테슬라는 최근 국내 시장에서 대대적인 할인 행사를 진행하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고, BYD 등 중국 브랜드들도 가성비를 앞세워 시장 점유율 확대에 나서고 있다. 기아로서는 기존 EV3, EV6와의 가격 체계는 유지하되 실제 소비자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출시 초기에 구매했던 소비자들은 200~300만원을 더 지불한 셈이 돼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들에 대한 사후 관리 방안이 필요해 보인다. 또한 처음부터 LFP 배터리 옵션을 함께 제공하고 가격을 더 낮췄다면 초기 논란 자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V5는 3000만원대 중반에서 구매할 수 있는 중형 전기 SUV로서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했다는 평가다. 넓은 실내 공간과 높은 실용성, 첨단 안전사양, 준수한 주행거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가격 대비 가치가 뛰어나다. 테슬라 모델Y가 브랜드 파워와 첨단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향후 FSD(완전 자율주행) 기능에 대한 기대감으로 승부한다면, EV5는 실용성과 안전성, 그리고 가격 경쟁력으로 맞불을 놓는 전략이다.
전기차 시장의 본격적인 대중화 시대를 앞두고 소비자들의 선택지는 한층 넓어졌다. 개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우선순위에 따라 최적의 선택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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