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 사고 ‘정신 나간 괴물’ 일탈? 미 대선 핵심 쟁점 ‘총기 규제’ 떠올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동북쪽으로 80㎞ 떨어진 곳에 인구 1만8천여명의 소도시 와인더가 있다. 2024년 9월4일 오전 8시(현지 시각)께 그곳 애팔래치 고등학교 학생들이 첫 교시 수업을 위해 교실로 들어섰다. 10시20분께 신입생 콜트 그레이(14)가 교실에서 나가더니 반자동 소총(AR-15)을 들고 나타났다.
비슷한 시각 교내 상주경찰이 지역 경찰 쪽에 총기 소지범이 나타났다고 무전을 쳤다. 10시20분부터 26분께까지 그레이가 총기를 난사했다. 학생 2명과 교사 2명이 목숨을 잃었고, 9명이 다쳤다. 그레이는 곧 교내 경찰에게 자수했고, 출동한 지역 경찰 쪽에 넘겨졌다. 현지 일간 ‘애틀란타 저널-컨스티튜션’은 “애팔래치 고교 사건은 올해 들어 미국에서 발생한 45번째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라고 짚었다.
청소년에게 총기 사준 부모도 기소
조지아주 수사국(GBI) 쪽 설명을 종합하면, 그레이는 2023년에도 소셜미디어에 “중학교 한 곳을 날려버리겠다”는 글을 올린 혐의로 연방수사국(FBI)의 수사 선상에 오른 바 있다. 하지만 해당 협박 글을 그레이가 직접 작성했다는 증거가 불충분해 별다른 후속 조처가 이뤄지지 않았다. GBI 수사결과 그레이는 2018년 2월14일 플로리다주 파크랜드 지역의 메로리 스톤먼 더글라스 고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사건은 미 고교에서 벌어진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으로 모두 17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친 바 있다.
그레이는 1급 살인죄 4건으로 기소됐고, 미성년자가 아닌 ‘성인’으로 재판을 받게 됐다. 처벌 수위를 높이기 위해서다. 그의 아버지 콜린 그레이(54)도 2급 살인죄와 어린이 학대죄 등으로 기소됐다. 그는 2023년 성탄절 선물로 아들에게 범행에 사용된 총기를 사준 것으로 전해졌다. 자녀가 저지른 총기 난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부모가 기소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앞서 2021년 11월30일 미시건주 옥스포드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사망 4명, 부상 7명) 범인의 부모에게 미시건주 법원이 2024년 4월 각각 징역 10년과 15년형을 선고한 게 사상 첫 처벌 사례다.
“규율이 잘 서 있는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를 침해해선 안 된다.” 미국 건국 초기인 1791년 12월15일 의회가 비준한 수정헌법 제2조는 총기 소지를 ‘기본권’으로 명시했다. ‘민병대’의 대척점에 ‘상비군’이 있다. 건국 이후 상비군을 창설한 연방 정부가 이를 동원해 주 정부의 ‘독립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수정헌법 2조에 깔려있다. 이런 인식은 “총기 규제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공권력의 부당한 침해”란 주장으로 연결된다.
‘정신 나간 괴물’의 소행일 뿐이라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간 첫 대선 후보 토론회를 앞두고 발생한 애팔래치 고교 사건으로 총기 규제 문제가 다가오는 대선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민주-공화 양당 대선 후보가 사건 직후 보인 반응은 양쪽의 입장이 얼마나 다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희생자와 유족에게 위로를 전한다. 정신 나간 괴물한테 소중한 아이들을 너무 일찍 빼앗겼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9월4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썼다. 애팔래치 고교 사건을 ‘개인(괴물)의 일탈’로 규정한 셈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선거운동 기간 내내 조 바이든 행정부가 도입한 각종 총기 규제 정책을 “총기 소유자와 제조자에 대한 공격”이라며, 재집권하면 모든 규제를 철폐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도 싫다. 이런 점을 인정하기 싫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의 부통령 후보인 제이디 밴스 상원의원은 9월5일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밴스 의원은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싶어 안달이 난 사이코 입장에서 학교는 손쉬운 목표물이 될 수 있다. 그러니 학교의 보안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총기 사고는 ‘개인’(사이코)의 문제로 여기니, 대안은 총기 규제가 아닌 학교 보안 강화일 수밖에 없다. 공화당 쪽은 학교 총격 사건의 해법으로 교사가 교내에서 총기를 휴대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주장해왔다.
해리스 부통령은 전혀 다른 입장이다. 그는 9월4일 뉴햄프셔주 선거유세에서 “전염병처럼 번지는 총기 난사 사건을 당장 멈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해리스 부통령은 반자동 소총을 포함해 군대가 사용하는 총기와 유사점이 있는 총기 19개 종에 대한 일반 판매를 금지하는 등의 내용을 뼈대로 한 ‘살상용 무기 규제’를 적극 추진해왔다. 총기 난사 사건의 근본 원인은 ‘개인의 일탈’이 아닌 느슨한 총기 규제란 ‘제도’의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나도 수정헌법 2조를 옹호한다. 하지만 우리의 첫 번째 책임은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그의 러닝 메이트인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9월5일 펜실베이니아주 유세에서 “총기 소유자이자, 제대 군인이자, 사냥이 취미인 사람으로서 말한다. 총기 규제정책은 수정헌법 2조가 보장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 그저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살해되는 것을 방지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25년간 학교 총기 난사 416건
1999년 4월20일 오전 흉기와 폭발물, 권총과 반자동소총 등으로 중무장한 에릭 해리스(18)와 딜런 클리볼드(17)가 콜로라도주 콜롬바인 고교에 들어섰다. 둘은 1시간 남짓 동안 총알 700여발을 난사했다.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이 숨지고, 20여명이 다쳤다.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경찰과 대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 뒤 미국 전역의 학교에 금속탐지기가 배치되는 등 학교 보안이 대폭 강화됐다.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9월4일 콜롬바인 고교 총격 사건 이후 애팔래치 고교 사건까지 25년여 동안 미국에서 발생한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은 모두 416건에 이르며, 총격범의 평균 나이는 16살이라고 전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